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엔딩 크레딧 - 안도 유스케(북스피어) ●●●●●●◐○○○
"나를 위해서야. 나를 위해서 일해도 괜찮은거야."
"바로 그거야."
노즈에는 갑자기 맨 정신을 찾은 표정으로, 혹은 망령이 떨어져나간 것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나를 위해서야. 나를 위해서 일해도 괜찮은 거야. 방금 당신이 말한 다양한 이유 하나하나도 결국은 자기를 위하는 거야."
뜻밖에도 노즈에의 동의를 받자 우라모토는 새삼 실감했다. 일이란 고객을 위해, 가족을 위해, 다른 누군가를 위해 하는 것이고 나를 위함은 아니라고 믿어왔다. 마음 속 어디선가 나를 위해서와 남을 위해서는 양립할 수 없으며, 남을 위해서는 나를 어느 정도 희생해야 한다는 전제를 깔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틀렸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것, 혹은 뭔가에 도움이 되는 것은 나의 행복으로 연결된다. 나를 위해서 일해도 되는 것이다.
- p. 410.
. 이 책의 후기에도 실려있듯, 출판사도 아니고 책을 인쇄하는 회사를 메인으로 하는 작품은 이 '책의 엔딩 크레딧'이 처음이 아닌가 싶다. 독자들에게 새로운 이야기를 선보이기 위한 작가들의 소재찾기가 이토록 처절한거구나 싶으면서도, 읽고 나면 책을 좋아한다고 이야기하면서 정작 책의 한 축을 담당하는 인쇄소에 대해서는 이토록 무지하고 무심했구나 싶어 뜨끔하게 된다.
. 사실 나 역시도 인쇄라는 건 어디까지나 '기술적 작업'일 뿐이고, 중세의 수도원을 배경으로 한 필사나 르네상스의 활자 제작 등 역사적인 이야기가 아닌 바에야 그게 이야기가 될만한가 생각했지만, 저자는 그런 독자들을 대상으로 이야기의 시작부터 '인쇄 회사가 하는 일은 주어진 내용을 인쇄하고 복제하는 것만은 아니다. 이야기에 '책'이라는 몸을 부여하고 어울리는 옷을 입혀서 세상에 내보내는 것이다.' 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인쇄회사의 출판물 영업사원(다시 말하지만, 출판사의 영업사원이 아니다!)이라는 낯선 직업을 가진 주인공의 에피소드들을 통해 인쇄회사는 책을 만드는 작업자일 뿐만 아니라 책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작가와 편집자와 함께 논의하고 결정을 내리는 대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 과정에서 주인공인 우라모토는 출판사와 출간 날짜를 놓고 줄다리기를 벌이기도 하고, 책의 홍보를 위해 인쇄회사 자체적으로 '프루프'라 불리는 인쇄책자를 만들기도 한다.
. 그렇다고 이 소설이 흔히 볼 수 있는 "타성에 젖은 인쇄회사에 패기있는 신입 우라모토가 새 바람을 불러 일으키는" 류의 기업활극은 아니다. 급지부터 잉크 배합, 인쇄에 이르기까지 인쇄공장의 수십년 된 전문가들은 주인공의 뜬구름 잡는 제안을 캐치해 현실화시킬 수 있는 초베테랑들이고, 그런 모두가 함께 모여 책 한 권 한 권을 만들어나가는 이야기다. 그런 한편으로는 인물들의 입을 빌어 책읽는 인구가 저하되는 현상이나 전자책으로 인해 위기에 빠진 인쇄업의 상황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보통의 직장인들처럼 헤드헌팅을 놓고 고민하는 장면도 있다. 그럼에도 이런 책이 으레 그렇듯 훈훈함을 잃지는 않지만. :)
나는 역시 인쇄 회사는 모노즈쿠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아. 하지만 더 나은 책을 세상에 내보내기 위해 일하고 싶은 마음은 당신과 똑같지.
그 바람을 이루는 데 특히 중요한 요소는 아마 몇 가지 안 될 것이고, 매우 단순한 것들이라고 생각해.
1) 매일 하는 업무를 실수 없이 끝내는 것.
이걸 못하면 우리는 책을 세상에 내보내는 일을 의뢰받지 못하게 돼. 가장 당연하고 가장 어려운 일이지. 이번 '책의 보물상자'는 작가와 편집자, 그리고 우라모토 씨의 의욕만 앞서고 있어 매우 위험해 보여. 할 수 없는 일을 섣불리 받아들이거나 제안하는 행동은 훗날 신뢰 실추로 이어지게 마련이야. 신뢰는 쌓기 어렵고 잃기는 쉽지. 인쇄 영업은 거래처의 요구를 접수하는 최전선의 창구이자 무리한 요구를 막는 최후의 보루이기도 해. 가령 디자이너가 할 수 있다고 하는 일이라도 영업의 입장에서 '못 하겠다'고 말해야 할 때도 있어. 한 발 뒤로 물러선 시각으로 전체를 조망하는 것도 인쇄 영업맨의 역할이 아닐까.
- p. 400.
. 그렇게 이야기는 인쇄회사라는 낯선 무대를 소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일과 직장에 대한 메시지로 끝을 매는다. 일을 통해 자신이 품었던 꿈을 실현하는 주인공 같은 인물도 있지만, '먹고 살기 위해서', '어쩌다보니' 일을 시작해 딱히 그만 둘 이유를 찾지 못한 채 계속 일하게 된 노즈에 같은 인물들도 있다. 하지만 저자는 그게 어떤 이유든, 어떤 모습이든 그들이 쌓아온 시간은 헛되지 않았다고 이야기한다. 그들이 쌓아온 시간은 그들을 전문가로 만들고, 그들은 그 과정에서 처음에는 찾지 못했던 일의 의미를 찾게 된다. 개인적인 얘기지만 나 역시도 일 그 자체보다는 마음 편하게 꾸준히 책을 읽을 수 있는 일을 찾은 경우고, 단순한 호불호나 그때그때의 보람 정도면 모를까 딱히 일의 의미나 사명감 같은 걸 생각하면서 일하지는 않기 때문에, 과연 그럴까 싶으면서도 은근히 격려를 받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흥미로운 건이라고 생각해. 나도 담당이었으면 해 보고 싶었을 거다. 하지만 흥미롭다는 점이 전부라면 영업부를 총괄하는 사람으로서 받아들일 수 없어."
모리 부장은 "생각을 좀 해 봐" 하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직속 상사란 사람을 상대할 때는 말이지, 능숙하게 부려먹으란 말이야.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높은 양반을 설득할 자료를 내 손에 들려 주고 올라가서 싸우라고 부추기란 말이야."
- p. 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