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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시울 Nov 09. 2024

장렬하게 한 시대의 끝과 시작을 받아들인 이들의 이야기

로도스 섬 공방전 - 시오노 나나미(한길사)  ●●●●●●○○○○


특히 맹독을 품은 어린 뱀 한 마리가 손아귀를 빠져나갔음을 그 때는 알지 못했다.



   아마 우리 집안도 이 대국주의의 물결에는 못 버틸거야. 어디 대군주의 신하가 되어서 귀족 칭호를 받고는 허울뿐인 영지에 만족해야겠지. 옛날의 '자유로운 사내'(바로네)는 영영 죽어버리고 궁정 귀족들 틈에 이름을 내걸고 살아남게 될 테지. 

   보병 집단이 주력이 되면서 기사들의 지위도 계속 하락 일변도잖아. 대포가 등장하면서는 전투 방식도 완전히 바뀌어버렸고. 원래 바로네는 주민들을 외적에게서 지켜주고 경의를 얻었는데, 그런 기능이 모조리 군주의 몫이 되어버렸으니 더 이상 영주입네 하고 살 수는 없지.... 우리는 뭘까? 귀족의 핏줄이 아니면 입단이 안되는 성 요한 기사단의 기사? 한편으로는 영주 자격을 잃어가는 귀족? 이 둘 다겠지. 몰락하는 계급의 마지막 생존자! 우리는 결국 이런 불운을 떠안은 이들이야.

   이런 우리가 대포와 사람 수로 밀고 들어오는 강력한 투르크 군과 맞서 싸워야 된다니 정말 웃기는 짓이지. 몰락하는 계급은 언제나 새로 대두되는 계급과 전쟁을 치르고서야 완전히 사라지는 것인가. 

                                                                                                                                         - p. 140. 개전 전야.




   . 1453년, 메메드 2세의 콘스탄티노플 함락 이후 오스만 제국은 무서운 속도로 뻗어나간다. 메메드 2세는 그리스와 발칸과 흑해에 남아 있던 동로마 제국의 잔존 세력들을 척결하고 흑해를 자신들의 바다로 만들었으며, 뒤를 이은 바예지드 2세는 아나톨리아와 남은 흑해 연안을 평정했고, 셀림 1세는 페르시아를 대파하고 시리아와 이집트를 병합했으며 알제리의 해적들을 받아들여 북아프리카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자연스럽게, 그들의 뒤를 이어받은 술레이만 대제가 갈 곳은 북쪽과 서쪽이었다. 북쪽으로는 동유럽을 지나 합스부르크의 심장인 빈으로, 서쪽으로는 오스만 세력에게 포위되어 섬들만 남은 동지중해를 장악하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동지중해로 시선을 향하면, 자연스레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겨우 15km 떨어진 로도스 섬의 성 요한 기사단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게 된다. 


   . 그에 비해, 유럽 국가들은 아직 오스만에 맞서 일관된 행동을 취하지 못한 상태였다. 갓 제위에 오른 술레이만 대제가 베오그라드를 점령하며 정복의 기치를 내건 1520년대 초반, 그나마 오스만 제국과 맞설 수 있는 군사력을 가지고 있던 프랑스와 합스부르크는 이탈리아 곳곳에서 대립하기에 바빴고, 이를 중재해 오스만에 대항할 힘을 모아야 할 교황청은 레오 10세의 선종과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동지중해 끄트머리에 정신을 둘 여유가 없었다. 결국 술레이만이 로도스 섬을 점령하기 위해 일으킨 10만 오스만 군에 맞설 기독교 측의 병력은 기사 600명과 섬의 주민이 주축이 된 수천의 방어군 뿐이었다. 하지만 로도스 섬에는 당시의 하이테크라 해도 될 로도스 성벽이 있었고, 또한 로도스를 지키는 성 요한 기사단은 전투기계라 불러도 전혀 손색이 없는 이들이었다. 





   콘스탄티노플 성벽으로 대변되는 종래의 성벽이 지표면에서 높이 솟은 것이었던 데 반해 스콜라가 생각한 것은 쌓는다기보다는 판다는 쪽이 어울리는 것이었다. 지금까지는 가능한 한 아군의 위치를 높여 땅에 포진한 적을 굽어보며 공격을 퍼부을 수 있게 하는데 주안점이 두어졌으나, 스콜라의 개선안에서는 공격측과 방위측이 거의 같은 높이에서 대치하도록 한 것이다. 양자 사이에 가로놓인 호도 이전보다 훨씬 더 넓고 깊게 바뀌었다. 즉 아무리 포격을 받아도 끈질기게 땅에 착 달라붙어 있는 성을 의도한 것이다. 

                                                                                                                                         - p. 104. 개전 전야.





   . 오스만의 '양'과 기사단의 '질'이 맞붙은 6개월에 걸친 처절한 공방전. 성벽과 기사단을 상대로 오스만 군은 무려 4만 5천의 전사자와 그에 맞먹는 부상자를 낸다. 교환비로 따지면 100대 1, 아니 200대 1이라는 말도 안되는 피해였지만, 이미 '양'의 힘을 사용하는 방법을 깨달은 오스만 제국은 흔들리지 않고 병력과 물자를 충원해가며 계속 공격을 퍼부어댄다. 그와 반대로 기사단의 사상자는 500명이 좀 안되는 수준에 불과했지만, 이는 다시 말해 전력 대비 80%가 손실을 입은 상태라는 걸 의미했다. 더 이상의 전투는 불가능했다. 술레이만은 기사들에게 명예로운 퇴거를 약속함으로써 퇴로를 열어주고, 기사단은 술레이만이 내민 손을 쳐내지 않고 관용을 받아들인다. 로도스 섬 공방전은 그렇게 끝이 난다.





   이렇게 해서 광대한 투르크 제국의 정원에 웅크리고 있던 작고 사나운 '그리스도의 뱀'은 둥지째 제거되었다.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서야 얻어낸 성과이지만 투르크인에게는 충분히 가치 있는 성과였다. 이제는 콘스탄티노플을 출항한 배가 머나먼 시리아와 이집트로 갈 때나, 순례자들이 메카로 갈 때나 도중에 더 이상 습격받는 일은 없을 것이다. 

   젊은 승리자는 그러나 프랑스 귀족을 능가하는 기사도 정신을 발휘한 자신의 조치로, '뱀들' 중에서도 특히 맹독을 품은 어린 뱀 한 마리가 손아귀를 빠져나갔음을 그 때는 알지 못했다. 

                                                                                                                                   - p. 229. 1522년 겨울.





   . 로도스 섬 공방전은 비슷한 시기에 벌어진 라벤나 회전과 함께 시대의 흐름 속에 저물어가던 기사들이 마지막으로 보여준 찬란한 족적이었다. 대포와 보병을 앞세운 '양'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막대한 돈으로 소수 정예를 양성하는 기사 체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가던 시절. 그 시대의 마지막에서 로도스 섬의 기사들은 '양'의 정점인 오스만을 상대로 대활약을 펼치며 기사의 시대에 화려한 종지부를 찍는다. 비록 역사의 진행방향을 바꿀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사라져 가야만 하는 이들이 보여줄 수 있던 가장 최선의 마무리가 아니었을지.





   라 발레트는 상당히 마른 편이긴 하지만 유연한 몸매가 한눈에 사람의 주의를 끄는 미남자였다. 예리한 칼날로 깎아내린 듯한 얼굴 윤곽은 위엄이 가득한 인상과 젊음의 생기를 뚜렷이 드러내주었다. 가늘고 긴 눈에 맴도는 안광의 강렬함은 한 번 상대를 향해 박히면 좀처럼 움직일 줄 모른다. 우아한 것을 지나쳐 오만하다는 인상까지 갖게 하는 태도를 지닌 사내였다. 그 오만함은 허용 범위를 넘을락 말락하는 선에서 유지되고 있기에 그다지 불쾌감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 아니, 불쾌감은커녕 오베르뉴 지방의 명문가 출신인 이 젊은이에게 발군의 자질이 있음을 처음 보는 사람까지도 단박에 알아챌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바로 이 오만한 태도였다. 이탈리아에서는 이제 그런 사람을 찾아보기도 힘들지만, 일찍이 전 유럽이 찬탄의 눈길을 보내던 '타락하지 않는 기사'의 견본이 지금 자기 앞에 서 있음을 안토니오는 느끼고 있었다. 

                                                                                                                               - p. 28. 장미꽃 피는 옛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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