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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의 역사, 시대를 타고 미학의 역사가 되다

미학 오디세이 1권 - 진중권(새길) ●●●●●●●◐○○

by 눈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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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작품이 아름답다면, 그 아름다움의 근원은 가시적 세계에 있는 게 아니다.
그건 예술가의 내면에, 더 나아가서는 정신 세계에 있던 거다.




예술은 미메시스(모방)가 아니다. 조각가나 건축가는 눈에 보이는 대상을 모방하지 않는다. 예술가의 영혼은 정신 세계 속의 '원형'을 보고 그것에 따라 창작한다. 그는 이 '원형'(형상)을 무정형적인 '질료'에 부여해 아름다운 형태를 만들어낸다. 그러므로 만약 예술작품이 아름답다면, 그 아름다움의 근원은 가시적 세계에 있는 게 아니다. 그건 예술가의 내면에, 더 나아가서는 원래 정신 세계에 있던 거다. 예술가는 이렇게 질료에 형상을 부여함으로써 자연에 모자란 것을 보충한다. 그런 의미에서는 예술가는 창조자다.

- p. 116. 가상을 넘어.





. 솔직히 말하자면, 철학이나 인문학 '교양서'에 대한 리뷰를 쓴다는 건 항상 어렵다. 거기다 그게 수십년 전에 나온 베스트셀러라면 더욱 그렇다. 한 권의 입문서가 한 분야에 대한 관심을 자극해서 물꼬를 트면 뒤이어 그 분야에 대한 수많은 책들이 나오기 마련이고, 당연히 뒤에 나온 책들 중에는 '거인의 어깨'를 딛고 올라간 더 좋은 책이 있을 수밖에 없다. 더구나 그렇게 책들이 쏟아지다보면, 그 분야의 '고전'이라고 할 법한 명저들도 다시금 번역되어 나온다. 자연히 가장 처음에 붐을 일으킨 책은 앞뒤로 치이면서 그 빛이 바래고, 뒤늦게 읽은 사람 입장에서는 이게 그렇게 대단한 책인가 싶은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 이 책은 '무려' 1995년에 나온 책이다. 물론 그 전에도 미술의 역사를 다루는 책은 많았지만, 거기에 약간의 이론을 덧붙여 '미학'이라는 포지션을 - 그것도 대중을 타겟으로 잡고 나온 책은 거의 없지 않았을까 싶다. 당시 서른 세 살이었던 진중권은 영민했고, 야망이 있었으며, 이 분야가 이른바 "블루오션" 이라는 걸 깨달았다. 1992년 문민정부가 출범하면서 그 전의 거대담론이 일단락되고, 사람의 욕구가 자유롭게 폭발하고, IMF로 거품이 꺼지기 전 절정에 달했던 경제성장과, YS가 내세운 '세계화', '국제화'라는 슬로건 아래 교양과 세련미와 아름다움을 추구하던 시대. 이런 상황에서 대중을 상대로 아름다움에 대한 이야기를 학문의 영역으로 편입시켜 소개한 것은 정말 '똑똑한' 것이었다.





미는 개념이 아니므로, 어떤 걸 '미'라고 판정하게 해주는 보편적인 규칙은 없다. 삼각형은 그런 식으로 판정할 수는 있어도, 미는 그런 식으로 판정할 수는 없다. 미는 '느낌'으로 판정하는 거다. 이렇게 느낌으로 판정하는 능력을 '취미'라 한다.

- p. 238. 가상의 부활.




. 이렇게 책이 나왔던 시대와 배경을 굳이 설명하는 이유는, 이제 와서 읽어보면 이 시리즈의 1권은 그 자체로 특별한 이야기가 있다기보다는 어디까지나 '입문'이며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기 위해 독자를 훈련시키고 걸러내는 부분에 가깝기 때문이다. '미'에 대해 이야기했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을 정리하고, 미학의 몇 가지 기본 개념을 설명하며, 고대와 중세 미술을 중심으로 미술의 역사를 풀어놓는다. 자연스레, 이 책의 상당 부분은 아르놀트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와 겹쳐져 있다. 물론 표절이라고 얘기하는 건 아니다. 누가 쓰든 겹칠 수 밖에 없는 부분이니까. 하지만 이쪽 분야에서 손꼽힐만한 '고전'과 입문서의 비교인데다, 하필이면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를 먼저 읽어버렸기 때문에(....) 거기다 어느 새 30년이 다 되어가는 책이다보니 예전 PC 통신 시절에나 먹혔을 법한 철 지난 유머들과 그 시절 특유의 장난스러운 척하면서 그 뒤로 자의식을 뿜뿜(!)하는 말투는 이제와서 읽어내기엔 좀 닭살스러운 게 사실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금사과를 사이에 둔 파리스와 세 여신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해 단 10여 쪽으로 '미란 무엇인가'를 쉽고 명쾌하게 설명해내는 진중권의 글솜씨는 역시 감탄스럽다. 감각기관을 통해 받아들인 다양한 자료들은 하나의 이미지가 되고, 우리의 상상력과 인식능력(오성)은 이 이미지가 아름다운지 아닌지를 판단하고 아름답다고 판단되면 그 아름다움을 한껏 즐긴다. 그러니 원칙적으로는 아름다움을 판단할 객관적인 규칙 같은 것은 없는 게 사실이지만, 현실적으로 보자면 사람들의 생각은 어느 정도 보편타당성을 가지기에 많은 이들이 'OO가 아름답다'고 판단한다면 그 대상은 보편적으로 아름답다고 여겨지게 된다. 또한 거기서 그치지 않고 많은 이들이 동의했다는 사실 자체가 힘을 가지게 되어 동의하지 않은 이들을 얽어맨다. '아름답다'로 끝나지 않고, '아름답다. 그렇지?' 가 되는 것이다.





취미 판단(미에 대한 판단)은 인식이 아니다. 왜냐하면 미는 사물의 객관적 성질이 아니니까. 가령 장미꽃을 보고 내가 "이 꽃은 빨갛다"고 말하면, 당신은 군말 없이 동의한다. 하지만 "이 꽃은 아름답다"고 하면, 동의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건 미가 사물의 객관적 속성이 아님을 보여준다. 어떤 사물을 아름답다고 할 때, 그건 그 사물이 모양이나 색과 함께 '미'라는 성질을 갖고 있다는 뜻이 아니다. 단지 '그게 맘에 든다'는 얘기일 뿐이다. 취미 판단은 한갓 '주관'의 쾌, 불쾌에 대한 판단일 뿐, '대상'에 대한 인식이 아니다. 인식이란 어디까지나 사물의 객관적 성질을 파악하는 거니까. (중략)

따라서 취미 판단은 동시에 '보편타당성'을 갖고 있어야 한다. 사실 이 보편타당성 때문에 우린 마치 미가 대상의 객관적인 속성인 양 얘기하는 거다. 가령 우린 "저 꽃은 내게 아름답다"고 하지 않는다. "저 꽃은 내게 장미다"라고 하지 않듯이. 하지만 주관에 달려 있다는 미적 판단이 어떻게 보편타당성을 가질 수 있을까? 길이 있다. 모든 사람이 한마음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거다. 모두 한마음이니 같은 판단을 내릴 수밖에. 취미 판단의 보편성은 결국 '주관적' 보편타당성이다. 말하자면, 그건 인간 '주관'의 구조가 똑같은데서 비롯된 현상이다.

- p. 230-231. 가상의 부활.





. 하지만 시대상이 달라지고, 시대의 변화를 읽어내는 몇몇 천재들에 의해, 그 아름다움의 기준은 조금씩 달라지게 된다.... 여기까지 읽어냈다면, 그 다음은 이런 구조에 맞춰 각각의 변화의 모습을 따라가고, 그 끝에서 오늘의 '아름다움'을 읽어내면 되는 것. 이런 일련의 진행이 마치 밥 로스 아저씨의 '참 쉽죠?'를 떠올리게 하는 시원시원한 필체로 써내려진다. 이렇게 진중권은 한 권을 통으로 할애해 그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읽는 이들을 본격적인 출발선에 세우고, 그 다음 권부터 자신이 진짜 하려고 했던 현대와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에 대해서는 앞으로 한 권, 또 한 권씩. :)




'장미의 이름'에서 중세는 '웃음이 없는 문화'라고 했다. 여기서 우린 주요한 미적 범주가 시대마다 달라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령 그리스 예술에선 '미'라는 범주가 우세했다. 반면 중세 예술은 철두철미하게 '숭고'의 예술이었다. 중세에는 희극성을 허락하지 않았고 저 천상의 '미'와 지상의 '추'를 대비시켰다. 한편 고전주의 미술은 '미'를 추구했지만, 바로크 예술은 '극적인' 묘사를 추구했고, 로코코는 '우미'의 예술이었다. 고전주의자는 예술에 '추'를 그리는 걸 일절 허락하지 않았지만, 낭만주의자는 오히려 허울 좋은 아름다움 속에 감춰진 '추함'을 폭로하는 걸 즐겼다. 미적 범주의 가능성은 이렇게 시대마다, 유파마다 달라진다.

- p. 283. 아름다운 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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