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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맛에 맞는 드라마가 아닌, 삐걱대며 흘러가는 역사

권력과 인간 - 정병설(문학동네) ●●●●●●●●◐○

by 눈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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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는 경희궁으로 가는 중간에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반란이다.



영조는 사도세자의 죽음을 공식적으로 확인한 날(1762년 윤5월 21일) 바로 사도라는 시호를 내렸다. 흔히 '사도'의 의미를 1차적인 뜻으로만 생각하여, '생각할 사' '슬퍼할 도' 곧 '생각하고 슬퍼하다'로 번역하고, 영조의 자식 보낸 슬픔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시호는 시법을 따르는데, 시호의 글자 하나하나는 각각 그 인물의 성격과 삶을 드러냈다. '사'나 '도' 모두 시법에 정해진 의미가 있는데,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조선 왕실에서 사용된 용례에 따르면, '사'는 '전의 잘못을 후회한다'는 뜻이고, '도'는 '중년에 일찍 죽다'는 말이다. '사'나 '도'나 모두 부정적인 의미가 강하기 때문에 극히 조심스럽게 사용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다른 이유로 이런 시호를 붙인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렵다. 여기에서도 영조의 마음에 슬픔보다 분노가 앞서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 p. 231. 죽음으로 가는 길.





. 지금에 와서는 한풀 꺾인 느낌이지만, 한 때 조선 역사를 왕권과 신권의 첨예한 대립구도로 보는 시각들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이상은 드높지만 실권이 없어 슬픈 허수아비 왕과 실권을 휘두르며 사리사욕을 탐하는 권신이라는 구도는 가장 '잘 팔리는' 소재였고, 이러한 관점에서 순조, 현종과 철종, 광해군, 효종과 현종, 성종 같은 왕들이 때로는 변호되고, 때로는 저평가되기도 했다. 특히나 탕평을 내세운 영조와 정조 - 그리고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의 이야기는 이런 주장에 장작을 넣어주는 가장 좋은 이야기거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 이런 이야기들 중 가장 잘 만들어지고 가장 흥행한 것이 '노론음모론'이다. 노론의 지원으로 소론의 지원을 받던 경종의 위협을 이겨내고 왕위에 오른 영조. 하지만 경종을 지원하던 소론이 몰락하면서 노론은 견제받지 않는 절대권력이 되고, 영조는 이를 막으려 했지만 태생적인 한계 때문에 노론에 휘둘리게 된다. 이런 노론의 횡포를 견제하려 했던 사도세자는 오히려 노론의 반격을 받아 뒤주에 갇혀 죽게 된다. 노론은 이에 그치지 않고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의 즉위를 막으려 했지만 실패했고, 정조의 즉위 기간 내내 사사건건 발목을 잡다가 결국 정조를 독살하는데 성공하고 허수아비 임금 순조를 앉히면서 세도정치가 시작되고 망국으로 가는 길이 열린다는 설이다. 100년 넘게 이어지는 장대한 스토리임에도 이야기의 완결성에 흠결이 없고, 선과 악이 완벽하게 구분되며, '고난받는 선한 측'에 감정이입을 할 여지가 충분하고, 나름의 교훈까지 준다(!!!) 역사와 관련해서 '광해군의 중립외교', '최씨 정권의 구국의 대몽항쟁', '인조의 강화도 몽진' 등 많은 판타지 대작이 있지만, 이정도로 완벽하고 장대하며 소설적으로 매력적인 이야기는 정말 드물다. 당연히 노론음모론은 어마어마한 호응을 받으며 수십년을 휩쓸었고 이를 주장한 학자는 방송가의 총애를 받는 대스타가 되었으며, 수많은 역사 다큐멘터리 프로와 드라마와 영화에서 이 주장을 채택했다.





사도세자는 첫 살인부터 잔혹하게 머리를 베어 회시했을 뿐만 아니라 무려 여섯 명이나 죽였다. 그 잔혹함이나 살상 규모가 과연 이 사건이 첫 살인일까 의심하게 한다. '현고기'에서는 사도세자가 장성하기 전에 이미 살인을 시작했다고 한다. 어쩌면 혜경궁도 모르는 살인 사건이 그 전에 이미 여러 건 있었는지도 모른다. 사도세자가 몇 명이나 죽였는지는 정확히 파악할 수 없다. 선희궁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히던 날 아침, 영조에게 가서 사도세자의 비행을 말했는데, 그 첫머리에 사도세자가 내관과 내인 '백여 명'을 죽였고, 불에 달궈 지지는 형벌 등 갖은 악형을 가했다고 했다. 혜경궁은 1760년 이후 사도세자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지 기억할 수 없다고 했고, 세자가 죽기 몇 달 전에는 하루에도 몇 명이나 죽였다고 했다. 사도세자 주위 사람들은 하루하루 살얼음판을 걷고 있었다.

- p. 148. 광증의 증상.


10일 밤부터 서울에는 큰비가 내렸다. 하루 넘게 비가 오는 바람에 궁궐 안팎의 개천에 물이 잔뜩 불어 있었다. 세자는 한밤중에 이런 물길을 뚫고 경희궁으로 갔다. 그의 미행이 보통 때와 다름없었다면 거의 백 명에 이르는 수하인이 뒤를 따랐을 것이다. 세자는 그들과 장대비를 맞으며 칼을 빼들고 서울의 밤거리를 가로질렀다. 아무리 한밤이라지만 일대의 장정이 서울 거리를 누볐으니 소문이 나지 않을 수 없다. 세자는 경희궁으로 가는 중간에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반란이다.

- p. 217. 세자의 죄명.





. 하지만 노론음모론의 오류를 지적하는 학자들의 발표가 계속해서 이어지고,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1차 사료들의 접근성이 높아지면서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쉽게 사료를 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이 유튜브와 커뮤니티 등을 통해 꾸준히 근거를 제시하면서 노론음모설은 사실상 힘을 잃는다. 박시백의 '만화 조선왕조실록', 영화 '사도',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 등 최근에 나오는 역사물들의 영조, 사도세자, 정조의 모습은 이런 변화를 잘 보여준다. 영조와 정조의 왕권은 강력하고 안정적이었으며, 사도세자는 세자 시절부터 수많은 사람들을 잔혹하게 죽인 광인이었고 심지어 영조까지 죽이려 했지만, 영조는 차기 후계자인 정조를 죄인의 자식으로 만들 수 없어 사약이 아니라 뒤주에 넣는 방식으로 죽였다. 그로 인해 영조로부터 정조로 이어지는 승계가 확고해질 수 있었고, 정조는 50살까지 살다가 조선 왕들이 가장 많이 시달렸던 종기로 인해 죽었으며, 그가 세자인 순조를 맡긴 건 그의 오른팔이었던 김조순이었다는 것 등등. 사료를 뒤져 사실을 파내면 파낼수록 노론음모론이 발을 붙일 자리는 없어져 갔다.





사도세자가 죽은 다음 혜경궁의 처신을 두고, 남편이 죽는데 왜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사람들이 있다. 당대인들이 아니라 현대인들이 하는 말이다. 훗날 친정이 공격을 당할 때는 단식까지 한 혜경궁이 남편이 죽을 때는 왜 아무 저항도 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당시 혜경궁은 저항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혜경궁 또한 대역죄인의 부인으로 함께 벌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자기도 아들과 함께 벌을 기다리는 판에 남편을 위해 저항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조선은 지금처럼 대역죄인과 그 가족의 운명을 떼놓고 생각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연좌제가 법으로 존재하던 시대였다. 설령 저항한다고 해도 무슨 말을 하겠는가?

- p. 271. 소년 정조.





. 정병설 교수의 이 책 역시 다양한 사료를 통해 노론음모론을 반박한다. 실록과 승정원일기, 한중록 같은 어느 정도 알려진 사료에서부터 영조가 반포했다는 폐세자반교, 당시의 인물들이 저술했던 수많은 책과 편지에 이르기까지 조선시대의 주변부 문화를 전공했다는 국문학자인 저자는 당시의 사료들을 비교하고 분석해가며 사도세자와 영조, 정조를 중심으로 혜경궁과 홍봉한, 정성왕후와 선희궁, 정순왕후 같은 인물들의 행적을 추적한다. 그 과정에서 '매끈하고 매력적인 소설'에 가려져 있던 진짜 사실들이 하나하나 드러나고, 소설 속 영웅적인 인물이 아닌, 장점과 단점을 한데 안고 있는 실제의 인물들이 나타난다. 그 전의 이야기가 더 짜임새 있고 매력적이고, (흔히 말하듯) "나의 OO는 이렇지 않아"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어차피 우리의 삶 역시도 여기저기 삐걱대고, 딱히 재미있다 싶은 부분이 없이 이런저런 실수와 아쉬움을 남기면서 어영부영 흘러가고 있지 않은지. 그걸 깨닫는 것이야말로 역사에서 배울 수 있고 배워야 할 점이 아닐까. :)





'사도세자의 고백'은 종전의 읽기 어려운 역사서를 쉽고 흥미롭게 풀어놓은 대중역사서의 대표작이다. 도서 판매량이나 언론의 호평에서 볼 때 성공한 '역사서'이다. 성공 요인이 무엇일까? 나는, 독자의 감정에 영합한 데 있다고 본다. '사도세자의 고백'은 한중록을 '승자의 기록'으로 보면서 역사에 묻힌 '패자의 기록'을 복원하여 억울하게 죽은 사도세자를 신원하겠다는 책이다. 여기서 승자는 노론이고 패자는 소론이며, 또 승자는 혜경궁이고 패자는 사도세자이다. 이 논리에는 사도세자 이후 조선의 임금 모두가 사도세자의 후손이라는 엄연한 사실은 당당히 무시된다. 사도세자 측이 패자라는 기괴한 논리가 나온 것이다. 독자들은 사도세자가 성군의 자질을 가지고도 불쌍하게 뒤주에 갇혀 죽은 것에 동정하고 공분한다. 그리고 그 진실이 집권 세력에 의해 가려졌다는 통속소설적 논리에 감동을 받는다. '지금껏 그런 감추어진 역사를 모르고 있었다니.' 죄의식과 분노가 한꺼번에 솟아난다. 종전의 이것저것 까다롭게 따지는 역사 저술에서는 좀처럼 맛볼 수 없는 감동이다.

- p. 378. 길 잃은 역사대중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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