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스있는 제목, 깨알같은 수다, 심드렁한 추리

비둘기 속의 고양이 - 애거서 크리스티(해문) ●●●●◐○○○○○

by 눈시울
비둘기 속의 고양이.jpg
비둘기 속의 고양이 2.jpg


"샤이스타의 무릎을, 그 여자아이의 무릎을 자세히 본 적이 있소?"



"그런데 난 어떤가? 내가 무슨 일을 했지! 병원과 학교를 짓고 복지시설과 주택을.... 국민이 원하고 있는 모든 것을 주었어. 그런데 국민은 그런 것을 원하고 있는 게 아니란 말인가? 할아버지가 하던 것처럼 공포정치 쪽을 원하고 있다는 건가?"

"아마 그럴지도 모르죠." 하고 밥 롤린슨이 말했다. "조금 불공평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그것이 사실이 아닐까요?"

"그런데 왜, 밥, 왜 그렇지?"

밥 롤린슨은 한숨을 쉬며 자신이 느끼고 있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자신의 부족한 표현력으로 어떻게든 해보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것은요, 그분은 국민에게 구경거리를 제공했기 때문입니다 - 진상은 그 점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분은 일종의 - 배우였습니다. 제가 말씀드린 의미를 아실지 모르겠지만." - p. 23.




. 가상으로 설정된 중동의 모 국가에서 쿠데타가 코앞에 닥쳤다는 정보가 들어온다. 이미 쿠데타를 막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걸 안 왕은 가지고 있던 보석을 친구에게 맡기고, 친구는 고민 끝에 마침 딸과 함께 여행 중이던 누나의 짐에 그 보석을 숨긴다. 하지만, 그 장면을 창 너머의 건너편 건물에 있던 여자가 보고 있었다. 그리고 급작스럽게 장면이 전환된다.


. 상류층들이 다닌다는 영국의 한 여학교에 쿠데타 중 피살된 왕의 사촌여동생이 입학한다는 정보가 들어오고, 정보보는 그 여학교에 정원사로 위장한 정보원을 파견한다. 그리고 한참 동안 여학교에 대한 세세하지만 사소한 이야기들이 적당한 유머가 곁들여진 채 이어진다. 멋지고 노회한 여교장에 대한 묘사가 있고, 그녀의 친구인 심약한 느낌의 나이 많은 교사에 대한 묘사가 있고, 그 사이사이에 몇몇 학생과 교사들이 등장했다가 퇴장한다. 거기에 교육철학에 대한 한바탕의 논쟁까지 나오면서 대체 이 소설이 어디로 가는 것인가(....) 싶던 와중에, 갑작스럽게 교사 한 명이 살해당한다. 거기에 한 여학생의 테니스 라켓을 노린 절도 미수 사건이 발생한다. 하지만 좀처럼 진척이 없는 지지부진한 수사. 그제서야, 포와로가 등장한다.


. 솔직히 말해 미묘함과 지루함 사이를 왔다갔다하는 소설이었다. 제목은 센스 있었고, 여학교에서 벌어지는 시시콜콜한 에피소드들도 나름 깨알같은 재미가 있었다. 다만 사건이 일어난 후의 전개가 너무 지지부진하다는 게 문제. 300쪽이 살짝 넘어가는 소설에서 200페이지가 넘어가고 나서야 포와로가 등장하고, 그 전까지 의미있는 진전이 전혀 없다. 웬만하면 머리 좋은 일반인이 등장해 사건을 어느 정도 진행시켜 놓거나, 하다못해 연애라도 하기 마련인데(....) 그런 역할을 맡았어야 할 정보원은 어느 새 공기화 되어 있고, 이런저런 인물들이 나와 각자의 입장에서 모르겠네요. 모르겠군요. 미궁입니다를 반복한다. 물론 포와로는 나오자마자 50쪽 만에 범인을 알아낸다(....)


. 거기다 그 과정에서 적절하게 뿌려졌어야 할 범인에 대한 단서는 너무 부족했고, 의외의 범인을 만드는 것까지는 좋지만 너무 의외로 만들려다보니 정작 범인이 나오고 나서도 그래서 이 사람이 왜 범인인데 싶은 건 좀. 배경이나 설정은 나쁘지 않았는데 정작 결과물이 그에 미치지 못한 게 아쉬웠던 이야기였다.




"어느 분에게인가 샤이스타의 무릎을 주의깊게 본 적이 없느냐고 물은 적이 있습니다. 무릎이란 데는 실로 나이를 잘 나타내 주는 곳이지요. 스물서너 살 정도의 여자의 무릎은 결코 열네댓살 여자아이의 무릎과 같지 않습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어느 분도 그 아이의 무릎을 주의깊게 본 분이 없었습니다."

- p. 260.

이전 26화산책이 있고, 대화가 있고, 감정이 오갈 듯 말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