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스부르크, 세계를 지배하다 - 마틴 래디(까치) ●●●●●●○○○○
남들은 전쟁을 벌일 때 행복한 오스트리아는 결혼을 한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심장부는 운 좋게도 북부 이탈리아와 프랑스로 이어지는 여러 도로와 통행료 징수소를 아우르고 있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정치적 동맹의 측면에서도 운이 좋았다. 그러나 초창기에 합스부르크 가문의 권력이 강해진 데에는 혈통의 지속성도 한몫했다.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혈통을 파고든 연구자가 깨달았듯이, 합스부르크 가문 사람들은 생존자들이었다. 그들은 대대로 상속자를 낳았다. 아들이 없을 때면 사촌과 조카가 대를 이었다. 그렇게 끈질기게 대를 잇다보니 혼인관계를 맺은 가문의 대가 끊어질 때 그 재산을 차지할 기회가 생겼다. 이후 몇 세기를 거치는 동안에도 합스부르크 가문은 생물학적 행운과 또 다른 포틴브라스 효과의 순간을 만나게 되었다. 오스트리아의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생존이 전부인 때에 누가 승리를 이야기하는가?" 라고 물었다. 초창기의 합스부르크 가문이 승리할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생존이었다.
- p. 45. 합스부르크 성과 포틴브라스 효과.
. 내가 좋아하는 게임 중에 '크루세이더 킹즈'라는 게임이 있다. 중세 유럽을 배경으로 한 가문으로부터 시작해 영지를 늘려나가고 작위를 높여나가며 국가를 만들고 제국을 이루는 게임인데, 재미있는 점은 삼국지처럼 유저가 원한다고 해서 언제고 마음대로 전쟁을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전쟁을 벌이려면 종교가 다르거나, 상대와 혈연관계가 있거나 해서 상대의 영지나 국가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명분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유럽 한복판에서 시작한다면 당연히(!) 주변은 모두 가톨릭이기 때문에 종교적인 이유로 전쟁을 벌이긴 쉽지 않다.
. 결국 남은 건 혈연뿐이고, 이를 내세우기 위해선 상대의 영지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명분을 위조하거나 탐나는 영지를 가진 이의 딸과 결혼을 해서 지배자가 죽으면 영지를 이어받는 수밖에 없다. 당연히 쉬운 일은 아니다. 명분을 위조하려면 수십년이 걸리기도 하고, 기껏 결혼을 했더니 계승권을 가진 다른 자식이 있다면 승계를 위해 암살(!!)을 해야 할 수도 있다. 그래서 인터넷 상에서는 농담삼아 패륜게임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
막시밀리안이 스페인 왕실과 야기에우워 가문을 상대로 성공시킨 두 차례의 이중 결혼은 모두 도박이었다. 헨트의 카를이 훗날 카를 5세가 되어 말했듯이, 결혼 외교는 성과를 보장할 수 없기 때문에 불확실하고 위험했다. 그렇지만 나중에 드러났듯이, 막시밀리안의 도박은 성공했다. 그의 상속자들은 유럽 뿐 아니라 세계의 주인이 되었다. "남들은 전쟁을 벌일 때 행복한 오스트리아는 결혼을 한다"라는 17세기의 어느 낙서처럼 말이다.
- p. 109. 막시밀리안과 색깔로 분류된 왕들.
. 이 책의 초반부를 읽고 있자면 자연스레 크루세이더 킹즈를 떠올리게 된다. 보통 우리가 역사에서 합스부르크 가문을 접하는 건 그들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어 프랑스와 대립관계를 형성하고 오스만 투르크와 사투를 벌이는 16세기 전후에 가서다. 그전까지의 합스부르크는 그저 한 지역의 영주였다가 가문을 이어감에 따라 그 영토가 서서히 확장되기는 했지만, 15세기 말 막시밀리안이 통치자가 되기 전까지 역사의 중심에 설 만한 가문은 아니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막시밀리안 본인은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영 시원찮은 통치자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이전의 어떤 군주도 해내지 못한 위대한 업적의 '발판'을 쌓았다(엄밀히 말하면, 위대한 업적을 쌓은 것은 아니다. 발판을 쌓은 것이지) 결혼정책이 그것이다. 아들인 펠리페를 카스티야의 이사벨 - 콜럼버스를 후원한 그 이사벨 여왕이다 - 의 딸인 후아나와 결혼시켰고, 손자인 페르디난트를 헝가리 왕의 딸인 아나와 약혼시켰다. 그리고 그의 다음 대에 이르러, 에스파냐에서는 펠리페와 후아나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후사를 보지 못했고, 헝가리에서는 모하치 전투의 참패로 왕족이 몰살당하는 대참사가 벌어졌다. 단 한 세대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1526년 8월 29일 저녁, 헝가리 왕국군이 모하치 벌판에서 오스만 제국군과 싸웠고 두 시간도 채 되지 않아서 대패했다. 그 전투로 헝가리 왕국의 주요 유력자들 가운데 약 절반, 그리고 친히 분견대를 이끌고 싸움에 뛰어든 주교들과 대주교들 7명이 사망했다. 헝가리 왕국과 보헤미아 왕국의 어린 왕 러요시 2세는 싸움에서 패배하고 달아나다가 목숨을 잃었다. 러요시가 사망하자 합스부르크 가문에게는 헝가리 왕국과 보헤미아 왕국을 차지할 길이 열렸다. 슈트리겔의 초상화에서 왼쪽에 있는 소년, 즉 막시밀리안의 작은손자인 오스트리아의 페르디난트가 바로 러요시의 후계자였기 때문이다. 합스부르크 가문에게 그 순간은 "포틴브라스 효과"가 가장 크게 나타난 때였을 것이다. 훗날 페르디난트와 그의 후계자들은 헝가리와 보헤미아를 다스린 야기에우워 가문의 폐허 위에, 역사학자들이 합스부르크 제국으로 부르는 중앙 유럽의 거대한 영토 집합체를 만들게 되었다.
- p. 130. 헝가리와 보헤미아, 그리고 개신교의 도전.
. 그 결과 합스부르크의 영지였던 원래의 오스트리아에다 펠리페와 후아나의 아들인 카를이 에스파냐를 이어받고, 현지의 왕족이 몰살당한 헝가리에선 페르디난트가 통치권을 가지게 되면서 갑자기 유럽 한복판에 초 거대제국이 탄생하게 되었다. 거기다 때마침 코르테스와 피사로의 원정이 성공해 중남미까지 합스부르크의 손에 들어오면서 최초의 세계제국이라고 할만한 것이 만들어진다. 그 제국의 힘이 어느 정도였냐면, 서쪽에서는 프랑스와, 동쪽과 남쪽에서는 오스만투르크라는 양대 강대국을 상대로 동시전선을 펼친 상태에서 네덜란드의 반란을 진압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 전까지 전통적인 유럽의 패자였던 프랑스가 거대제국의 탄생에 위협을 느끼고, 온 유럽의 비난을 감수하면서 투르크와 군사동맹을 맺었음에도 별다른 성과를 거둘 수 없었을 정도로 합스부르크가 이룬 제국은 강대했다.
. 하지만 이렇게 유지되기엔 제국은 너무 컸고, 그 제국을 운영해야 할 후계자들은 너무 평범했다. 카를 5세의 시대가 끝나자 제국은 에스파냐와 오스트리아-헝가리로 갈라졌고, 또 그 다음 대에 이르러선 에스파냐는 평범한 2류국가로 전락했다. 그나마 오스트리아-헝가리 쪽은 레오폴드 2세와 마리아 테레지아 같은 유능한 군주들이 등장하며 한 때는 오스만투르크를 압도하고 프리드리히 2세가 이끄는 신흥강국 프로이센과 팽팽하게 맞서기도 했지만, 온 유럽을 휩쓴 나폴레옹을 상대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결국 프랑스에게 패배하며 신성로마제국은 막을 내리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역시도 1차대전의 패배 속에서 해체되면서 합스부르크의 길디 길었던 통치의 역사는 막을 내리게 된다.
. 500페이지에 달하는 이 책은 이러한 합스부르크 1천년의 이야기를 한 권에 담아낸다. 물론 이 책의 군주들 중에선 개개인을 다루는 것만으로도 이 책보다 두꺼운 책 한 권을 완성시킬 수 있을 걸출한 인물도 있기에 읽다보면 아쉬움이 남는 부분들도 있지만, 그와 반대로 그동안 거의 거론되지 않았던 인물들에 대해서도 공정하게 분량을 할애해서 역사 전체를 훑어나갈 수 있게 한 것은 이 책의 장점이다. 뭐니뭐니해도, 르네상스부터 시작해 대 투르크 전쟁, 30년 전쟁, 7년 전쟁, 나폴레옹 전쟁, 1차대전이 몽땅 한 권에 담겨있는데 읽지 않을 이유가. :)
1683년 9월 초순, 오스만 제국군의 지뢰가 폭발해 성벽의 일부분이 부서졌고, 복구할 수 없는 틈이 생겼다. 빈을 지키던 사람들은 끝이 임박했음을 깨닫고 성 슈테판 성당의 꼭대기에서 구원을 요청하는 조명탄을 쏘아올렸다. 9월 7일과 8일 사이의 밤에 도나우 강 연안의 칼렌베르크 산 쪽에서 응답의 조명탄 불꽃이 피어올랐다. 평소처럼 흰곰팡이가 생긴 가발을 쓰고 닳은 장화를 신은 로트링겐의 카를이 작센과 바이에른과 폴란드의 군대를 이끌고 돌아온 것이었다.
폴란드의 왕 얀 소비에스키는 자존심상 누군가의 조력자로 머물고 싶어하지 않았다. 1683년 9월 12일, 그는 동맹군을 직접 이끌고 칼렌베르크 산 아래에서 오스만 제국군을 격파했다. 소비에스키는 바르샤바에서 출발하여 빈에 도착하기까지 험난한 여정을 겪었다. 지도가 없었고, 적들을 상대할 싸움터의 지형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는 로트링겐의 카를에게 보낸 서신들 중 하나에서 이렇게 물었다. "거기 어떤 산들이 있소? 탁 트인 강이오? 어떤 강들이 있는지, 또 고개는 어디에 있는지?" 그러나 싸움이 결판나지 않은 채 저녁이 다가오자 소비에스키는 역사상 최대의 기병 돌격전으로 평가되는 작전을 지휘했다. 소비에스키 휘하의 폴란드 창기병들이 1만 8,000명 규모 기병대의 선두에 섰다. 그들의 갑옷 뒤쪽에는 독수리와 타조의 깃털로 만든 날개 모양의 장식이 달려 있었다.
- p. 250. 비정상 제국과 빈 전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