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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아갈 수도, 물러설 수도 없는 이들의 토로

약속의 땅 이스라엘 - 아리 샤비트(글항아리) ●●●●●●●◐○○

by 눈시울
약속의 땅 이스라엘.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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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가 이해하지도 못하고 파악할 수도 없는
서사 영화에 출연한 오합지졸이다.
대본 작가는 미쳐버렸다.
감독은 달아났다.
제작사는 파산했다.


우파는 주장했다. "웨스트뱅크를 합병하기만 하면 무탈하리라." 좌파는 주장했다. "웨스트뱅크를 넘기기만 하면 평화로우리라." 우파는 주장했다. "희생자들은 좌파의 환상 탓에 죽었다." 반면 좌파는 주장했다. "희생자는 우파의 몽상 탓에 죽었다." 우리는 외부 환경에서 비롯된 비극적 현실을 직시하는 대신, 좌파와 우파의 대립에서 단순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를 지어내기로 했다. 아랍 민족의 잘못이 아니었다. 유대 민족의 잘못이었다. 중동이 문제가 아니라 이스라엘 정부가 문제였다. 이스라엘의 근본적 상황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특정 정치인이 저지른 특정한 실수였다. 기상천외한 방법이라 할 만한 것으로, 우리는 우리가 처한 비극적 삶을 도덕극으로 바꿔 놓았다. 잔혹한 현실을 직시하지 않고, 우리 자신을 탓하기에 적합한 가상현실을 창조했다.

- p. 385. 1993년, 평화.




. 이스라엘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항상 어렵고 조심스럽다. 승자의 논리 하에서 거대한 골리앗을 물리친 작고 단단한 다윗의 이야기를 꺼내는 건 이미 수십년 전에 사장된 이야기이고, 그렇다고 전 세계 유대인들의 압도적인 자금과 영향력을 통해 얻은 서방세계의 막강한 무기 지원으로 가난하지만 용감한 아랍국가들을 짓밟았다는 시각 역시도 구멍이 숭숭 뚫려 있긴 마찬가지다.


. 더구나 이스라엘의 이야기는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에 더 다루기 어렵다. 웨스트뱅크와 가자지구, 이란의 핵무장까지 위기는 언제나 현재진행형이고, 거기에 그 사이에 또 하마스의 테러로 이스라엘과 하마스-헤즈볼라-이란 연합과의 전쟁이 벌어져 이스라엘이 압승을 거두는 등 계속해서 사건이 갱신되어간다. 솔직히 읽는 내내 굳이 이렇게 적으로 가득한 곳에 국가를 세워서 쌩고생을 해야 할 필요가 있었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당연히 100여년 전의 그들에게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이스라엘 건국 이후 7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물러날 수도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목숨을 걸고 의지 하나만으로 아랍 한복판에 나라를 세웠던 건국 1세대들은 이미 대부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네 번에 걸친 전쟁을 승리로 이끈 세대들도 이제 황혼기를 맞이하고 있다. 물론 그 뒤의 세대들도 계속되는 충돌을 지켜보고 목숨을 위협받고 죽이고 죽임당하는 이들을 바라보며 자랐지만, 전쟁을 겪은 적이 없는 그들이 끝이 없는 이 갈등 속에서 과연 당위성을 가지고 버틸 수 있을 것인가.





평론가와 분석가 대부분은 이러한 이중성을 부정한다. 좌파에서는 점령을 중요하게 다루지만 위협은 도외시한다. 반면 우파에서는 위협을 중요하게 다루면서도 점령은 묵살한다. 그러나 이 두 요소를 하나의 세계관으로 합하지 않고서는 이스라엘 또는 이스라엘 - 팔레스타인 분쟁을 온전히 파악할 수 없다. 이 두 근본 요인 사이의 연관성을 진지하게 모색하지 않는다면 어떤 학파도 오점과 무익함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위협과 점령을 공히 소화하는 제3의 접근법만이 현실과 윤리에 부합할 수 있으며 그러한 접근법을 통해서만이 이스라엘 이야기를 올바로 파악할 수 있다.

- p. 11. 머리글 - 의문.




. 그래서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저자인 아리 샤비트는 할아버지 세대부터 이스라엘의 건국에 참여한 유대인으로, 이스라엘에 거주하며 중동 문제에 대해 글을 쓰는 언론인이다. 이스라엘 국방군에서 낙하산병으로 병역 의무를 다했고, 한편으로는 오랜 기간 평화운동에 참여하며 대표적인 비둘기파인 소설가 아모스 오즈 같은 인물들과 친분이 있기도 하다. 그런 그가 이스라엘의 좌파와 우파, 매파와 비둘기파를 고루 만나며 지금까지의 역사를 되새겨보고, 웨스트뱅크 등 팔레스타인 문제부터 이란의 핵무장, 그리고 점점 커지는 하레디 파와 비하레디 파와의 갈등에 이르기까지 오늘의 이스라엘이 직면한 문제들에 대해 고민한다.




"지난 30년에 걸쳐 이스라엘은 인구통계상 혁명을 겪었습니다. 이 기간, 초정통파 학교에 다니는 학령 아동 비율은 4퍼센트에서 20퍼센트로 상승했습니다. 아랍 학교에 다니는 학령 아동 비율은 20퍼센트에서 28퍼센트로 상승했죠. 따라서 오늘날 전체 학령 아동의 48퍼센트가 초정통파나 아랍 학교에 등록되어 있는 셈이죠. 거기서 14퍼센트는 현대식 정통파입니다. 38퍼센트만이 세속적이죠.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2030년 무렵이면 현재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세속적 유대인이 점점 줄어 소수가 되리라는 겁니다. 이스라엘의 문화적 정체성은 변할테고, 그에 따라 그 사회경제적 윤곽도 변할 겁니다. 세속적 유대인들은 일하고, 생산하며, 세금을 납부하는 주체입니다. 일단 이들의 수가 다수에서 밀려나면 이스라엘은 후진국으로 밀려나 세 번째 천년의 도전들에 응하지 못할 터입니다."

- p. 537. 2011년, 로스차일드 대로를 점거하라.




. 이스라엘에 대한 여러 책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이 책이 가지는 강점은 저자의 이력에서 오는 균형감각이다. 저자는 젊은 시절 내내 평화운동에 투신했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자신이 지금 팔레스타인 인들을 몰아내고 얻은 이스라엘 땅에 살고 있는 이스라엘 인으로서, 그 이스라엘과 운명을 같이 하고 있음을 인식한다. 건국 과정에서 벌어진 전쟁과 테러, 수많은 유혈사태들을 비판하면서도 결국 자신이 이 땅에 살고 있는 건 그 피 덕분이라는 것에서 눈을 돌리지 않는다. 정착촌 갈등을 불러일으킨 광신적 시오니즘이 이스라엘의 미래를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고 비판하면서도 이스라엘의 지리적 상황과 태생적 한계에 대한 고민도 대안도 없이 입으로만 평화를 부르짖는 온건파들 역시 환상에 빠져 있다고 비판한다. 광신적인 강경론에 빠져 주변의 모든 국가들을 적으로 돌려선 당연히 살아남을 수 없다. 하지만 이제 와서 주변 국가들의 강경파들이 요구하는 것처럼 1940년대나 그 이전의 국경으로 돌아가는 것 역시 불가능하기는 마찬가지다. 외부인이라면 별다른 고민없이 밀어버리라고, 반대로 동지중해에 빠져버리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그 땅에 살고 있는 저자로서는 현실적인 생존이 배제된 이상을 이야기할 수는 없다. 책에는 그런 저자의 고민이 담겨져 있다.





이슬람 세력이 강해지면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온건파는 약해졌고 포괄적 평화에 이를 가능성은 감소했다. 동시에, 남레바논과 가자지구에서의 이스라엘 단독 철수는 로켓과 미사일로 이스라엘을 주기적으로 뒤흔드는 테러리스트 단체들에 멍석을 깔아주었다. 여기서 문제점은 이렇다. 만약 이스라엘이 웨스트뱅크에서 철수하지 않는다면 정치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파멸하겠지만, 만약 철수한다면 웨스트뱅크 정권에 맞서야 할 수도 있다. 이 정권은 이란의 지원과 이슬람 조직의 격려를 등에 업고 미사일로 이스라엘의 안보를 위협할 수도 있는 집단이다. 점령을 종식시킬 필요성은 그 어느 때보다 크지만, 그에 따른 위험 또한 마찬가지인 셈이다.

- p. 654. 해안의 요새.





. 그래서 저자는 700여 페이지에 걸쳐 이스라엘이 걸어온 길과 그들이 처해 있는 상황을 토로하면서도, 결국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못한다. 이러저러하면 해결될 거라고 자신있게 이야기할 수 없는 문제라고 솔직하게 고백한다. '우리는 우리가 이해하지도 못하고 파악할 수도 없는 서사 영화에 출연한 오합지졸이다. 대본 작가는 미쳐버렸다. 감독은 달아났다. 제작사는 파산했다.'


. 솔직히 나 역시도 이 책을 읽고 난 후 이스라엘의 30년 후를 예측할 수는 없었다. 이란의 핵개발이 성공으로 끝나 양국간에 핵전쟁이 벌어지는 최악의 결말일 수도 있고, 이란에 민주주의와 평화가 찾아와 한숨을 돌리고 중동의 위험수위가 낮아서 웨스트뱅크에서도 극적인 타협이 성사되는 최선의 결말일 수도 있다. 아니, 30년 후는 커녕 당장 이 책을 읽고 이 글을 쓰는 몇 년 사이에, 하마스가 갑작스럽게 수많은 민간인을 납치 사살하고, 이스라엘이 하마스와 헤즈볼라와 이란과 시리아를 모두 격파하고 가자지구를 초토화시키는 현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이렇듯 이 지역에 대해 예상하는 건 극히 어려운 일이다. 다만 확실한 건, 그 결말이 어떤 것이든 저자와 그 주변 사람들은 자신이 태어난 땅에 끝까지 절실하게 버티고 매달릴 것이라는 것이다. 그 절실함이, 부디 틀리지 않는 방향으로 이어지기를.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이곳, 성서의 땅이라는 영화 촬영지에 있다. 카메라는 여전히 돌아가고 있다. 그리고 전경을 촬영하다 문득, 우리가 이 해안에 집결하는 모습을 잡는다. 이 해안에 매달리는 모습을. 이 해안에서 살아 숨쉬는 모습을. 어떤 난관에 부딪히더라도.

- p. 679. 해안의 요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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