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는 밤 - 애거서 크리스티(해문), ●●●●●●○○○○
"끝없는 밤."
나는 오직 그 말 밖에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그게 무슨 뜻인지 궁금하기만 했다. '끝없는 밤'이라니? 그건 암흑을 뜻했다. 그건 내가 그곳에 있어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뜻했다. 나는 죽은 사람을 볼 수 있지만, 죽은 사람은 내가 살아 있어도 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들이 나를 볼 수 없는 까닭은 내가 그곳에 존재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엘리를 사랑했던 그 사람은 사실 그곳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선택한 '끝없는 밤' 속으로 들어가 버렸던 것이다. 나는 더욱더 고개를 떨구었다.
"'끝없는 밤'이야." 나는 다시 그 말을 되뇌었다.
- p. 323.
. 포와로나 마플 양이 등장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다른 사람이 탐정 역할을 하지도 않는다. 전체 분량의 2/3이 지나서야 겨우 범죄가 일어나는 앞선 200쪽은 젊지만 가난한 한 청년이 세상과 삶에 대해 투덜투덜거리다 갑자기 어마어마한 부자와 만나 사랑에 빠져 결혼하고, 그의 유일한 친구인 유명한 건축가가 지은 집에서 생활하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거기다 번역가의 의도인지 원래 글이 그랬던건지 문장은 덤덤하고 밋밋하다. 마치 지나가는 사람은 커녕 흔하디 흔한 풀이나 돌 하나 떨어져 있지 않은 황량한 길을 어디까지고 걸어가는 느낌이다.
. 하지만 그러다 툭, 하고 걸리는 부분들이 하나 둘 드러난다. '집시의 뜰'이라는 이름. 결혼한 아내에게 뜬금없이 저주를 퍼붓는 노파. 아내의 친구이자 비서인 그레타와의 껄끄러운 충돌. 그의 친구인 건축가가 하는 묘한 말들. 청년의 뜬금없는 고집. 그렇게 점점 툭, 하는 간격이 좁아지는구나 싶은 시점에서 사건이 발생한다. 하지만 이야기의 템포는 빨라지기는커녕 오히려 차분해지고, 청년은 평이하기까지 한 어조로 사건이 벌어지고 일어난 일들을 읊어나간다. 그렇게 누구 하나 사건을 추리하지도 않은 채 또 60쪽이 지나간 시점에서,
. 이제는 책의 분량이나 1/10이나 남았을까 한 시점에서, 드디어 진상이 말 그대로 '터져나온다.'
. 평이한 말투가 계속 이어지는 가운데 청년의 이야기는 그리움과 슬픔과 상실에서부터 아무렇지 않게 음모와 성공과 욕망의 이야기로 바뀐다. 마치 영화 '추격자'에서 잡혀 온 하정우가 피식피식 웃으며 "안팔았어요. 죽였어요." 하는 것 같은 장면에 멍해지는 것도 잠시, 청년은 마지막의 마지막에 이르러 이런 인물이었었나 싶을 정도로 격렬하게 감정을 분출한다. 그리고 그 끝에, 파국이 온다.
. 책을 읽었다는 느낌보다는 음악을 들은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읽는 내내 옮겨놓은 구절 하나 없어서 마지막의 마지막에 가서야 겨우 한 부분을 따올 수 있었는데, 정작 글의 템포나 어투, 느슨하다가 갑자기 확 올라가는 텐션은 생생했다. 그런 부분들이 하나로 합쳐지면서 마치 머릿속에서 파형이 그려지는 것 같은 흔치 않은 체험을 할 수 있던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