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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시울 Aug 04. 2024

때로는 종교인으로, 때로는 정치인으로, 때로는 장군으로

신의 대리인 - 시오노 나나미(한길사)  ●●●●●●●●◐○


지옥의 거리에 깔린 돌은 선의로 이루어져 있다.



   이제 아무도 기사들을 말릴 수는 없었다. 분노의 함성을 지르면서, 프로스페로 콜론나가 앞장선 제1 중무장 기병대 8백 기가 지축을 울리며 돌진했다. 상대는 적진 우익에 있는 중무장 기병대다. 파브리치오 콜론나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가 직접 지위하는 제2 중무장 기병대와 제3 중무장 기병대도 전쟁터를 비스듬히 가로질러 돌격하는 제1 중무장 기병대의 뒤를 따랐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철갑옷으로 감싼 중무장 기병 1천 7백 기와 1천 5백 기의 격돌이다. 근대전으로 말하면 전차부대가 정면으로 맞부딪친 것이나 마찬가지다. 창이 힘껏 뻗어나간다. 갑옷이 금속성 소리를 내며 부딪친다. 기병을 한 사람씩 따라다니는 보병 따위는 끼어들 여지도 없다. 넓은 평야에서 오직 그곳만이 강철빛 소용돌이가 된 것 같았다. 이것이 중세의 꽃인 중무장 기병의 마지막이자 최대의 무대가 되었다. 

                                                                                                                                      - p. 312. 칼과 십자가.




   . '르네상스의 여인들', '체사레 보르자 혹은 우아한 냉혹'에 이어지는 시오노 나나미 여사의 르네상스 시리즈 세 번째 책. '체사레 보르자-'를 리뷰하면서 그 책에 이어지는 세 교황의 이야기가 있다고 했었는데, 그게 바로 이 책이다. 이 책은 그렇게 체사레 보르자의 협력자(아버지)와, 경쟁자와, 목격자(친구)였던 세 교황이 각각 다른 모습으로 르네상스 시기 강대국에 둘러싸인 이탈리아의 정세를 헤쳐나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여기에 프리퀄로 한 교황의 이야기가 더 있지만 그건 생략. :) 





   이탈리아의 불행은 이탈리아가 많은 군주국과 공화국으로 분열되어 있는 데 있다. 게다가 교황청도 이탈리아 안에서 7분의 1 정도의 영토를 가지고 있다. 이래서는 강력한 군주 밑에 통일되어 가는 프랑스나 에스파냐의 먹이가 될 뿐이다. 그것을 피하려면 교황령을 포함한 이탈리아 전역을 통일된 세속국가로 만들어, 각국에 대항할 수밖에 없다. 

                                                                                                           - p. 223. 알렉산데르 6세와 사보나롤라.





   . 르네상스의 여인들에서도 언급했듯이, 우리에겐 아름다운 예술작품으로 잘 알려진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그 시절의 이탈리아는 풍요롭기는 했을지언정 평화롭지는 않았다. 밖에서는 프랑스와 독일과 스페인이 호시탐탐 이탈리아를 노렸고, 안은 수십개의 영지로 나눠져 한줌의 땅을 차지하고 내부의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다 밀라노 공작 일 모로가 나폴리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밀라노를 차지하기 위해 프랑스의 샤를 8세를 끌어들이면서 본격적인 이탈리아의 혼란이 시작되었다. 기회만 노리던 강대국들은 서로 이탈리아를 갈라먹기 위해 이탈리아 곳곳을 전쟁터로 삼았다. 이런 상황에서 교황은 더 이상 종교지도자에 머무를 수 없었다. 때로는 교황령의 통치자로, 때로는 노회한 정치인이자 외교관으로, 때로는 늙은 몸에 무거운 갑주를 두르고 장군으로도 활약해야 한다. 그런 시기였다. 





   지금까지 교황 율리우스 2세는 오른손에 칼, 왼손에는 십자가를 쥐고 정치를 해왔다. 그러나 지금은 오른손에 쥐고 있던 칼이 부러져 쓸모가 없어진 상태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왼손에 쥐고 있던 십자가를 오른손으로, 아니 두 손으로 높이 치켜들 수밖에 없지 않은가. 적어도 새 칼을 다시 손에 넣을 때까지는 이것으로 승부해보자. 율리우스 2세는 칼을 휘두르는 상대에게 십자가만으로 영원히 맞설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렇게 믿기에는 지나치게 이탈리아인다웠다. 

                                                                                                                                      - p. 320. 칼과 십자가.





   . 세 교황은 그런 시기를 각자의 방식으로 헤쳐나간다. 알렉산데르 6세는 사보나롤라의 종교적 광신에 맞서 철저한 현실정치로 이에 대응하고, 아들인 체사레 보르자에게 힘을 실어줌으로서 강대국들에 맞설 수 있는 하나 된 이탈리아를 만들고자 했다. 율리우스 2세 역시 강대국에 맞선다는 목표는 같았지만, 그 힘을 세속군주가 아닌 신권 - 자신 아래에 두고자 했고, 전쟁과 줄타기 외교를 통해 이를 실현하려 했다. 그 모든 시도가 수포로 돌아간 후 집권한 레오 10세는 멀지 않은 곳에 보이는 이탈리아의 몰락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남은 모든 여력을 끌어모아 한바탕 아름답고 흥겨운 축제를 벌임으로써 비록 사라질 시간이지만 역사에 이런 시기가 있었다는 한 페이지를 새기고자 한다. 그런 각자의 모습이 시오노 나나미 여사의 드라마틱한 문장으로 잘 그려져 있는 게 이 책의 매력이다.





   "인간의 마음은 약한거야.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해 글을 쓰거나 말을 하면, 저도 모르게 그만 우쭐해지거나 변명을 늘어놓게 되지. 우쭐해지면 현실을 보지 못하게 돼. 그리고 변명을 늘어놓으면 어떻게 되는지는 구태여 말할 필요도 없겠지. 자기 행위를 변명하기 시작한 사람은 아무 일도 할 수 없게 된다네."

                                                                                                           - p. 224. 알렉산데르 6세와 사보나롤라.


   사명감에 불타는 사람이 갖는 위험과 과오는 바로 여기에 있다. 물론 그런 사람은 좁은 의미에서의 이기심은 갖고 있지 않고, 세상 사람들의 칭송을 받는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이 숭고한 소명을 위해 한몸을 바친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망설임이나 의심을 품지 않고, 따라서 독선적이고 광신적이 되기 쉽다. 그래서 현실을 보지 못한다. 따라서 방식은 대담하지만, 하는 일에 도무지 일관성이 없다. 당연히 결과는 실패로 끝난다.

                                                                                                                                      - p. 336. 칼과 십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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