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널을 돌리다가 - 곽재식(열린책들) ●●●●●●●○○○
실패한 영화 속에서도 처음에는 뭔가 잘해보려는 야심을 지켜보는 것이 좋았다.
옛날 컴퓨터 게임 중에 이런 것이 있다. 주인공은 검과 마법을 이용해서 괴물들을 물리치고 마왕과 싸우는 모험을 한다. 이런 이야기는 당연히 우리가 사는 세상이 아닌 상상 속의 세상, 현실이 아닌 마법의 나라를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라고 받아들이게 된다. 그런데 결말에 이르면 사실 이 게임 속 세상은 상상 속의 마법 나라가 아니라 지금 인류의 문명이 멸망한 후 먼 미래의 지구였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괴물이라고 생각한 것은 미래 시대에 탄생한 유전자 조작 생명체 같은 것이고, 주인공이 사용하는 마법은 인류 문명이 멸망하기 전에 남겨 놓은 최첨단 과학 기술 장치의 위력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 p. 49. 반전의 기술.
. 'Mysteria'라는 잡지가 있다. 문학동네의 장르소설 브랜드인 엘릭시르에서 출간하는 잡지인데, 매 회마다 특별 기획 기사가 있고(애거서 크리스티, 요네자와 호노부 등 작가를 집중 탐구하는 기사도 있고, 일제시대부터 60, 70, 80, 세기말에 이르는 시대 탐구 기사도 있다) 그 외에 추리소설이나 영화 리뷰, 작가 인터뷰, 추리소설의 역사, 음식, 미궁에 빠진 사건 등 이런저런 기사와 창작물로 구성된 추리잡지이다. 두 달에 한 번씩 나오는 격월간지인데 최근에 본 게 42권이니, 대략 7년 정도를 꼬박꼬박 따라온 셈이다.
. 곽재식 작가를 알게 된 게 이 미스테리아였다. 그는 미스테리아에서 보통 해방정국이나 6.25 전후의 혼란기에 일어난 사건들에 대한 추적기사를 쓰거나 그 시대를 배경으로 한 추리소설을 기고하는데, 그래서 나는 당연히 곽재식 작가가 역사학자거나 그 쪽과 관련된 공부를 하는 분이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론화학을 전공하고 지금은 환경공학 분야에서 강의를 하며, 그와 함께 소설과 교양서를 쓰고 다수의 매체에 기고를 하며, 팟캐스트와 라디오와 TV를 넘나드는 방송인이기도 하다. 현대사회(?)에 꼭 맞는 다재다능한 인간형인 셈이다.
나는 실패한 영화 속에서도 처음에는 뭔가 잘해보려고 했던 야심을 지켜보는 것이 좋았다. 그리고 그게 어쩌다 실패했는지, 그 과정을 살펴보고 추측하는 데 관심이 있었다. '이 영화는 이런 장면을 찍어보려고 출발했지만 예산이 부족해서 대충 찍다 보니까 엉성해져서 망했구나.' 그런 추측을 하면서 못 만든 영화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 괴상한 결과물 사이에서 엿보이는 노력이라든가, 애환을 지켜보는 것이 좋았다. 그러다 참신한 것을 만들어보겠다는 발상과 실패해서 잘못 돌아가는 현실이 뒤엉켜 전혀 상상하기 힘든 엉뚱하고 황당한 장면이 튀어나올 때가 가끔 있었다. 그런 장면을 발견하게 되면 정말로 즐거웠다.
- p. 202. 실패한 영화를 보는 이유.
. 그런 곽재식 작가의 또 다른 관심분야 중 하나가 영화다. 막 대학에 입학했던 그는 그 때부터 20년간 영화 리뷰를 꾸준히 써왔고 특히 SF물과 고전 영화에 관심이 많았다고 하는데, 이 책은 그 분야의 글들을 묶어낸 책이다. 일단은 'SF 보는 법, 읽는 법, 만드는 법'이라는 부제가 붙어있기는 하지만, 다양한 내용의 영화를 주제별로 소개하면서 중간중간 '영화에 나오는 가장 큰 괴물'이나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영화 속 과학상식'에 대한 꼭지글이 실려있기도 하고, 저자가 꼽는 가장 잘 만들어진 영화와 그 반대로 가장 압도적인 망작을 소개하는 등 어디까지나 즐겁게 볼 수 있는 에세이다. 물론, 당연히, 압도적인 망작을 소개하는 글이 훨씬 재미있었고. :) 그렇게 책을 읽다보면, SF 불모지라는 한국에서 실제로는 SF가 우리에게 정말 친숙한 장르라는 걸 알게 되고, 자연히 몇 년 전 모 감독의 한국에선 SF가 낯선 장르라 흥행이 어렵다고 한 게 얼마나 구차한 핑계(....) 였는지도 알게 된다.
투명인간은 괜히 오징어를 집어서 흔든다. 사채업자들이 보기에는 오징어가 허공에서 혼자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이 정도면 놀라서 소리라도 흔들 것 같은데, 이 영화는 그렇게 평범하게 진행되지 않는다.
투명인간은 오징어를 그냥 허공에서 흔드는 것이 아니라 점차 리듬감 있게 흔든다. 그러자 마른 오징어는 혼자서 춤을 추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 된다. 곧 그것을 구경하던 사채업자들은 놀라지도 않고 흥에 겨운지 몸을 들썩거린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한다.
'자- 잣 - 자아- 잣- 자잣.'
너무나 상상하기 어렵겠지만, 이것은 마른 오징어의 춤에 맞춰 사채업자들이 콧노래를 부르듯이 흥얼거리는 소리이다. 허공에서 춤추는 마른 오징어에 맞춰 사채업자들이 흥얼거리는 소리 같은 것을 세상의 어떤 영화에서 볼 수 있을 거라고 상상해 본 적이 있는가? 나는 없었다. 앞으로도 없을 것 같다.
- p. 203. 실패한 영화를 보는 이유.
. 저자가 말하는 것처럼, SF 소설이 한국에서 큰 인기를 끌지 못한 것과 달리 영화로서의 SF는 우리에게 정말 익숙하고 인기가 많은 장르다. 가장 최근의 마블 시리즈부터 많은 이들이 어린 시절 봤을 백투더퓨처와 터미네이터, 아바타, 그래비티, 인터스텔라 등 수많은 SF 영화가 한국에서 대흥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SF라고 하면 왠지 모르게 거리감부터 느껴지는 건, 흔히 SF라고 하면 스타트렉이나 스타워즈 같은 '스페이스 오페라' 류의 영화를 "정통"이라고 생각해버리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같은 맥락에서 서브컬쳐를 즐기는 이들이 가지고 있는 '진정한 OOO' 운운하는 힙스터 감성도 어느 정도 진입장벽이 되었을테고. 그런 점에서 이 책은 SF에 대한 틀에 박힌 생각을 떨쳐내고, 실제로는 우린 정말 어린시절부터 '즐겁게' SF를 봐왔구나 하는 걸 새삼 깨닫게 해준다.
p.s. 이영하 씨가 주연한 '투명인간'은 꼭 한 번 봐야겠다. :)
하는 일 없이 시간을 보내고 싶으면 그냥 TV 앞에 앉아서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게 된다. 그러다 방송국에서 방영해주는 영화가 있으면 그냥 그것을 보게 된다. 시간을 때울 방법이 아무것도 없어서 그냥 TV를 켜놓고 방송 중인 영화를 뭐가 되었든 보게 될 때도 있고, 채널을 돌리다가 잠깐 영화 장면을 보았는데 고작 1, 2초의 장면 때문에 호기심이 생겨서 그대로 영화를 끝까지 보게 되는 일도 있다.
이런 식으로 영화와 만나게 되면 의외로 내가 좋아하지 않는 영화라도 그냥 볼 때가 생긴다. (중략) 그러다 그때까지는 모르던 색다른 재미에 빠지기도 한다. 관심이 없던 주제나 소재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기도 하고, 그때껏 나 스스로도 깨닫지 못했던 것 중에서 좋아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기도 한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만 본다면 그 세상만 계속 알면서 지낼 텐데, 볼 게 없어서 이것저것 기웃거리는 가운데 내가 미처 모르던 더 넓은 세상, 다른 사람이 좋아하는 것, 여러 가지 생각을 접할 기회가 생긴다.
- p. 164. SF를 가장 재미있게 보는 방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