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정고양이의 산책 혹은 미학 강의 - 모리 아키마로 ●●●●●●●●○○
"괴벽, 비자러리bizarrerie지."
"괴벽, 비자러리bizarrerie지."
느닷없이 튀어나온 그 말에 놀랐다. 아니 놀랐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옆에 있는 검정 슈트로 몸을 감싼 남자가 마치 신이나 악마 같았다. 남자는 심술궂은 미소를 살짝 떠올리며 연못 수면을 바라보고 있다. 그는 검정고양이라 불린다. 물론 본명은 아니지만 아무도 그를 본명으로 부르지 않는다.
- p. 9. 달과 나의 거리.
. 에드거 앨런 포와 일상과 철학의 조합이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장은 간결하며 서정적이고, 사건들은 하나같이 여운을 남긴다. 쉽지 않은 내용이 쉽게 읽히는 문장으로 쓰여져 있고, 지식과 이론을 풀어놓는 것에서 시작하는 이야기는 마지막에 이르면 감성을 한 번씩 건드려준다. 그래서 어려운 내용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페이지를 넘기고 나면 여운이 맴돈다.
. 이런 장르에 으레 나올법한 스물 네 살에 교수가 된 천재 미학교수 '검정고양이'. 그리고 같은 나이에 박사과정 1년차의 햇병아리 연구자(이것만해도 충분히 대단해보이는데)인 '나'의 구도. '나'는 일상 속에서 이런저런 수수께끼를 접하면서 이를 검정고양이에게 이야기하고, 검정고양이는 미학에 대한 여러 지식과 이론을 풀어놓으며 추론을 통해 사건을 해결해나간다. 그 사이에 산책이 있고, 대화가 있고, (시리즈의 처음이라 그런지) 감정이 오갈 듯 말 듯하다. 아마도 오갔다고 봐야겠지. :)
. 각각의 단편들은 에드거 앨런 포의 작품들과 짝을 이루지만, 그렇다고 딱히 내용이 유사하거나 리메이크를 한 건 아니다. '거리', '벽', '복수' 같은 에드거 앨런 포의 핵심 키워드들과 상징이 될 만한 부분을 단편마다 매칭하는 식이라 포를 정말 좋아하는 독자가 아니라면 딱히 의미를 느끼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일례로 첫 단편인 '달과 나의 거리'의 경우 도입부에 모르그 거리의 살인이 언급되지만, 그렇다고 포의 소설처럼 끔찍한 살인이 나오거나 알 수 없는 외국어가 나오지는 않는 것이다. 사실 저자가 굳이 포와의 공통점을 보여주기 위해 오마주한 도입부가 아니었다면 공통점을 찾기가 힘들 정도다. 그래서 작품 속에서 등장인물들의 입을 빌려 어떤 부분의 이야기인지 설명하긴 하지만, 굳이 포의 단편을 읽지 않았더라도 즐기는데는 딱히 무리가 없다.
"뒤팽이 추리를 펼치지. 이 뒤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뒤팽은 이 사건의 범인인 D와 면식이 있어. 소설 후반에 뒤팽이 전에 빈에서 D에게 심한 짓을 당했다는 기술이 있어. 뒤팽은 이 일을 절대 잊지 않겠다고 말했고. 즉, 이 추리의 쾌락이 요구한 건 보복의 쾌락이야. 이런 식으로 이 소설의 근저에는 쾌락의 정신이 깔려 있어."
- p. 165. 숨기면 꽃.
. 여섯 편의 단편 중 잘못 그려진(?) 옛 지도의 비밀을 찾는 첫 단편인 '달과 나의 거리', 니체를 전공하는 한 대학생의 자살에 대한 진상을 알아내는 '벽과 모방' 두 편은 상당히 뛰어난 이야기였다. 이 시리즈의 후속작이 두어 편 더 있다는데 - 하긴 아몬틸라도 술통, 어셔 가의 몰락, 적사병의 가면, 윌리엄 윌슨 등 모티브로 쓸만한 포의 단편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 국내에는 후속작이 번역되지 않은 대신 카프카를 본따 소설을 쓰기 시작한 한 남학생의 이야기나 아쿠타가와 류노스케가 현대로 타임슬립해왔다는(?!) 다른 작품들이 번역됐다고 한다. 사실 이 책이 워낙 재미있었기에 검정고양이 2편부터 꼭 나와줬으면 싶지만.... 생각해보면 요네자와 호노부의 사례처럼 어떤 책으로든 베스트셀러가 되면 거기서부터 잊혀진 소설도 번역되어 나올 수 있는거니까. 뭐든 하나라도 걸리는 게 맞긴 하다. 다만 지금 추이로 보면 갈 길이 멀어보이는 게 아쉬울 뿐(....)
"재미있는 해석이군. 도시계획에 몰두한 주모자의 머릿속에는 시시때때로 환상이 깃들었을 거네. 왜 안 그렇겠나, 계획 단계에서는 매순간 도시 전체를 장악할 수 있으니 말일세. 그런 의미에서는 권력자들 또한 현실과 동떨어진 허구에 빠지는 예술가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 p. 39. 달과 나의 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