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생애 - 시오노 나나미 ●●●●●●◐○○○
이 시대에는,
속어의 질적 향상조차 성직 세계에 대한 도전이라고 여겨졌던 것이다.
그러나 스물여덟 살이 된 황제는 루체라로 이주시킨 이들 사라센인에게 완벽한 신앙의 자유를 인정한다. 루체라에는 수많은 모스크가 세워졌고 그 모스크의 첨탑에서 하루에 다섯 번, 기도 시간을 알리는 아잔이 울려 퍼졌다. 그리스도교 세계의 속세 최고위자의 왕궁이 있는 마을에서 불과 18킬로미터 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교황령 안의 최대 수도원인 몬테카시노 수도원에서는 백 킬로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 상권, p. 142. 사라센 문제
. 전작 '그리스인 이야기'의 맺음말에 시오노 나나미 여사께서 이제 '이야기 시리즈'는 이걸로 끝이라고 하셔서 당연히 그 뒤는 없을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다른 책들을 찾아보던 중 이 책이 나온 걸 알게 되어 부랴부랴 구매했다. 맨 첫 장의 소개를 보니 일본에서는 2013년에 출간되었음에도 무려 8년이 지난 후에야 번역이 된 것으로 나와 있었는데, 다른 작가도 아니고 시오노 나나미쯤 되는 작가의 저작이 8년이나 지나서, 그 때문에 출간 순서가 바뀔 정도로 늦게 나온 것에는 뭔가 어른의 사정이 있는 게 아닌가 싶다. 거기다 한길사가 아닌 서울문화사라니. 내게 서울문화사는 은하영웅전설 같은 판타지 소설이나 TV에 나오는 이들의 책을 출간하는 출판사였는데.
. 어쨌든 간만의 신작이고, 어느 출판사에서 나왔던간에 여사님의 책이니 일단 집어든다. 신성로마제국과 시칠리아의 양대 군주인 하인리히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세 살에 아버지의 죽음을 겪고, 원래 영토의 일부에 불과한 시칠리아의 왕으로만 인정받은 프리드리히. 하지만 어린 그가 광대한 독일의 왕이 아니라 시칠리아와 남부 이탈리아의 왕으로만 인정받은 것은 오히려 행운으로 작용했다. 알프스 이북의 독일에 비한다면 시칠리아와 남부 이탈리아는 '문명화된 땅'이었고, 더욱이 시칠리아는 유럽과 아랍의 문화가 뒤섞인 곳이었기 때문이다.
. 비록 로마 멸망 이후 아랍인들이 점령한 시칠리아를 중세 중기에 들어 노르만인(그 바이킹이 맞다)들이 탈환하긴 했지만, 무력은 일당백이었어도 숫자로는 극소수였기에 노르만인들은 아랍인들을 자신들의 백성이자 구성원으로 받아들이며 그들의 종교와 문화도 허용했다. 그리고 그때까지만 해도 이슬람 세력의 위협에 떨고 있던 로마 교황은 시칠리아가 이슬람의 손에서 벗어났고 이로 인해 서지중해가 안전해졌다는 기쁜 소식에 시칠리아의 내정에는 거의 개입하지 않았다. 자연히 노르만 왕조는 교황의 수하라기보다는 동맹에 가까운 성격을 가지게 되었고, 그로부터 200년이 지나 프리드리히가 태어나 성장했을 때는 기독교도와 이슬람교도의 공생이 당연한 것이 되어 있었다. 그것이 그의 행운이었다. 반대로 그의 불운은, 서지중해에서 이슬람 세력의 위협이 줄어든 지 200년이 지났고, 교황과 로마는 그 평화를 기쁘고 고마운 것에서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 그래서 자연히 프리드리히 2세의 생애는 이슬람 세력과의 공생, 그로 인한 교황과의 충돌로 점철된다. 십자군에 참전했으면서도 예루살렘이 기독교도들의 성지임과 동시에 이슬람 교도들의 성지임을 인정하고 그들과 공존함으로써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고 예루살렘을 수복했지만, 교황과는 몇십 년에 걸쳐 파문과 침략을 주고 받으며 대립한다. 얼핏 보기엔 아이러니하게 느껴지지만, 교황은 영과 종교의 영역을, 황제는 육과 정치의 영역을 맡아야 한다는 게 프리드리히의 일관된 입장이었다는 걸 생각해보면 교황과의 충돌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는 기독교도였으면서도 이슬람 교도와 종교를 배제한 정치적인 거래를 할 수 있었지만, 종교와 정치 양 쪽에 모두 영향력을 발휘하려 했던 교황과는 대립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이렇게 종교와 정치의 영역을 구분하고 종교에서 벗어난 정치를 폈기에 프리드리히 2세는 최초의 르네상스인으로 칭해진다. 비록 최후의 순간 그에게 '포르투나(행운)'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 자신은 군사적인 승리를 앞두고 병사했고 지도자를 잃은 그의 왕조는 몰락하고 말았지만 - 이 역시도 르네상스인에게 어울리는 결말일 것이다 - 그럼에도 그가 만든 흐름 그 자체는 바뀌지 않았다. 반 세기 후의 필리프 4세는 아예 국왕이 정치와 종교 모두를 장악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교황을 아비뇽에 유폐시켰다. 그리고 유폐로 인해 교황권이 바닥에 떨어지던 그 시기에, 이탈리아에서는 르네상스의 막이 오른다.
고대에는 간결하고 명쾌했던 라틴어가 중세에 들어와서는 간결하지도 않고 명쾌하지도 않게 바뀐다. 일반 신자는 알 수 없게 된 것이다. 라틴어를 이해할 수 없는 그들에게는 벽화로 이해하는 방법이 있다. 그림에 의존하면 문장으로 전할 일이 줄어들기 때문에 문장력도 떨어진다. 그런 상황이 성직자에게 불편할 건 없었다. 성직자들은 사람이 이해하기보다는 믿어주는 게 더 편하니까.
이런 경향은 성직보다 '배움'이 부족했던 세속에도 퍼진다. 그 결과 간결하지도 명쾌하지도 않은 문장이야말로 고급 문장으로 생각하는 세월이 이어졌다. 이 시대에는, 속어의 질적 향상조차 성직 세계에 대한 도전이라고 여겨졌던 것이다.
- 하권, p. 182. 동시대 '미디어'의 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