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티노플 함락 - 시오노 나나미(한길사) ●●●●●●●○○○
콘스탄티노플은 멸망한 날짜가 뚜렷할 뿐 아니라
탄생한 날도 뚜렷하다는 점에서 분명히 보기 드문 도시이다.
젊은이는 말했다.
"그대의 재물은 내게 필요없소. 아니, 그대가 지금 내게 주려 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재물을 그대에게 내릴 수도 있소. 내가 그대에게서 받고 싶은 것은 단 하나.
저 도시를 주시오."
- p. 83. 현장의 증인들
. 1453년 5월 29일. 동로마 제국은 멸망했다. 15만의 전투병력과 그에 버금가는 비전투 병력까지 총 30만의 병력이 콘스탄티노플의 3중 성벽 앞에 진을 친 때로부터는 50일, 본격적인 공격에 돌입한 뒤로부터는 30일.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는 황제의 망토를 벗어던지고 오스만 군에게 돌격하여 장렬하게 전사했고, 재상인 노타라스와 동로마 제국을 도와 끝까지 싸웠던 베네치아 대사 미노토는 포로가 된 다른 유력자들과 처형당했다. 술탄 메메드 2세는 허락된 사흘간의 약탈 기간이 끝난 후 그때까지 남아있던 시민들에 대한 보호를 선언했지만, 그 때는 이미 함락 당시 도시에 남아있던 4만 명 중 90% 가까이가 살해당하거나 노예로 팔려가거나 간신히 도망친 이후였다. 처참하고 장렬한 최후였다.
. 콘스탄티노플과 동로마의 멸망은 단일 사건으로 끝나지 않았다. 물론 그전에도 동로마 제국은 4차 십자군에 의해 한 차례 멸망당한 적이 있었고, 15세기 중반에는 대부분의 영토를 잃고 콘스탄티노플 주변만 겨우 남아있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투르크는 1453년 이전까지는 3중 성벽을 넘지 못했고,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통로 한복판에 콘스탄티노플이 버티고 있다는 건 투르크의 확장을 일정 부분 저지하는 걸림돌이 되어주었다. 그 콘스탄티노플이 이제 제국이 확장하는 걸 막는 걸림돌에서 제국이 뻗어나가는 구심점이 된 것이다. 그로부터 단 사반세기 만에, 투르크는 흑해 연안과 그리스와 발칸 지방을 정복했고, 동지중해의 여러 섬을 손아귀에 넣었으며, 페르시아를 격파했다. 그 후 무려 200여년 간, 유럽은 투르크의 진격에 전전긍긍해야 했다. 유럽이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할 수 있었던 것은 17세기 후반이 되어서였다.
. 시오노 나나미 여사는 이렇게 역사의 전환점이 된 콘스탄티노플 함락의 과정을 세세하게 서술해간다. 약간의 창작이 섞여있긴 하지만, 그건 허구라기보다는 당시의 정세를 설명하거나 조금 더 박진감있게 당시 상황을 묘사하기 위한 눈과 입을 빌려오는 것에 가깝다. 비록 인용한 사료에 문제가 있는 경우(베네치아의 사료를 참고하는 바람에 제노바인인 주스티니아니가 마지막 순간 부상으로 전선을 떠나서 콘스탄티노플이 무너진 것처럼 서술되어 있다거나)는 있을지언정 책 자체는 여사의 또 다른 시리즈인 '색채로망 3부작'과는 달리 역사 그 자체를 다룬다. 그래서 역사의 이야기 시리즈에 함께 이름을 올리기에 충분하다.
. 50일 간의 치열한 공방, 마지막 전투의 마지막 순간을 버티지 못하고 무너진 콘스탄티노플의 이야기는 처절하고 읽는 이로 하여금 우연이나 해프닝으로 바뀌는 게 아니기에 콘스탄티노플의 멸망은 주스티니아니의 부상 때문도 아니고 열린 쪽문으로 들어온 투르크 군이 뜬금없이 세운 깃발 때문도 아니다. 이미 예니체리의 마지막 총공세로 여러 곳에서 깃발이 올라가 있었기에 결국 투르크 군은 성벽을 넘었을 것이다. 아니, 설령 이번 공격을 끝까지 방어해냈다 한들 투르크는 이미 대포라는 신병기와 금각만 봉쇄라는 전술을 통해 전투의 패러다임 자체를 바꿔놓았고, 쇠락한 동로마의 국력은 다시는 올라올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언제나 찰나에 집중하고 순간을 아쉬워한다. 그게 더 극적이고, 그게 더 가슴을 뛰게 하니까. 그리고 여사의 글은, 그런 목적을 위해서라면 언제나 가장 적절한 수단이 되어준다.
대포라는 신병기의 출현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강철 갑주로 무장하고 전투의 전문가라는 자긍심으로 살아가던 중세 기사계급을 완벽히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리기도 했다. 대포 조작은 가르치기만 하면 누구든지 할 수 있다. 말을 모는 능력도 창을 내리꽂는 능력도, 다시 말해 오랜 수련이나 타고난 특권 없이는 갖출 수 없는 모든 능력이 이제 무용지물이 된 것이다. 중세 전장의 꽃이었던 기사들은 대형을 짜서 수로 밀어붙이는 보병들과 대포를 다루는 포병이라는 양대 '아마추어' 집단 앞에 쇠퇴를 거듭해야 했다.
- p. 258. 에필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