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의 여행법 - 무라카미 하루키(문학사상사) ●●●●●●●●◐○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맛이 없지러"
하지만 사육사가 데리고 나온 '호랑이 새끼'를 보고 나는 몹시 당황했다.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덩치가 컸던 것이다. 나는 기껏해야 좀 큼직한 고양이 정도나 될 거라고 상상하며 안심하고 있었는데, 영락없이 호랑이였다. 팔도 내 팔보다도 훨씬 굵었다. 이빨도 모두 제대로 돋아 있어서 행여 물기라도 하면 커다란 구멍이 뚫릴 것 같았다.
'어이, 정말로 저걸 안아 볼 거야?' 하고 생각했지만 나 자신이 먼저 말을 꺼낸 일이니 지금 와서 못하겠다고 말할 수는 없다. 사육사에게 "물지 않습니까" 하고 물어봤지만 "괜찮아요, 걱정 없습니다" 하고 말할 뿐이었다. 하지만 나의 짧은 체류 경험으로 미루어봐도 중국인의 "괜찮아요, 걱정없습니다" 라는 말은 몹시 걱정해야 될 정도의 말이다.
실제로 내가 안자마자 호랑이는 아니나다를까 목을 뒤로 돌려 나를 물려고 했다. '중국까지 와서 호랑이에게 물릴 수는 없지' 하고 생각하면서 필사적으로 힘을 주어 버둥거리는 호랑이를 끌어 안고 사진을 찍었다.
- p. 135. 노몬한의 철의 묘지.
. 내 숨겨진 취미 중 하나가 '하루 종일 도심을 걷는 것'이다.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딱히 올릴만한 거리가 없기 때문에 SNS에 올리지 않았을 뿐 숨긴 건 아니고 - 딱히 숨길만한 사람도 없다(....), 1년에 몇 번 정도 하는 걸 가지고 딱히 취미라고 할 수 있나 싶긴 하지만 어쨌든 그렇다. 아무래도 날씨가 좋을 때, 서늘하거나 약간 쌀쌀하지만 햇볕이 따뜻한 날 중 하루, 길면 이틀 정도의 일정을 잡는다. 그리고 하루에 20km, 이틀이면 40km 정도를 걸을 수 있는 버스나 지하철 노선을 고른다. 그리고 회차지에서 출발해 정류장을 따라 걷는다. 그다지 스파르타 식으로 하는 건 아니라서 중간에 밥도 먹고, 커피도 마시고, 미술관이나 박물관이 있으면 들어가서 구경을 하기도 한다. 가끔 이런 얘기를 주변에 하면 관심을 보이면서 함께 해보자는 친구도 있고 그러면 보통 초심자(?)가 접근하기 쉽고 볼거리가 많은 2호선이나 3호선을 따라 걷는데, 아쉽게도 아직까지 좋았다고, 다시 하자고 하는 경우는 없었다(....) 왜 이런 취미가 생겼을까 생각해보면, 역시나 이 책 때문인 것 같다.
. 이 책은 하루키가 미국에 체류하던 91년부터 일본으로 돌아온 97년까지 6년여 동안 하루키가 했던 일곱 번의 여행을 다루고 있다. 미국에 체류하고 있던 기간 중에 방문한 이스트햄프턴, 일본에 잠깐 돌아왔을 때 가봤던 무인도 '무라카미 섬', 멕시코와 몽골, 미국 횡단기, 그리고 일본으로 돌아온 후 했던 사누키 우동 기행과 고향인 고베를 걸었던 내용이 들어있다. 유쾌한 장면이 많은 하루키의 에세이 중에서도 '먼 북소리'나 '하루키 일상의 여백'과 함께 웃기기로는 세 손가락 안에 꼽히지 않을까 싶고(특히 사누키 우동기행 부분은 정말 웃기다!) 그러면서도 멕시코나 노몬한을 다룬 부분처럼 여행, 삶, 글, 역사에 대한 진지한 이야기도 함께 실려 있다. 특히 노몬한 전쟁에 대한 부분은 당시로서는 거의 접할 방법이 없는 이야기였기 때문에 상당히 흥미로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루키가 개인에서 사회로 넘어가는 계기 중 하나를 읽을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지금도 책상에 앉아 이렇게 글을 쓰고 있자니, 라라인사르 마을에서 돈 5백 페소가 모자란다는 내 얼굴을 언제까지고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장사를 하던 예쁜 여자아이의 눈이 떠오른다. 그 때 그 아이의 눈빛에는 뭔가 내 마음을 뒤흔들어 놓는 것이 있었다. 5백 페소(약 20엔)의 돈을 에워싸고 우리는 긴 시간 동안 꼼짝 않고 상대방의 눈을 들여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겨우 20엔 때문에 그랬느냐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고, 나 자신도 그땐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하는 수 없잖아. 안됐지만 지금 호주머니엔 이것밖에 없어." 하고. 하지만 물론 돈 문제만은 아니다. 그것은 나와 그 여자아이 사이의 의사 소통 문제이며, 이심전심의 문제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 p. 103. 멕시코 대여행.
유타 주는 풍경이 아름답고 풍토도 흥미 깊은 곳이었지만, 주 경계를 넘어서서 애리조나 주로 들어가 사막 한가운데에 있는 후진 마을의 후진 바에서 차가운 버드와이저 맥주를 주문해 꿀꺽꿀꺽 단숨에 들이켰을 때는 정말 살 것 같았다.
그 순간 이 빌어먹을 세계의 피하려고 해도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내 몸에 조금씩조금씩 스며들어왔다. 리얼하게, 차갑게, 음, 세상에는 이런 맛이 있어야지 하고 생각했다.
- p. 197. 아메리카 대륙을 가로질러.
. 다시 걷기 이야기로 돌아와서. 이 책을 읽을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내겐 하루키가 고향인 고베를 걷는 이야기가 가장 인상깊었고, 그래서 마음껏 시간을 쓸 수 있는 대학생이 되자마자 남들이 외국에 나가고 전국일주를 할 때 그 대신 도심을 걷기 시작했다. 물론 지금이야 그렇지 않지만, 그 때만 해도 대학교 1-2학년 때 공부를 하는 건 별종이라고 다들 생각했기 때문에(....) 덕분에 그 땐 시간은 정말 많고 많았고, 돈 하나 없어도 시간을 쓰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기 마련이니까. :) 그래서 아직은 너무 먼 일이긴 하지만, 다시 시간이 남아도는 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모처럼 여기 온 김에, 약간 땀을 흘리면서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가 예전에 다녔던 고등학교까지 걸어가 보았다. 학생 시절에는 언제나 만원버스를 타고 다니던 그 길을 천천히 걸어갔다. 산의 경사면을 평평하게 해서 만든 넓은 운동장에서는 여학생들이 체육시간인 듯 핸드볼을 하고 있었다. 주위는 쥐죽은 듯이 고요해서, 이따금 여학생들의 구령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너무도 고요해서, 어떤 계기로 잘못된 공간 안에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어째서 이렇게 조용할까?
눈 아래로 까마득히 푸르게 빛나는 고베 항을 내려다보면서, 먼 옛날의 산울림이 들려오지 않을까 하고 바짝 귀를 기울여보았다. 그러나 내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폴 사이먼의 옛날 노래 가사를 빌린다면, 거기서는 다만 '침묵의 울림'이 들려올 뿐이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아무튼 모든 것은 흘러가 버린 30년 전의 이야기니까.
30년 전의 이야기 - 그렇다. 나는 한 가지만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인간은 나이가 들면 그만큼 자꾸만 고독해져 간다. 모두가 그렇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은 잘못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인생은 고독에 익숙해지기 위한 하나의 연속된 과정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구태여 불만을 토로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불만을 털어놓더라도 도대체 누구를 향해 털어놓을 수 있단 말인가.
- p. 216. 고베까지의 도보여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