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성이라는 거짓말 - 앤드류 포터(마티) ●●●●●●●●○○
어떤 공동체가 살아남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 구성원을 무지하고 가난하고
고립되게 만들고 선거권도 주지 않는 것이라면,
그런 공동체는 우리가 존중하거나 노력을 들일 가치가 없다.
여기엔 문제가 하나 있다. 진정성에 대한 욕구야말로 정치가 조심스럽게 대본에 따라 움직이게 된 원인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면 뒤에 숨은 진짜 인간을 보고 싶다고 말한다. 그러나 기억하는가. 닉슨이 TV에서 땀을 뻘뻘 흘리자 사람들은 그에게 혐오감을 드러냈다. 우리는 즉흥성, 진솔한 감정을 원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돌아보라. 힐러리 클린턴이 선거운동 중에 눈물을 흘렸을 때, 그리고 애인과 아르헨티나에서 일주일 여행하고 돌아온 노스캐롤라이나 주지사 마크 샌퍼드가 울먹이며 두서없는 연설을 했을 때 얼마나 조롱당했는지. 우리는 내 신념과 가치관에 맞는 정당과 정책을 선택할 수 있길 바란다고 말하지만, 유권자가 쉽게 고를 수 있을 만한 정치 '상표'들이 선택지로 제시되면 전부 가짜라고 거부해버린다. 간단히 말해 진정성에 대한 욕구야말로 오늘날 정치의 주요 문제점들을 초래한 원인이다.
정치 풍자 프로그램 진행자 코미디언 스티븐 콜베어는 미국 정치담론의 속성을 '진실감'이라는 말로 묘사하면서 자신이 지어낸 그 신조어를 이렇게 정의했다. "내 말은 진실이고 남의 말은 진실일 수 없다. 진실감은 내가 진실이라고 '느끼는 것'인 동시에 '내가' 진실이라고 느끼는 것이다. 거기에는 감정적 속성 뿐 아니라 이기적 속성이 존재한다."
콜베어는 정곡을 찔렀다. 사안의 사실관계와 진실이 중요한 게 아니라, 진실처럼 느껴지는 감정과 사적인 관점에 방점이 찍힌다. 그게 이른바 진정성이다.
- p. 204. 진정성 있는 제게 한 표를
. 무라카미 하루키가 90년대에 미국생활을 하면서 쓴 에세이 '슬픈 외국어'에서 출판계의 교조주의에 대해서 언급하는 부분이 있는데, 그 뒷얘기에서 하루키는 '미국이라는 나라에서는 '개념'이라는 것이 일단 확립되면, 그것이 점점 커지고 강해져서 이상주의적(and/or), 배타적으로 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흔히 "자연이 예술을 모방한다"고 하지만, 여기서는 "인간이 개념을 모방하는" 경우가 많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그리고 30여년이 지난 지금의 우리 사회를 보면, 정치나 종교 뿐만 아니라 사회와 문화 전 분야에서 같은 개념을 주장하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배타적인 집단을 형성하는 게 일상화되어있다. 흔히 하는 이야기로 미국에서 일어난 일은 5년 후에 일본에서 일어나고, 또 일본에서 일어난 일은 5년 후에 한국에서 일어난다고 하는 얘기가 또 한 번 맞아 떨어진 셈이다.
. 이 책, '진정성이라는 거짓말'을 읽으면서 하루키의 저 말이 문득 떠올랐다. '이렇게 팍팍한 현실에 얽매여 사는 건 진정한 내가 아니야'라는 소설 주인공이 할법한 말이 점점 확장되어서, 외적으로는 소수 생산자의 유기농 제품이나 인디밴드 등 남들과 차별화되는 소비로부터 만족감을 추구하는데서 그치지 않고 반대로 대기업의 상품이나 대형기획사에 소속된 가수들을 폄하한다든가, 극단적으로는 평범한 환경의 중학생이 학교를 그만두고 IS를 가입한다는가 하는 일로 연결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런 얘기는 종종 '현대'에 대한 부정으로 이어진다. 자본주의와 기술발전, 서구식의 진보는 결국 허울 좋은 주장일 뿐이며 그런 발전의 그늘에서 개개인은 진정한 삶의 의미를 잊어버린 채 살고 있는 게 아니냐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제는 너무 확고하고 당연해져 오히려 식상하게 들리는 이런 주장을 앤드류 포터는 정면으로 반박한다.
지난 250년간 근대인을 사로잡았던 진정성 문제는 허구다. 그것이 약속한 바는 이제껏 구현된 적 없고, 앞으로도 그러지 못할 것이다. 우리의 노력이 부족했거나 방식이 잘못돼서가 아니다. 자꾸 거짓된 것을 조달하는 자본가나 정치가, 혹은 다른 자들의 어떤 방해 탓도 아니다. 우리가 옛날엔 진정한 삶 - 진정한 공동체 속에 살면서 진정한 음악을 먹고 진정한 음식을 먹고 진정한 문화에 참여하는 삶을 살다가 지금은 그 진정성을 잃었다는 식의 동화 같은 전제 자체를 나는 부인한다.
- p. 21. 진정성이라는 용어
. 저자는 결국 '나만의 어떤 것을 한다'는 진정성의 추구는 내가 살고 있는 현재가 과거보다 뭔가 특별하다고 믿는 '몰역사성 자기도취증' 때문일 뿐이라고 단언하면서, 이는 착각에서 끝나지 않고 결국에는 남들과 다른 삶을 살기 위한 '또 다른 경쟁'으로 이어진다고 역설한다. 남들과 같은 삶을 거부하겠다는 것이 신분제가 없어진 사회에서 남들과 차별된 '지위'를 획득하여 이를 과시하는 모습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저자는 대중문화의 전개과정을 통해 이를 설명한다. 과거에는 매체의 한계로 인해 주류와 비주류가 철저하게 나눠져 있었으나, 인터넷의 발전과 이를 이용한 다양한 방송매체의 출현으로 더 이상 주류와 비주류를 나누는 것은 의미가 없어졌다. 이름 없는 인디밴드의 음악 역시도 어떤 사이트에서든 똑같이 내려받을 수 있고, 대중매체는 끊임없이 대중에게 비주류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 이런 예시는 우리에게도 수없이 많다. 무한도전이 혁오밴드를 소개하자 혁오는 단숨에 웬만한 대형기획사 그룹은 따라잡지도 못하는 음원깡패가 되었고, 비주류 장르였던 힙합이나 트로트는 쇼미더머니와 미스-미스터트롯 이후 음원 최상위권을 도배하는 주류 중의 주류 장르가 되었다. 덕분에 '나만 알던 가수였는데 유명해져서 싫다'는 폐쇄적인 팬들을 비웃는 개그 코드까지 생겨날 정도다. 하지만 앤드류 포터의 말에 주장에 의하면 이는 너무나도 당연한 현상이다. 그들에겐 비주류 문화를 향유한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지위'였고 주류에 소개되는 것으로 그들만의 지위는 박탈당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다시 지위를 획득하기 위해 끊임없이 다른 비주류를 찾아나서지만, 이 역시도 언제 다시 알려질지(!!!) 모르는 사상누각일 뿐이다.
. 대중문화 뿐 아니라, '남들이 모르는', '남들과 다른'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있는 대부분의 생활양식과 소비는 이러한 함정을 안고 있다. 거기에 더 나아가서, 이런 심리를 이용해서 '과시용' 소비를 부추기는 건 더 이상 언급할 거리조차 못된다. 한 때 버스정류장마다 붙어 있던 '나를 찾아 떠나라'는 메시지는, 대부분 초대형 항공사에서 벌였던 판촉전략이 아니었는가.
'쿨'은 또 하나의 소비주의 위계질서로 정체가 드러나면서 시들해졌다. 주류문화에 너무도 깊숙이, 너무도 의식적으로 진입해서 거의 당혹스러울 지경이었다. 경제 성장과 기술 발전의 결합으로 가장 '대안적'인 소비재조차 누구든 원하는 사람에게 즉시 제공될 수 있게 되자, 저항적 소비주의도 결국 베블렌적 의미의 '낭비'로 전락했다. 콜드플레이의 신작 뮤직비디오에서 크리스 마틴이 입고 나오는 나이스 콜렉티브 상표의 재킷이 맘에 들어? 이베이에서 똑같은 걸 구매해 이튿날 아침이면 배달받을 수 있다. 이번 주말에 교외의 작은 클럽에서 연주하는 끝내주는 새 밴드를 아는가? 플레이버필이나 스릴리스트 같은 웹얼러트 서비스 덕택에 누구나 금방 알 수 있다. 저항적 소비주의는 인터넷 접근이 가능하고 먹고 살만한 사람은 전원 참가하는 게임이 되면서 결국 사망했다.
- p. 147. 과시용 진정성
. 그렇기에 앤드류 포터는 마치 진정성의 적인 양 이야기되는 근대와 발전, 진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이야기한다. 인구의 폭발적인 증가? 제대로 치료도 받지 않고 손쓸 방법 없이 죽어가던 어린 아기들이 생명을 얻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량생산? 전 세계의 굶주림이 일상화되던 시대가 더 이상 오지 않는다는 선언이다. 역사가 아닌 같은 시대 내에서 비교하더라도, 우리는 더 이상 '종교'라는 허울로 온몸을 꽁꽁 두른 의상을 강요받는 일도, '풍습'이라는 허울로 열 살도 되지 않았는데 결혼을 강제받을 일도 없다. 아직도 문화적 특수성을 주장하며 우리도 한 때 강요받았던 '우덜식 민주주의'나 그보다 더한 것들을 버젓이 내세우는 국가가 얼마나 많은가.
. 그래서 저자는 배짱있게, 언론과 지식인들이 찬양하는 부탄과 쿠바 사람들에 대해 '전통과 이념에 붙잡힌 인질'이라고 단언하면서, "공동체가 살아남기 위한 방법이 구성원을 무지하고 가난하고 고립되게 만들고 선거권도 주지 않는 것이라면, 그런 공동체는 우리가 존중하거나 노력을 들일 가치가 없다."고 단언한다. 근대사회와 발전에 질렸다는 이들의 변덕스러운 말 때문에, 정작 아직 근대와 발전을 경험해 본 적도 없는 이들이 선택권도 없이 근대와 발전에서 소외되어선 안된다는 것이다. 실체가 없는 환상에 얽매여서 역사를 뒤로 돌리지 말고 지금까지 인류가 이뤄놓은 성과를 모두가 향유할 수 있어야 한다고, 그렇게 저자는 결론을 내린다.
건강한 문화는 건강한 사람과 같다. 끊임없이 변하고 자라고 진화하지만 그 와중에도 어떤 일관성을 잃지 않는다. 교역이 초래하는 변화의 바람이 아무리 심해도 흔들리지 않는 안정적인 중심 같은 것이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양파 비유를 좀 더 확대시켜, 한 문화를 한 사회의 면역체계와 유사한 것으로 상상해볼 수 있다. 외부의 이물질에 노출될수록 튼튼해진다는 얘기다. (중략) 세상으로부터 고립된 문화는 도자기 인형과 같아서 깨지기 쉽다. 그래서 특정 문화를 보호하고 보존할 때 원주민이 관광객 보라고 시전하는 '진정한 고유성'은 우리가 신경 쓸 대상이 못 된다. 우리가 관심을 쏟아야 할 더 적절한 대상은, 더 유연하고, 더 튼튼하고, 세상과 더 긴밀히 관계 맺고 있는 것, 다시 말해 우리가 '세계관' 혹은 '에토스'라고 부르는 것이다.
- p. 239. 문화는 관광객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