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꺾인 신념, 스러진 목숨, 묻혀진 진실

어둠 속의 사건 - 오노레 드 발자크(민음사) ●●●●●○○○○○

by 눈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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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피고에게는 유리한 확신의 기초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납치한 두 사람은 나의 눈에 천을 감았던 사람 뒤 말 잔등에 나를 실었는데, 그의 머리칼은 피고 미쉬의 머리칼과 같은 갈색이었습니다. 나의 관찰이 이상해 보인다 할지라도, 이 이야기는 꼭 해야겠는데, 그것이 피고에게는 유리한 확신의 기초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피고가 기분 상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의 등 뒤에 매달려 있는 나는 말이 빠르게 달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의 체취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미쉬 특유의 체취는 전혀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세 차례에 걸쳐 나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 준 사람에 관해서는, 그 사람이 미쉬의 아내인 마르트라고 확신합니다. 처음에 왔을 때, 나는 드 생시뉴 양이 그녀에게 주었고 그녀가 빼낼 생각을 하지 않았던 반지를 그녀의 손에서 알아보았습니다. 이런 사실에서 마주하는 모순들, 아직도 저 스스로 납득할 수 없는 이런 모순들을 법과 배심원 여러분께서 판별해 주시기를 앙청하는 바입니다."

- p. 288. 제정 하의 정치 재판.





. 내가 좋아하는 만화 중에 '베르사유의 장미'와 '오르페우스의 창'의 작가인 이케다 리요코 여사가 그린 '에로이카'라는 만화가 있다. 나폴레옹을 주인공으로 하여 그의 청년 시절에서부터 시작해 승승장구 끝에 황제가 되었다가 결국엔 몰락하는 일대기를 그린 내용이다. 그러고보면 에로이카라는 제목은 나폴레옹에 열광했던 베토벤이 '보나파르트'라는 교향곡을 만들어 헌정하려 했다가 나폴레옹이 권력욕에 눈이 멀어 황제가 된 것에 실망하여 헌정을 취소하고 바꾼 곡명이니, 만화의 내용과도 잘 어울리는 제목이다.


. 발자크의 이 소설은 만화 에로이카와 같은 시대를 다루고 있다. 나폴레옹이 이탈리아 전역에서의 승리와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를 거쳐 절대권력을 잡았지만 아직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 전이었던 1800년. 비록 대다수의 프랑스 국민은 나폴레옹에게 열광하고 있었지만 양 극단에 있는 소수 공화파와 왕당파는 똑같이 그를 찬탈자로 여기고(물론 찬탈당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반대였지만) 나폴레옹을 제거하고자 했다. 그에 맞서 나폴레옹 측도 이런저런 음모를 꾸며 공화파들을 대거 중남미로 유배보내기도 하고, 왕당파들이 지지하던 부르봉 왕가의 앙기앵 공을 납치해 처형하기도 했다. 피가 피를 부르고 상대를 괴물이라 부르며 그 과정에서 자신 역시도 괴물이 되어가던 시절. 나폴레옹의 가장 잘 벼려진 칼이었지만 나폴레옹조차도 안심하고 대할 수 없던 이가 있었다. 경찰부 장관 조지프 푸셰였다.


. 수도사이자 신학교의 교사였다가 신에 등을 돌렸고 로비스피에르와 나폴레옹과 루이 18세를 상대로 손을 잡고 뿌리치기를 반복하며 그 과정에서 자신 역시도 배신당하고 배신하기를 반복했던 푸셰. 그는 혁명의 혼란기 속에서 정보와 음모의 힘을 깨달았고, 총재정부 시대부터 나폴레옹 시대에 이르는 기간 내내 경찰력을 장악하고 권력을 휘둘렀다. 그는 적의 음모를 분쇄하여 신임을 얻는 것은 물론, 없는 음모를 만들어 내어 신임을 얻는 것에도 능한 인물이었다.



. 발자크의 이 책은 역사에 기록된 푸셰의 음모인 상원의원 납치사건을 토대로 만들어진 소설이다. 이제는 얼마남지 않은 왕당파들이 명맥을 이어가던 어느 지방에서 상원의원이 납치되는 일이 발생하고, 당연히 의심은 지역에 남아있던 왕당파 잔당들에게 쏠린다. 재판이 그들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는 가운데 갑자기 상원의원이 발견된다. 상원의원은 그동안 알 수 없는 누군가에게 납치되어 있었다면서, 그 지역의 극렬 왕당파인 영지 관리인 미쉬의 아내가 감금된 자신에게 먹을 걸 주었다고 밝히면서도 자신을 납치한 자가 미쉬와 비슷하긴 해도 미쉬는 아니라고 진술한다. 그의 진술 때문에 사건은 한동안 미궁에 빠지지만, 결국엔 왕당파들이 벌인 반역사건으로 결론나며 왕당파들은 모두 사형을 선고받는다. 비록 그들 중 일부는 목숨을 구걸하고 나폴레옹에게 충성을 맹세하면서 목숨을 얼마간 더 연장하기는 하지만, 그렇게 신념을 꺾고 구한 목숨이 무색하게도 그들은 얼마 후 벌어진 전쟁에서 모두 전사하고 만다. 그렇게 신념은 꺾이고, 목숨은 사라지고, 진실은 묻히고 만다. 진실이 밝혀진 것은 나폴레옹도, 푸셰도 모두 몰락하거나 죽은 몇십 년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 발자크는 이렇게 아이러니와 씁쓸함으로 가득 찬 이야기를 묵묵히 써내려간다.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을 읽고 나서 발자크의 '고리오 영감'이 참 건조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이 소설을 읽고 보니 고리오 영감은 피끓는 활극처럼 느껴진다(....) 권력에, 체제에, 그리고 운명에 짓눌려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한 채 허무하게 죽어가는 이들이 있고, 기껏해야 앞으로 10여년이면 사라질 권력을 위해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그들을 발판으로 쓰고 버리는 이들이 있다. 발자크는 그런 인간 군상들을, 그들의 모습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으로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 목소리는 그의 작품이 늘 그렇듯 더없이 건조하지만, 그래서인지 더 또렷하게 들린다.



p.s. 이 책이 쓰여진 연도가 1841년(이 해에 바다 건너편에서는 에드거 앨런 포가 '모르그 가의 살인'을 발표한다)인데, 책의 법정 장면에서 추리요소가 명확하게 드러나 있는 게 인상적이다. 그동안 뒤팽과 홈즈 사이에 있는 이야기들을 이것저것 읽었는데, 비록 전체 분량에 비해선 극히 일부에 불과하긴 해도 수수께끼와 해결이 세련되게 제시되었다는 점에선 그런 소설들 중 가장 '추리소설답다'고 말할만한 소설이었다.





나폴레옹이 치워진 식탁 앞 조잡한 의자 위에 연기나는 생나무 모닥불을 마주하고 앉아 있었다. 진흙투성이인 그의 장화는 그가 들판을 누비고 다녔음을 말해 주었다. 그는 그 유명한 프록코트를 벗고 있어서, 적색 대훈장이 가로 걸쳐져 있고 캐시미어 바지와 조끼의 흰색 안감을 두드러져 보이게 하는 익히 알려진 군복이 창백하고 냉정한 황제다운 얼굴을 찬탄할만하게 부각해 주었다. 그는 그의 무릎 위에 접힌 지도에 손을 얹고 있었다. 옆에는 베르티에가 제국 부사령관의 빛나는 복장을 하고 기립해 있고, 시종인 콩스탕은 황제에게 커피를 쟁반에 받쳐 올리고 있었다.

- p. 307. 제정 하의 정치재판.


어느 날 저녁 드 카디냥 대공 부인은 데스파르 후작 부인과 총리인 드 마르세를 자기 집에 맞아들였다. 다음 해에 마르세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그녀는 그날 저녁 옛 애인을 마지막으로 만난 셈이었다. 마르세 내각의 정무차관인 라스티냐크, 대사 두 명, 귀족원에 남아 있던 유명한 두 웅변가, 노 공작들인 드 르농쿠르와 드 나바랭, 드 방드네스 백작과 그의 젊은 부인, 그리고 다르테즈가 그 자리에 있었다.

- p. 320. 결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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