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격기의 달이 뜨면 - 에릭 라슨(생각의힘) ●●●●●●○○○○
"차는 런던 생활에서 거의 마법 같은 비중을 획득했다."
"나는 여러분들이 제 증인이 되어주길 요청합니다. 제가 피와 눈물과 수고와 땀 이외에 어떤 것도 약속하거나 제공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이제 나는 여기에 실수와 부족함과 실망에 대해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몫을 더하겠습니다. 이것은 오래갈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굳게 믿습니다. 약속할 수도 보장할 수도 없는 단순한 믿음에 대한 공언일 뿐이지만 우리는 끝내 완전하고 절대적인 최후의 승리를 거두고 말 것입니다."
- p. 639. 팬저와 팬지.
. 1940년 5월, 독일의 기갑사단 앞에 300만의 육군을 가진 프랑스는 빠르게 무너져 내렸다. 후방의 폴란드를 제거하고 북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노르웨이를 점령한 후 프랑스를 침공한 독일이 단 6주만에 프랑스를 무릎꿇리자 유럽 대륙에는 독일의 동맹국과 중립국 밖에 남지 않았다. 이제 히틀러는 서유럽에서의 전쟁에 종지부를 찍고, 그의 최종 목표였던 동쪽으로의 대확장, '레벤스라움'을 실현하길 원했다. 하지만 유럽 대륙 너머 서쪽 끝에는 아직 영국이 남아 있었다.
. 사실 히틀러에겐 영국을 점령할 생각까진 없었다. 그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동유럽과 우크라이나, 그리고 러시아 일부까지 펼쳐진 광대한 땅을 독일인들의 생활터전으로 만드는 것이었고, 영국은 그가 동쪽으로 진격하는 동안 강화를 맺고 평화를 지켜주기만 하면 족했다. 무엇보다도 압도적인 영국 해군을 상대로 도버 해협을 건너 영국에 상륙하는 건 당시의 독일 해군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 흔히 이 시기에 있었던 됭케르크 철수작전에서 독일이 연합군을 섬멸시키지 않은 걸 히틀러의 실책이라 이야기하지만, 히틀러의 목표가 영국의 육군전력에 타격을 입히는 게 아니라 서쪽에서의 전쟁을 끝내고 동쪽에 집중하려는 것이었다면 딱히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은 아니다. 설령 됭케르크에서 철수하지 못했던 영국 육군이 섬멸된다 한들, 히틀러가 도버해협을 건널 수 없다는 건 달라지지 않으니까. 그럴바에야 영국에게 은혜를 베풀어두고, 이를 계기로 강화를 이끌어낸다는 건 충분히 현실적인 구상이었다. 하지만 하필이면 히틀러의 꿈이 실현 직전까지 왔던 그 시점에, 영국은 비록 가장 뛰어난 인물은 아니지만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의지를 가진 인물을 총리로 세운다. 1940년 5월 10일에 이뤄진 윈스턴 처칠의 총리 임명. 그리고 히틀러의 구상과는 달리, 처칠은 결코, 단 한 순간도, 온 나라가 폭격으로 피해를 입고 수많은 해외재산과 영토를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히틀러와 강화를 맺을 생각이 없었다.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선전장관 요제프 괴벨스는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가지 않았다. 밤마다 런던을 두들겨 대는데도 왜 처칠은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것일까? 루프트바페 정보국의 보고에 따르면 RAF의 피해도 치명적이라고 했다. 마지막 남은 100여 대의 전투기들도 격추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왜 런던은 여전히 건재하고 처칠은 아직 권좌에 멀쩡히 앉아있는가? 영국이 비탄에 잠겼다거나 나약해졌다는 징후는 어디에도 없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괴벨스는 10월 2일 선전부 회의에서 부관들에게 말했다. "런던에서 시작된 낙관주의와 허세가 지금 영국 전역으로, 아니 어쩌면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부인하기 힘든 영국의 복원력은 독일 국민들에게 예상치 않았던 파장을 일으켰다. 문제가 골치아프게 된 것이다. 영국이 투쟁 의지를 포기하지 않는 한 독일인들은 두 번째 겨울에도 전쟁을 끝낼 수 없게 되었다.
- p. 365. 베를린.
. 책은 처칠의 총리 임명부터 시작해 그 해 가을까지 이어진 '배틀 오브 브리튼', 즉 런던 대공습을 포함한 영국 본토 항공전을 다룬다. 수차례에 걸친 히틀러의 강화 요구에도 처칠이 굴복하지 않고, 도저히 도버해협을 배로 건널 수 없던 독일이 선택한 본토 항공전. 독일은 공중전 뿐 아니라 영국인들의 항전의지를 꺾기 위해 코번트리와 런던 등에 대규모 무차별 공습을 시전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인들은 폭격의 공포와 죽음의 위험에 맞서 싸운다. 말콤 글래드웰이 '다윗과 골리앗'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그들은 폭격이 멈추자마자 곧바로 복구작업과 일상생활에 착수할 수 있을 정도로 폭격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냈다. 심지어 폭격이 장기화되는 시점에 이르면 폭격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대피소를 뛰쳐나와 화재와 싸우는 사람들을 어디서나 볼 수 있게 되었다.
지상의 분위기도 달라지고 있었다. 그것은 히틀러의 맹공을 견딜 수 있다는 영국의 저력을 확고하게 보여주는 전반적인 느낌과 일치했다. 떨치고 일어설 때가 된 것이다. 여행 세일즈맨으로 일했던 한 매스옵저베이션 일기기록원은 이렇게 썼다. "소극적이었던 사람들의 정신력이 적극적으로 바뀌는 것 같다. 대피소에서 웅크리고 있기보다 올라가 뭐라도 하려고 한다. 마치 불꽃놀이를 하는 아이처럼 소이탄에 달려들고 소화용 소화 펌프를 가지고 높은 층에 올라가 화마와 싸우는 모습은 이제 저녁의 일상이 되었다. 어떤 소방대장은 위험을 무릅쓰고 달려드는 사람들을 막는 일이 제일 힘들다고 내게 토로했다. 모두가 '폭탄을 치우려' 한다.
- p. 681. 피와 땀과 눈물.
. 에릭 라슨은 이런 모습에 어느 정도 해설을 덧붙이면서도, 가급적 이 시대의 이런 모습들을 그대로 보여주는데 집중한다. 그래서 처칠과 그의 가족, 주변 사람들, 폭격을 이겨내고 승리의 발판을 마련하는 영국 국민들, 그 모습에 당황하는 히틀러와 괴링, 괴벨스, 그 와중에 벌어진 도저히 의미를 알 수 없는 루돌프 헤스의 영국행, 루스벨트의 결정적인 결심 등 100여 개에 달하는 짤막짤막한 장면들을 차근차근 따라가다보면, 700여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에도 불구하고 큰 어려움 없이 두툼한 책을 읽어낼 수 있게 된다.
전쟁의 트라우마를 진정시키는 가장 보편적인 처방은 단연 차였다. 차는 전쟁을 견딜 힘을 주었다. 사람들은 공습이 계속되는 중에도, 산산조각이 난 건물에서 시신을 찾다 잠깐 쉴 때도 차를 끓였다. 차는 1,000여 곳의 관측소에서 작전을 수행하며 영국 상공에 뜬 독일 항공기를 감시하는 3만 명의 관측요원들의 네트워크에도 힘을 불어넣었다. 관측소에는 예외없이 차와 주전자가 갖춰져 있었다. 휴대용 반합 뚜껑을 열면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차가 끝도 없이 나왔다. 선전영화에서 차를 끓이는 모습은 전쟁을 계속하겠다는 의지의 상징적 비유로 사용되었다. "차는 런던 생활에서 거의 마법 같은 비중을 획득했다."
- p. 272. 티타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