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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시울 Aug 24. 2024

악마는 없다. 아무리 잔혹하더라도, 그것은 인간이다.

피에 젖은 땅 - 티머시 스나이더(글항아리)  ●●●●●●●●◐○


   아우슈비츠는 '죽음의 푸가'의 "코다"밖에 안 되었다.



   분명 아우슈비츠가 홀로코스트의 주요 장소이기는 하다. 학살된 유대인의 대략 여섯 명 중 한 명이 그곳에서 죽었다. 그러나 아우슈비츠의 살인 공장은 마지막으로 가동했던 살인 공장이며, 사람을 죽이는 기술을 최고 수준까지 발휘한 시설도 아니었다. 가장 효율적인 총살 부대나 아사 정책이 사람들을 더 빠르게 죽일 수 있었다. 트레블린카도 아우슈비츠보다 속도가 빨랐다. 아우슈비츠는 유럽에서 가장 큰 규모의 유대인 집단인 폴란드 유대인과 소련 유대인을 학살하는 주된 장소도 아니었다. 독일 점령 상태에서 대부분의 폴란드계, 소련계 유대인들은 아우슈비츠가 주요 살인 공장이 되기 전에 이미 학살당한 상태였다. 

   비르케나우의 가스실과 화장 복합 시설이 1943년 봄에 자리잡았을 때, 홀로코스트에서 희생된 유대인의 4분의 3 이상은 이미 죽은 상태였다. 다시 보자면, 소련과 나치 체제의 손으로 의도적으로 살해된 수없이 많은 사람의 90퍼센트 이상은 비르케나우의 가스실이 가동하기 시작할 무렵 이미 끝장나 있었다. 아우슈비츠는 '죽음의 푸가'의 "코다"밖에 안 되었다. 

                                                                                                                            - p. 676. 인간성에 대한 질문




   1) 드라마 '밴드오브브라더스'에서 윈터스 소령과 그의 부대원들은 독일에 진입한 후 마을 근처에 있는 숲에서 유대인 수용소들을 발견한다. 그곳에서는 먹지 못해 비쩍 마른 채 죽음 직전의 상태에서 구원된 수백명의 사람들과 이미 굶고 병들어 죽은 수많은 시체들이 발견된다. 경악한 부대원들은 분노에 가득 차 마을 사람들을 끌고 와서 강제수용소를 직접 정리하게 하고 살아있는 사람들을 구제한다. 


   2) 10여년 전에 처음으로 유럽에 갔을 때 다하우 수용소에 들렀던 적이 있다. 히틀러가 정권을 잡고 최초로 만든 수용소이자 전쟁 최후의 최후까지 운영되던 수용소 중 하나인 다하우. 히틀러는 기존 전선에서 밀려나기 시작하자 단순히 수용자들을 풀어줄 수 없다는 아집만으로 독일군의 손이 닿는 곳에 있는 모든 수용자들을 독일로 끌고 들어왔고, 물자나 위생대책이라고는 있을 수 없는 환경에서 티푸스까지 발발하면서 종전을 몇 달, 혹은 며칠 앞두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3) 블라덱 슈피겔만의 체험담을 그 아들인 아트 슈피겔만이 만화로 그린 '쥐'의 무대인 아우슈비츠에는 가스실이 있었다. 우리가 아는 홀로코스트에 대한 참혹한 이미지 - 들어오자마자 일할 수 있는 이들과 없는 이들을 분류해 일할 수 없는 이들을 가스실에서 처형하고, 일할 수 있는 이들 역시 처참한 환경에서 강제노역을 시키다 더 이상 일할 수 없게 되면 가스실에서 처형하고, 전쟁 말기 헝가리 등에서 뒤늦게 대규모로 잡아들인 유대인들을 가스실도 아닌 소각로에서 태워버리던 지옥 - 는 대부분 아우슈비츠에서 나온 것이다. 





   아우슈비츠는 홀로코스트의 정점이었고, 그것이 최고조에 이른 시기는 이미 독일의 손안에 있던 소련 및 폴란드 유대인 대다수가 목숨을 잃고 난 뒤였다. 홀로코스트를 통해 100만 명 가량의 소련 유대인이 사망했고, 아우슈비츠에서 죽은 인원은 이들 전체의 1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한다. 폴란드 유대인은 홀로코스트에서 약 300만명이 숨졌으며, 이들 중 아우슈비츠에서 살해당한 이들은 고작 7퍼센트 밖에 되지 않는다. 

                                                                                                               - p. 496. 히틀러, 살육 공장을 돌리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독일 내에 있던 게토나 수용소들은 물론, 지옥 같은 아우슈비츠조차도 1930년대부터 전쟁까지 이어졌던 참상을 표현하기엔 부족하다고 이야기한다. 아우슈비츠에서조차 누군가는 일을 하면서 생명을 부지할 수 있었고, 전쟁 말기에 헝가리와 다른 점령국에서 대규모로 잡혀 온 유대인을 제외하고는 어디까지나 노동력으로 사용되는 게 우선이었다. 물론 그 역시 참혹하기 그지없지만, 일을 할 수 있는 이들이나 변덕스러운 선택에 뽑히지 않은 이들은 강제노역을 하며 하루하루 살아남을 수 있었다. 


   . 그러나 베우제츠, 트레블린카, 소비보르, 헤움노처럼 우리가 그전까지 이름도 들어보지 못했던 곳에서는 아무도 일을 하지 않았다. 그저 수많은 유대인들이 철도로 실려와서, 내리고, 가스실이나 가스트럭으로 들어가 살해당했다. 그렇게 수용소 한 곳 당 수십만, 혹은 백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살해당했다. 그 방식은 기계적이었고, 운영은 정교했으며, 완벽했다. 그렇게 끌려온 이들은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다. 심지어 수용소는 벽돌 단위로 말끔하게 해체되고 은폐되었다. 학살을 집행하던 이들의 고발이 없었다면 - 이런 이들 역시도 대부분은 은폐를 마친 후 살해당했지만, 극소수의 탈출자들이 있었다 - 이런 곳이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심지어 극소수의 탈출자조차도 없었던 수용소는 현재로선 발견할 방법이 없다. 우연히 개발을 위해 땅을 파다 유골을 발견하는 게 아닌 이상은. 


   . 그렇다보니 서방의 수용소나 아우슈비츠의 존재만을 알았던 이들은 600만명이 학살되었다는 주장은 과장되었다고 얘기하곤 했다. 심지어 반유대주의자 뿐만 아니라, 노암 촘스키 같은 지식인이자 같은 유대인조차 왜 홀로코스트 희생자는 시간이 가면 갈수록 증식하는 거냐고, 나중엔 천만명도 되겠다고 비꼬기도 했다. 그러나 절멸수용소의 존재가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중부와 동부유럽에서 벌어졌던 대학살은 우리가 알고 있던 것보다 훨씬 대규모였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있다. 촘스키는 비꼬기 위해 한 말이지만, 자료가 계속 밝혀진다면 정말 희생자의 수가 천만명이 될지도 모른다. 





   스탈린의 정치적 재능 중 하나는 외세의 위협을 국내 정책 실패의 전적인 원인인 것처럼 제시하고, 자기 자신은 어느 것에도 책임이 없는 듯 행동하는 것이었다. 덕분에 그는 정책 실패에 따른 비난을 받지 않았고, 자신이 선택한 내부의 적을 외세의 앞잡이로 규정할 수 있었다. 1930년에 집단화에 따른 문제가 드러나기 시작했을 때, 그는 이미 트로츠키 지지자와 여러 외세 사이에 국제적 음모가 있다고 주장했다. 스탈린은 "자본주의자들의 포위가 사라지지 않는 한 우리 안에 협잡꾼, 간첩, 파괴 공작원과 살인자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소련의 정책과 관련된 모든 문제는 역사의 정당한 흐름을 느리게 하려는 반동 국가들의 책임이었다. 

                                                                                                    - p. 137. 스탈린, 계급에 대해 테러를 벌이다




   . 더 처참한 건, 이런 참극은 독일 한쪽에서만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직 2차대전이 벌어지기 이전인 1930년대 초반, 스탈린은 우크라이나에 집단농장제를 도입했다. 개인의 땅은 몰수되었고 소련 지도부는 추수가 이뤄지기 전에 자신들이 임의로 정한 징발량을 하달했다. 추수가 완료된 후 징발량을 채우지 못할 것이 명확해지자 스탈린은 농민들이 먹을 곡물을 징발하고, 그것으로도 모자라자 심지어 그 다음 해에 쓸 종자를 징발해갔다. 종자가 징발되지 당장 그 해 가을과 그 다음 해 농사에 뿌릴 곡식이 없었다. 대기근이 벌어지는 건 너무나 당연했다. 심지어 굶어죽을 위기에 처한 우크라이나 농민들이 당 지도부와 스탈린에게 굶어죽지 않을 최소한의 지원과 국제 구호, 다음 해 뿌릴 종자를 요청했을 때 스탈린의 대답은 명쾌했다. 공산당과 스탈린 체제 하에서 '굶주림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 체제 유지를 위해, 곡물 수출을 통한 체제 선전을 통해, 무엇보다 '자신은 틀리지 않는다'는 걸 입증하기 위해 스탈린은 우크라이나의 기아를 부인했다. 당장 대기근으로 사람들이 굶어죽어나가고 있음에도, 굶주림 같은 건 없다고 주장했으며, 우크라이나 농민들이 실제로는 얼마든지 버틸 수 있음에도 공산주의 체제에 저항하기 위해 "징징거리는 것"이라고 불만을 토로했다. 없는 음모를 분쇄하기 위해 당원과 지지자들을 우크라이나에 보내 농민들의 집을 수색해 마지막 음식까지 압수하고 그들에게 폭력을 자행했다. 그렇다고 없는 곡식이 생겨날 리 없었고, 결국 공산당이 세운 목표량의 1/3밖에 달성할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그러자 스탈린은 그 다음으로 기근은 스탈린 체제에 반대하는 이들이 저지르는 음모이자 테러라고 이야기했다. 그는 우크라이나 농민들이 공산주의에 반대하려는 악의에 가득차 가족들과 자기 자신까지 굶어죽임으로써 그 목적을 달성하려고 하는 것이라고 강변하기까지 했다. 


   . 그럼에도 이 사실을 안 지식인들과 언론인들은 눈을 감았다. 소련 내부의 인사들이야 후환이 두려워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소련 외부에서 온 인사들은 설령 수백만의 사람들이 기근으로 죽어나갈지언정, 이 사실이 알려져 공산주의 체제가 비판받고 흔들리기보다는 침묵과 은폐를 통해 공산주의 체제가 더 굳건해지길 바랐다. 수백만의 사람이 굶어 죽어서 '고귀한' 이상이 실현될 수 있다면, 이를 돕는 게 자신들의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당이 주범이 되고 이들이 공범이 되어 대기근을 은폐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자, 스탈린은 더욱 자신감을 가지고 '철과 피'를 흩뿌리기 시작했다. 겨우 살아남은 농민들 대부분을 부농으로 몰아 시베리아로 보내거나 처형했다. 곧이어 소련 내 소수민족들이 숙청의 타겟이 되었다. 독일이 2차대전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그리고 소련을 침공해 들어가지 않았다면 소련의 숙청과 학살은 계속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이 지역에서의 숙청과 학살이 끝나지는 않는다. 여기서부터 앞에서 얘기한 히틀러와 나치에 의한 절멸수용소와 대학살의 이야기가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당시 소련에 있으면서 그 기근 사태를 목격한 외국의 공산주의자들은 그것을 국가적 비극이 아니라 인도주의로 나아가기 위한 발걸음이라고 애써 생각했다. 작가 아서 케스틀러는 당시 이 기근 사태가 "일하기보다 조르기를 택한 민중의 적들 때문"에 일어났다고 믿어버렸다. 하리코프에서 그와 한 방을 썼던 물리학자 알렉산더 바이스베르크는 수백만의 농민이 죽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는 소련 체제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았다. 케스틀러는 순진하게도 소련 언론이 "우크라이나인들은 먹을 게 없고 파리떼처럼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보도하지 않는다고 바이스베르크에게 불평했다. 그와 바이스베르크는 사실 알고 있었다. 그 땅을 직접 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알 수 있었을 진실을. 

   그러나 그 기근에 대해 곧이곧대로 쓴다면, 그들의 신념은 산산조각 날 것이었다. 두 사람 다 소련 농촌의 붕괴가 더 큰 흐름에서 인류의 발전으로 이어질 거라고 믿었다. 우크라이나 농민들의 죽음은 더 높은 문명으로 나아가기 위한 희생이었다. 케스틀러는 1933년에 소련을 떠났다. 그 때 바이스베르크는 기차역에서 그를 전송했으며, 그의 마지막 인사는 이랬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소련의 깃발을 높이 드세나!" 

                                                                                                     - p. 110. 스탈린, 소련을 굶주림에 빠뜨리다





   . 무려 본문만 700페이지가 넘는 이 책의 서두 부분에서, 저자는 책의 내용을 깔끔하게 정리한다. "20세기 중반 유럽 대륙의 중앙부에서, 나치 독일과 소비에트 러시아는 약 1,400만 명의 사람을 살육했다. 그 희생자들이 쓰러져간 땅, 블러드랜드는 폴란드 중부에서 러시아 서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발트 연안국에 이른다. (중략) 1,400만 명의 희생자 가운데 전사한 병사는 한 사람도 없었다. 대부분은 여성, 어린이, 노인이었다. 아무도 무장하지 않은 채였고, 대개 모든 재산을, 몸에 걸칠 것조차 빼앗긴 상태에서 숨을 거뒀다." 이게 이 책의 내용이다. 이후의 모든 페이지는 이에 대한 사례 - 기아와 질병과 학살과 숙청이라는 죽음의 이야기 - 로 빼곡히 채워져 있다. 그 피의 땅에서,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더 이상 아무 도덕적인 의미를 가질 수 없었다. 오직 의미가 있는 것은 스탈린과 히틀러의 정치적 이상, 이를 실현시키기 위한 계획, 그리고 이를 수용하게 하기 위한 '합리화' 뿐이었다. 

   . 그렇다. 이를 합리화하지 못한다면, 이를 실현시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히틀러와 스탈린은 악의 화신이었고 그 둘은 미쳤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히틀러와 스탈린이 1,400만 명을 직접 죽일 수는 없다. 누군가가 절멸수용소에서 끌려온 이들을 가스실에 밀어넣고 독가스를 뿌리거나 도망치거나 반항하는 이들의 머리에 총구를 대고 총을 쏴야했고, 또 다른 누군가는 굶어죽어가는 농민들에게서 마지막 곡식을 빼앗아 굶겨 죽이고 남은 이들을 부농으로 몰아 시베리아로 보내거나 총살해야 했다. 심지어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어떤 강압이나 위협도 받지 않는 외국인들조차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는 상황에서 스탈린에게 동조하며 굶어죽어간 이들에 대해 말하기를 거부했다. 히틀러와 스탈린에게는 그런 이들이 있었다. 히틀러와 스탈린에게 기꺼이 동조하며, 그것을 '윤리적'으로 여기는 이들이. 그것도 매우 많이. 





   헤르만 괴링은 자신의 양심이 아돌프 히틀러라는 이름을 가졌다고 말했다. 히틀러를 지도자로 받아들인 독일인에게, 믿음이란 매우 소중했다. 그들의 믿음의 대상은 그렇게 잘못 뽑기도 어려운 존재였지만, 그들의 믿음의 힘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다. 악은 선에 의존한다는 간디의 말이 있다. 모여서 악을 행하는 사람들은 서로에게 헌신적이며 그 일이 옳다고 믿어야 한다는 뜻이다. 헌신과 믿음이 있다고 당시의 독일인들을 선량하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그들도 인간임을 알려줄 근거는 된다. 다른 모든 사람처럼, 그들은 윤리적인 사고를 했다. 비록 무시무시한 착오를 저질렀지만 말이다. 

                                                                                                                           - p. 704. 인간성에 대한 질문 


   소련과 나치 독일 모두에서, 유토피아는 비전으로 제시되고, 현실과 타협되고, 대량학살로 실행되었다. (중략) 심지어 실패가 명확해졌을 때조차 멈춰지지 않았다. 사람들의 시체는 정책의 견실함에 대한 증거물로 제시되었다. 따라서 히틀러와 스탈린은 둘 다 특정 형태의 폭군 정치를 했다. 그들은 최악의 상황을 연출하고, 자신들의 선택을 두고 적들에게 잘못을 뒤집어 씌우며, 수백만 명의 목숨을 빼앗고는 자신들의 정책이 필요하다고, 또는 바람직하다고 입증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했다. 두 사람 다 유토피아를 뒤바꾼 형태를 제시했다. 다시 말해서, 원래의 유토피아가 실현 불가능하다고 판명되었을 때, 대량학살 정책을 '실질적인 승리'로 대신 내세웠다. 

   집단화도 '마지막 해결책'도, 무오류의 존재라고 내세워진 지도자를 지키기 위해 막대한 사람의 희생을 요구한 것이라는 점에서 똑같았다. 집단화가 우크라이나에서 저항과 굶주림을 불러오자, 스탈린은 부농, 우크라이나인, 폴란드인들에게 그 책임을 물었다. 독일군이 모스크바에서 차단되고, 미군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자, 히틀러는 유대인에게 책임을 물었다. 

                                                                                                                            - p. 683. 인간성에 관한 질문




   . 심지어 그들 중 상당수는 위협에 의해, 강압적으로, 무기력하거나 기계적으로 그러한 일을 저지른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 지옥이 그런 그들의 이상을(저자가 '유토피아'로 표현하는) 실현하기 위한 필연적인 과정이며, 자신들이 하는 일은 일종의 '헌신'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번민하고 가책을 느낄 수 있다. 아무리 무뎌졌더라도, 1,400만을 죽이는 과정에서 그들의 마음을 흔들 수 있는 일은 얼마든지 발생한다. 끌려가는 어린아이의 얼굴일 수도 있고, 누군가의 호소와 절규일 수도 있다. 자신이 아는 누군가와 그 가족일 수도 있다. 그들 모두가 광기에 사로잡혀서, 감정과 생각이 사라졌기 때문에, 기계가 - 더 나아가 악마가 되었기 때문에 한 치의 고통도 흔들림도 없이 그 일을 처리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이 공산주의 지상낙원이든, 나치즘의 실현이든 그들 스스로의 이상이자 희망이 되었기 때문에, 자신들을 이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비극을 떠안은 희생자이자 숭고한 이상을 위해 헌신하는 자로 생각했던 것이다. 자신에게 도덕과 꿈을 불어넣었기에 스스로의 손으로 기꺼이 지옥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 그렇기에 우리는 이 악몽같은 이야기를 읽는 과정에서 도저히 지금의 우리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지옥도에 치를 떨더라도, 그들 개개인을 인간이 아닌 악마라 여기며 책을 덮어서는 안된다.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움직이게 했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들이 생각했던 것을 남김없이 알아야 한다. 그런 노력이 없이 '그들은 악마니까, 그들은 나와 전혀 다른 이들이니까 괜찮다'고 한다면, 언제든 우리 역시 그들을 그렇게 움직이게 한 뭔가에 사로잡혀 그들처럼 행동하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바로 그게 피에 젖은 땅에서 벌어졌던 지옥이 끝난 지 채 20년도 지나지 않아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난 대약진 운동과 문화대혁명이고, 지난 세기 후반기 내내 제3세계에서 일어난 학살이며, 지금도 아프가니스탄에서 일어나고 있는 - 그리고 지금도 수없이 형태를 바꿔가며 우리 가운데 스물스물 일어나는 선민의식과, 이상에 대한 신봉과, 현실에 대한 외면이 아닌지.



   희생자들의 죽음을 내세우며 어떤 정책을 미화하거나 스스로와 희생자를 동일시하는 일은 쉽다. 범죄자들이 저지른 행동을 이해하는 일은 별로 매력이 없다. 그러나 도덕적으로는 더 중요하다. 어쨌든 도덕적 위험은 누군가가 희생자가 될 때보다 범죄자나 방관자가 될 때 발생하기 때문이다. 나치 학살자들은 이해 불가능한 인간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유혹적이다. 예를 들어 베네시나 예렌부르크 같은 비범한 정치인이나 지식인들이 전쟁 중에 그런 유혹에 빠졌다. 그 체코 대통령과 유대계 소련 작가는 그런 식으로 독일인들에 대한 복수를 정당화했다. 다른 인간을 인간 이하의 존재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 자신이 인간 이하다. 그러나 인간에게서 인간성을 부인해버리면 윤리란 불가능해진다. 

   그런 유혹에 굴복해 다른 사람들을 인간이 아니라고 규정하는 일은 나치의 입장으로 한 발짝 다가가는 것이다. 물러서는 일이 아니고 말이다. 다른 사람들을 이해 불가능하다고 보는 것은 이해를 포기하는 일, 다시 말해 역사를 버리는 일이다. 

                                                                                                                            - p. 704. 인간성에 대한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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