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 임용한(레드리버) ●●●●●●●●●◐
그냥 지는 전쟁은 없다.
"포탄이다! 홍이포다!"
다음 날인 19일, 거대한 포성과 함께 포탄이 성안으로 꽂혔다. 포탄 한 발이 거위알만 했다. 말로만 듣던 홍이포의 위력은 대단했다. 망월봉 외에 망월봉 남쪽 한봉에도 포대가 설치되었다. 20일부터는 종일 포성이 울리며 매일 성안으로 포탄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폭발하는 포탄은 아니지만 산탄을 발사하면 넓은 범위가 피해를 입었다. 지붕을 부수고 벽을 때리면 건물이 무너질 수 있었다. 매일 사상자가 발생했다.
포격의 주목표는 성벽 위의 성첩이었다. 나중에는 성첩이 거의 무너졌다. 성벽은 그래도 꽤 튼튼했다. 하지만 포탄이 쏟아지는 성벽 위에서는 병사들이 버틸 수가 없었다. 성첩이 무너지고 복구가 안된다는 건 병사들이 성벽에 오르지 못한다는 의미다. 적은 높은 곳에서 성벽을 관측했고, 아마도 성벽 위에 병사들이 모이면 그쪽으로 포격했을 것이다. 당시 포격의 정확도가 그리 높지는 않았겠지만, 포격이 주는 공포는 대단했다. 또 성첩이 없으면 적이 공격해올 때 성벽에 엄폐할 곳이 없다.
- p. 341. 척화파의 아집.
. 병자호란만큼 잘 알려져 있으면서도 잘못 알려져 있는 역사도 드물지 않을까 싶다. 자료의 문제인지 해석의 문제인지 의도의 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1619년의 사르후 전투부터 1637년의 병자호란까지 20년도 채 되지 않는 짧은 기간의 역사는 오류와 왜곡으로 가득 찬 채로 알려져 있다. 광해군이 중립외교의 일환으로 강홍립에게 밀지를 맡겨 사르후 전투에서 일부러 항복했다는 썰부터 시작해서 이후 들어온 서인정권이 청나라를 자극해 전쟁이 일어났다는 얘기, 인조가 무능해서 고려 현종이나 선조처럼 피난도 못갔다는 얘기, 인조가 홍타이지 앞에서 소리가 날 정도로 땅에 머리를 박으며 절을 해 이마가 찢어져 피를 철철 흘렸다는 얘기 등등. 거기다 패배의 이유나 책임 소재라고 알려진 것들도 다양하다. 입으로만 척화를 부르짖는 조정, 임경업 같은 맹장을 중용하지 않는 무능한 인사권자와 그 자리를 꿰어찬 졸장들, 남한산성의 식량 부족, 추위, 강화도 함락, 움직이지 않는 함경도 정예군, 김자점....
. 그만큼 병자호란은 우리에게 아쉬운 전쟁이며 뭐라 더 말을 붙일 게 없는 완벽한 패배다. 임진왜란은 온 국토가 피폐해지긴 했지만 결국 승리로 끝났다. 당과의 전쟁으로 인해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하긴 했지만 신라는 나당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고 고구려의 옛 땅엔 발해가 건국되었다. 유례없이 참혹했던 여몽전쟁만 해도 몽골을 상대로 40년을 버텼다거나(그걸 과연 항전이라고 볼 수 있는지에 대해선 여러 생각이 있겠지만) 패배 이후에도 쿠빌라이 쪽에 붙은 외교적 성과가 있었다는 등 얘기할 거리들이 있다. 그러나 병자호란에 대해서는 패배 이외에 아무 것도 얘기할 거리가 없다. 그래서 패배에 대한 수많은 주장과 생각이 있고, 그렇기 때문에 사실을 파악하기가 더 어렵다.
. 이런 상황에서 나온 임용한 박사의 '병자호란'은 사르후 전투 이전부터 병자호란에 이르기까지 20여년 정도의 역사를 사료와 지형에 대한 분석을 통해 풀어간다. 기존에 알려졌던 사실들을 실록을 비롯해 당시에 쓰여진 다양한 자료들을 통해 철저히 검증하고, 잘못 알려져 있던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정정해나간다. 여기에 수십 차례의 남한산성 답사로 쌓여진 지형에 대한 분석이 더해지고, 그 무엇보다 중요한 - 그들은 '왜'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통찰이 얹어진다. 그렇게 완성된 게 이 책이다.
강홍립 밀지론은 역사학자들까지도 속여넘겨서 1970~80년대까지도 학계에서 정설처럼 돌아다녔다. 광해군을 쫓아내기 위해 만든 루머가 거꾸로 광해군을 영웅으로 만드는 근거가 되었다는 게 다만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광해군을 영웅시하는 사람들은 아직도 이 가짜 뉴스를 굳게 믿는다. 정치 투쟁에서 가짜 뉴스는 변수가 아니라 상수다. 정치인들 사이에 오가는 가짜 뉴스를 우리는 음모와 모략이라고 한다. 이건 광해군만의 비극이자 불운이었을까? 아니다. 역사상 거의 모든 군주들이 음모론의 주인공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광해군은 왜 음모론에 쓰러졌을까? 그것은 그의 체제가 그만큼 불안정했고, 상대를 포용하는 배려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 p. 53. 사르후 전투.
. 사르후 전투로 인해 임진왜란 이후 수십년간 힘들여 키운 조선의 일선 정예병력은 완전히 와해되었다. 이 전투 한 번으로 사망하거나 포로가 된 병력이 무려 1만명이 넘었다. 그것도 원정을 보낼 수 있을 정도의 정예병이자 상시 운용할 수 있는 전력의 대부분이 단번에 상실된 것이다. 급하게 무과를 치러 병력 손실을 메꿔보려 했지만 허겁지겁 뽑은 병력으로 빈틈이 메꿔질 리 없다. 거기에 사르후 전투 후 5년 만에 터진 이괄의 난. 그리고 3년 만의 정묘호란과 9년 만의 병자호란. 이 시기의 타임라인을 따라가보면 조선의 북방은 임란 시절보다 더한 전란의 시대였다는 걸 알 수 있다. 18년 동안 무려 네 차례의 전쟁이 있었고, 그 하나하나는 조선에 되돌릴 수 없는 타격을 안겼던 것이다.
. 이런 상황이니 장기적인 통찰을 가지고 방위계획을 세우는 건 애당초 불가능했다. 애초에 정예군대라는 게 몇년 사이에 완성되는 것도 아닐진데, 사르후 전투의 손실을 메꾸기 위해 일단 머릿수만이라도 맞춰놨더니 이괄의 난이 터져서 군대가 와해되고, 와해된 군대를 다시 불러모아 힘들게 육성을 해놨더니 정묘호란이 터져 서북군이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는다. 정묘호란이 터지자마자 최일선 정예였던 이순신의 조카인 용장 이완이 이끄는 의주의 8천 병력은 하루만에 전멸했고, 곧이어 한양으로 가는 길목의 거점이었던 정주와 안주성도 함락되면서 이곳을 방어하던 병력 역시도 큰 피해를 입는다. 간혹 정묘호란에 대해 한 달만에 끝났기에 피해가 덜했다고 얘기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건 어디까지나 민간에 국한된 것이었고 군사적 측면에 있어선 사르후 전투까지는 아니더라도 이괄의 난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대참사였다. 무엇보다도 사르후 전투에서 1만이 넘는 정예병력을 잃은 지 8년만에 벌어진 일이었던 것이다.
후금군이 안주에 도착한다. 무슨 대책을 세우든 안주성이 며칠은 버티며 시간을 벌어줘야 했다. 후금군은 21일 새벽, 안주성 공격을 감행했다. 안주성의 병사들은 남이홍의 지휘 아래 하루종일 싸워 세 번의 공격을 막아냈다. 하지만 이번에도 저녁 무렵 성이 뚫리고 만다. 적군이 성벽을 돌파해 관아로 밀려들자 남이홍과 장수들은 화약고를 터뜨려 자폭했다. 2차 방어선인 안주마저 무너지자 3차, 4차 저지선인 평양과 황주(황해도 서북부)의 주민과 병사들이 도주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방어 병력이 1/4 정도로 줄어버린다. 평양의 윤훤과 황주의 정호서는 성을 포기한다. 이제 더 이상 적을 저지할 방법이 없었다.
- p. 78. 정묘호란.
. 조선처럼 작은 나라에서 10년 사이에 2만이 넘는 정규군이 손실되었다는 건 복구가 불가능한 피해였다. 오죽하면 이런 상태에서 압록강과 평안북도를 지키는 건 불가능하다, 다시 고려시대처럼 청천강과 평안남도를 방어선으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아무리 그게 현실이라도 영토를 포기하는 건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다. 명분도 명분이지만, 조선처럼 경제규모는 작은데 인구는 많고 행정밀집도가 높은 나라에서 대규모 백성의 이주는 난민과 대규모 기아 사태를 야기해 나라 자체를 흔들리게 할 수도 있는 위험한 일이었다.
. 결국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였다. 방어선을 지키는 대신 방어에 용이한 거점에 산성을 쌓고 거기에 병력을 밀집시키는 것. 그리고 적이 쳐들어오면 방어력이 높은 산성에서 버티면서 지원병력을 보내 적을 앞뒤에서 협공하는 것. 이거라면 먼 옛날부터 익숙한 전술이고, 무엇보다 없는 살림으로도 어찌저찌 운용이 가능했다. 그래서 의주에는 백마산성, 황해도에는 정방산성, 그리고 한양 근처에는 우리가 잘 아는 남한산성이 세워진다. 하지만 이제 와서는 모두가 아는 것처럼, 이러한 거점방어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단기전을 목표로 거점을 지나쳐버리는 전술을 막을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전술을 사용할 군대는, 당시 동아시아에서 - 아니 어쩌면 전세계에서 제일 빠른 기동력을 보유한 군대였다.
청군의 선발대, 본대, 후위가 차례로 남하하며 서북군대는 고립되거나 궤멸되었다. 황해도 정방산성에 있던 도원수 김자점 역시 속수무책으로 고립됐다. 정묘호란 후 조선이 심혈을 기울여 구축한 3중 방어선이 마치 제2차 세계대전의 마지노선처럼 제자리에 선 채 무력화되고 만 것이다. 부원수 신경원은 영변 철옹성, 평안병사 유림은 안주성, 평양감사 홍명구는 자모산성에 고립되었다. 인조가 대군이라 표현했지만 김자점이 가진 병력이라 봐야 속오군까지 겨우 1만 정도였다.
- p. 234. 구원군의 행방.
. 인터넷 상의 드립이라고 생각하긴 하지만, 가끔 고려 현종이나 선조와 비교하면서 인조가 남쪽 끝으로 피난을 갔다면 거점방어가 효과를 발휘했을 것이고, 청나라 역시 조선에서 긴 시간을 할애하지 못했을 것이므로 결과가 달라졌을 거라는 얘기도 있다. 당연히 도망칠 수 있다면야 좋은 전략이지만, 애초에 의주에서 출발해서 8일만에, 그것도 '본군'이 남한산성을 포위해버리는 군대를 상대로 무슨 피난을 간단 말인가(....) 심지어 한반도 중남부는 대부분 기병 활용을 극대화 할 수 있는 평지다. 조정이 정말 남쪽으로 피난을 가기라도 했다면 일주일을 채 버티지 못하고 경기도 남부나 충청도 북부 어딘가에서 따라잡혀서 전쟁은 끝났을 것이다. 거기다 당시 청군은 모문룡 잔당이 대거 합세하면서 최신식 대포인 홍이포와 수군까지 보유하고 있었고, 강화도 함락 당시의 전황을 보면 대포와 수군을 운용하는데에도 능숙했다. 몽골의 침략이나 임진왜란 때와는 달리, 이제는 더 이상 바다도 안전한 곳이 아니었다.
청군이 죽음의 배에 탑승을 시작했다. 황선신은 고개를 좌우로 돌려 해협의 남북, 연미정과 광성보에 있을 조선함대를 찾았다. 연미정 쪽에서 조선함대가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 그때 지금껏 그가 들어보지 못한 거대한 포성이 울렸다. 산성에서와 마찬가지로 강화에서도 조선군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변수가 홍이포였다.
그래도 현재의 대포 성능과는 비교불가이니 조선 수군이 과감하게 돌진했더라면 전투가 어떻게 진행되었을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조선 수군은 포격에 겁을 먹고 물러서더니 자취를 감춰버렸다. 청군의 도하를 막을 수 없게 되었으니 돌아가서 피난민이라도 태우자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 남쪽에 위치한 광성보의 장신 함대는 조류 때문에 움직일 수가 없었다. 황선신은 분노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렇게 청군이 도하를 시작했다. 병력을 가득 태운 배가 해협을 새까맣게 덮었다. 황선신은 겁을 먹고 도망치려는 병사를 제지하며 해협을 노려보았다. (중략) 갑곶나루에 상륙한 청군은 언덕을 지키던 황선신의 수비대를 몰살시켰다.
- p. 348. 강화도 함락.
. 결국 처음부터 의도한 것은 아니었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향한 것 자체는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 말먹이가 부족하다는 것만 빼면 남한산성은 나름 무기와 식량 준비가 충실히 되어있고, 완전하지는 않더라도 지형적인 이점을 갖춘 천혜의 요새였다. 오히려 상륙을 허용하면 더 이상의 방어책이 존재하지 않는 강화도보다는 남한산성이 방어에는 더 유리할 수도 있었다. 여기서 버티면서 각지의 병력이 결집하기만 한다면, 전쟁은 아직 몰랐다. 그래서 인조는 12월 14일에 남한산성에 입성하고, 그 다음 날에 강화도 행을 시도하다 피난길 역시도 위험하다는 걸 깨닫고 이 곳에서 방어전을 펴기로 마음먹는다. 그렇게 47일에 걸친 남한산성 방어전이 시작된다.
. 피난길마저 위험해져 어쩔 수 없이 선택하게 된 남한산성이었지만 생각보다 상황은 나쁘지 않았다. 남한산성을 지키는 병력은 1만 2천에 달했고, 그것도 금군과 병조 직할 병력, 훈련도감과 어영청, 경기도의 병력, 이시백이 지휘하는 수어청 등 남아있던 조선의 병력 중 최정예라 할만한 구성이었다. 거기다 오늘날에도 오르기 쉽지 않은 웅장한 산과 가파른 산세에, 산봉우리 여러 개를 능선을 따라 연결한 산성은 넘을 수 없는 천혜의 요새였고, 알려진 것과 달리 산성 내의 물자 준비 역시 충실히 되어 있었다. 남한산성을 포위한 청나라 군은 몇 차례 탐색을 겸한 공격을 펼쳤지만 산성의 정예병력은 가볍게 공격을 막아냈고, 오히려 성문과 성벽을 통해 수차례 적을 역습하기도 했다.
. 다만 미처 몇 가지 생각하지 못했던 점은 있었다. 우선 군량은 충분했지만 말먹이가 없었다. 김훈의 '남한산성'에 나오는 것처럼 말을 먹이기 위한 방책이 여럿 강구되었지만 무엇 하나 실효성이 없었고, 결국 말들은 전부 굶어죽고 말았다. 기병전력을 완전히 잃고 만 것이다. 어차피 성벽에서 수비하는데 말이 무슨 필요가 있겠냐 싶겠지만, 성벽을 공격하다 퇴각하는 적을 추격하거나 역습을 할 때, 그리고 무엇보다도 원군이 도착했을 때 내응하기 위해선 기병 전력은 꼭 필요한 것이었다.
. 하지만 더 근본적인 문제는 임용한 박사가 책에서 비판하듯, 전국 각지에서 모이는 원군을 운용할 세부적인 방침이 전혀 준비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어느 지역의 부대는 어느 길을 따라 어디에 거점을 마련하고, 성 안과는 어떤 식으로 연락하고, 성 안의 부대와 성 밖의 부대가 어떤 식으로 내응해서 적을 앞뒤에서 칠 지에 대해, 훈련은 고사하고 기본적인 지침도 없었다. 아니나다를까 각지의 원군들은 개별적으로 산성으로 달려오기 급급했으며, 청나라 군대는 분산된 원군을 하나하나 각개격파했다. 원군들은 다들 용감히 싸웠지만 개별적인 싸움만으로는 한계가 있었고 결국 전멸당하거나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항복할 당시 평안도 군대와 함경도 군대가 며칠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에 도달해 있었지만, 그걸 알 도리가 없었다.
승리한 전라 1여단도 소멸하고, 2여단은 후퇴할 정도였으니 다른 부대는 말할 것도 없었다. 충청사단은 2개 여단이 다 소멸했다. 강원사단 감사 조정호는 권정길 부대가 패하자 진군을 포기하고 여주군 미원현으로 후퇴했다. 1여단과 좌, 우 병사를 잃은 경상감사 심연은 조령 너머로 후퇴해서 문경에 주둔했다. 수치상의 병력은 아직 2/3가 남았지만 전투력은 1여단의 절반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 p. 312. 광교산 전투.
. 결정적으로 남한산성은 치명적인 약점인 망월봉을 안고 있었다. 산성 동북쪽의 망월봉은 산성보다 높았지만 조선은 축성의 어려움 때문이었는지 망월봉까지는 성을 확장하지 못했고, 조선 역시 망월봉이 약점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적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길을 끊었지만 장거리 포격이 가능한 홍이포를 가진 청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천자총통으로 홍이포를 저격하는 기적 같은 성과를 거두기도 했지만, 청군은 계속해서 홍이포로 성을 포격했다. 행궁이 공격당했고, 성벽 위의 병사들을 지켜 줄 성첩이 피격당하자 그 다음에는 성벽 위 병사들이 무방비로 적의 포격 앞에 표적이 되었다. 가장 먼저 일선의 병사들이 이제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걸 깨달았고, 아직도 항복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척화파들을 내보내서 싸우게 하라고 행궁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흔히 남한산성의 항복에 대해 식량난, 추위, 강화도 함락이 언급되고 이 모두가 다 어느 정도 지분이 있긴 하지만, 망월봉에서의 포격이 아니었다면 최소한 평안도와 함경도 병력이 도착할 때까지는 한 번 더 버틸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일선에 있는 병사들이 외치던 것처럼 더 이상의 전쟁은 불가능했다.
. 이렇듯 임용한 박사가 기록과 지형에 대한 분석을 통해 이야기하는 병자호란은 우리가 배우고 알고 있었던 것과는 사뭇 다르다. 병자호란은 누구 하나의 패전 때문에 진 것이 아니었다. 병사들은 물론 많은 장교들과 심지어 대장들까지도 용감히 싸우다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었다. 많은 패배가 있었지만 몇 차례의 승리도 있었다. 포격 전까지 남한산성은 떨어지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곱씹을수록 해볼만해 보이는 전쟁이었다. 하지만, 이들을 통솔할 컨트롤 타워도, 시스템도, 전략도 없었다. 산성과 각지의 부대들은 고립된 채 개별적으로 싸웠고, 반대로 청은 전장에 대한 정보를 파악하고 일관된 통솔 하에 싸웠다. 병자호란에 대한 수많은 if 이전에, 근본적으로 청과 조선은 다른 전쟁을 벌였고 그게 승패를 갈랐다. 철저하게 그들이 세웠던 전략대로 전쟁을 이끌어갔던 청과, 정보도 통솔도 없이 그때그때 수동적으로 대응하기 급급했던 조선. 해볼만한 것처럼 보였을 뿐, 그 실상은 도저히 이길 수 없던 전쟁이었다. 책의 부제가 말하는 것처럼, '그냥 지는 전쟁이란 없다.' 병자호란도 그랬다.
조선의 관료제는 너무 엄해서 결재 없이 기동할 수 없다. 이런 기동은 도상훈련조차 해본 적이 없다. 조선 관료들은 지시나 규정에 없는 문제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마땅한 통합지휘관이 없으니 사단을 좌우익으로 나누고 후위를 두어 삼각포진으로 이동하자고 계획을 세워도 감사와 병사 중 누가 전략 수립과 임명권을 가질지 결정할 수 없었고 준비도 훈련도 되어 있지 않았다. 한편 산성 안에서는 각 도에서 출동한 군대가 어디로 어떻게 다가올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팔도군이 집결하는 데 며칠이나 걸리며, 어디 군대가 먼저 다가오는지, 청군을 역포위할 포진이 완성되는데 며칠이나 걸릴지도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
김류 뿐 아니라 비변사 대신들도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게 전란을 두 번이나 겪고, 수십 년간 '전쟁준비'를 한 나라인가? 훈련도감, 어영청, 수영청 같은 군영 설치, 직업군인 양성, 화기와 화약 개발, 남한산성 축성, 속오군, 영장제.... 단어만 나열하면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군사제도는 획기적으로 변했다. 그러나 막상 열어보니 속 빈 강정이었다.
- p. 196. 조선군의 전략, 전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