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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시울 Apr 28. 2024

사람은 사라지고, 지도 위의 점과 선만 남았다

베르됭 전투 - 앨리스터 혼(교양인)  ●●●●●●◐○○○


베르됭 이후에는 프랑스군도 독일군도 예전과 같을 수는 없었다.



   공격 유형은 비참할 만큼 판에 박힌 것이었다. 먼저 예비 포격이 진행되는 동안 제1선은 고통스럽게 대기하고, 곧 공격이 시작된다. 공격에 나선 프랑스군은 운 좋은 소수만, 일반적으로 극소수만 독일군의 첫번째 참호선에 도달해 총검으로 생존자를 죽인다. 그리고 잠시 전투가 중단되었다가 곧 적이 자신들이 빼앗긴 진지에 맹렬한 탄막을 퍼붓고는 피할 수 없는 반격을 개시한다. 마지막으로, 공격군은 빼앗은 땅을 지키기에는 수적으로 열세여서 병력을 많이 잃은 채 자신들의 참호선으로 내쫓긴다. 4분의 3에서 10분의 9 정도의 남은 병력은 중간 지대의 철조망에 걸려 창자를 드러낸 채 죽거나 죽어간다. 이들은 1870년의 그라블로트와는 달리 부상자를 데려올 수 있게 전투가 일시적으로 중단될 리 없다는 사실을 알았고 오로지 적군 기관총 사수의 자비를 바랄 뿐이었다. 

                                                                                                                      - p. 59. 마른 전투의 영웅 조프르




   . '몽유병자들'과 '8월의 포성'에 이어 세 번째 1차대전사를 읽는다. 10개월에 걸쳐 서로 반걸음을 나섰다가 다시 반걸음을 물러나는 극심한 소모전의 반복이었던 베르됭 전투. 애초에 전투의 목표 자체가 뭔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는 것이 아니라 서로 밀고 밀리는 가운데 비록 우리 군 20만 명이 죽더라도 상대방 50만 명을 죽이면 달성되는 것이었기에 자연히 전쟁의 양상은 시체를 묻을 땅조차 없는 생지옥이 펼쳐지는 소모전이 될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본문에 언급되는 1차대전의 비참한 전투 양상은 - 적의 참호에 포격을 가하고 효과가 있든 없든 일단 진격했다가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고 간신히 점령했던 참호에서 수적 열세로 퇴각하는 - 전선 어디에서건 이런 지옥을 '효율적으로' 생산해낼 수 있었다. 


   . 이 책을 읽을 때가 막 토크멘터리 전쟁사에서 1차대전에 관한 부분을 보기 시작한 때였는데, 이 책을 읽으면 이세환 기자님이 1차대전의 수뇌부들 대부분을 전범으로 규정해야 한다고 열변을 토하는 게 절로 이해가 간다. '8월의 포성'에서 서술된 전쟁 초반 독일의 진격이 마른 강에서 저지되고 스위스에서 북해까지 참호가 이어져 대치가 시작된 이후로, 서부전선에서는 전쟁 마지막 해에 이르기까지 유의미한 승리를 얻을 방법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군의 수뇌부는 마치 워게임을 하듯, 머릿속에서 생각해 낸 전술을 시험하는 용도로 군인들을 철조망과 기관총 앞에 내세웠다. 결국 그 끝에 이르면 군인이 사람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딱히 진격하지 못해도 상관없으니 그냥 우리편보다 상대편을 더 많이 죽이면 이득이라는 작전까지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 자연히 앨리스터 혼의 이 두꺼운 책에선 처음 100여 페이지, 마지막 100여 페이지의 전략적인 설명 부분을 제외하고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소모전과 그 속에서 벌어지는 지옥에 대한 묘사가 반복된다. 비록 그 안에서도 지휘관이 교체되거나 유의미한 성과를 얻을 수 있었던 기회가 날아가기도 하는 등 전쟁의 국면이 몇 차례 바뀌기는 하지만, 그래봐야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영국의 왕립공원'을 합한 면적을 두고 서로가 왔다갔다했을 뿐이다. 


   . 더구나 그렇게 처절하게 싸웠음에도 불구하고 그 끝은 어느 한 쪽이 승리한 것도 아니고, 서로가 힘이 빠진 가운데 다른 곳에서 전투가 벌어지면서 우선 순위에 밀려 서로가 어영부영 원래의 위치로 돌아간 것에 불과했다. 그렇다보니 80만에 달하는 '사상자'가 - 병력이 아니다. 사상자다!!!! - 발생한 전투였음에도 이야기할 수 있는 건 진격이나 성과나 승리가 아닌 비참한 살육과 참극과 지옥일 뿐이었다. 그런 묘사를 300페이지 내내 읽어야 했으니, 이 책이 반전을 위한 것이었다면 그 어떤 책보다도 훌륭하게 목적을 달성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베르됭 전투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매우 중요한 분수령이었다. 베르됭 이전에는 독일이 전쟁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있었지만, 열 달이 지나는 동안 그 가능성은 점차 낮아졌다. 베르됭 이후에는 프랑스군도 독일군도 예전과 같을 수는 없었다. 베르됭 전투가 끝난 뒤에는 연합국의 주된 전쟁 부담이 프랑스에서 영국으로 넘어갔다. 또한 이 전투가 미국이 참전을 결정하는 데 끼친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 p. 18. 1870 운명의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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