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매미 - 기타무라 가오루(한스미디어) ●●●●●●●◐○○
"그런 말을 태연하게 할 수 있는 것은 당신이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제가 슈크림을 좋아하거든요."
"여자들은 대개 좋아하지요. 슈크림과 치즈케이크를."
"저도 여자예요. 이걸로 증명된거죠?"
"그렇다고 합시다." 인정해주었다.
"더운 여름에 냉장고에 넣어뒀다가 먹으면 입안에서 차갑게 퍼지는 크림이 정말 예술이에요."
"맛있을 것 같군요."
"하지만 맥주 안주로는 별로예요." 엔시 씨는 빙긋 웃었다.
"그런 말을 태연하게 할 수 있는 것은 당신이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 p. 125. 6월의 신부.
. '일상 미스테리'라는 장르가 있다. 요네자와 호노부의 '고전부'나 '소시민' 시리즈나, 가노 도모코, 와카타케 나나미의 초기 작품군이 여기에 속하는데, 중대한 범죄라기보단 일상에서 벌어지는 소소한 수수께끼(종종 범죄도 있다. 가끔. ^^;)들을 풀어내는 소설들이다. 그렇다보니 범죄만큼이나 일상에서의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부분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 특이한 직업에 대해 설명하거나 인물들간에 깨알 같은 유머를 나누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이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게 음식 묘사고. 덕분에 이런 일상 미스테리들은 색다른 미스테리를 읽고 싶었던 추리 독자들과 아기자기한 이야기를 읽고 싶었던 젊은 독자들 양쪽을 고루 잡았고, 지금은 추리소설과 아기자기하고 가벼운 소설 양쪽 장르에서 상당히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보자, 달걀이라....
시금치가 있으면 자신 있는 파피요트로 갈 테고, 토스트에 곁들이는 것이라면 수란이 좋을 것이다. 특히 후자는 만드는 과정 자체가 즐겁다. 팔팔 끓는 식초 물에 달걀을 톡 깨트려, 손을 요리조리 놀려가며 몽실몽실 퍼지는 흰자위로 노른자위를 감싸는 그 작업이 나는 참 좋다.
- p. 153. 6월의 신부.
. 다만, 이런 일상 미스테리들은 대부분 일상보다는 미스테리 쪽에 치우쳐져 있긴 하다. 물론 원래 미스테리라는 장르에서 나온 것이니만큼 이걸 한계라고 하거나 아쉽다고 하는 건 좀 조심스러운 얘기긴 하지만, 일상 미스테리 속의 이상은 어디까지나 미스테리를 위한 복선이거나 도구에 불과하다. 묘사되는 일상들은 사건을 푸는 힌트 정도에 불과하고, '메인 요리'인 미스테리에 곁들여지는 '양념' 정도일 뿐이다. 아무래도 추리소설의 경우는 '트릭'이라는 진입장벽이 너무 높다보니, 트릭이 우선이 되고 그 이후에 글이 있을 수밖에 없어서 그런 게 아닐까.
. 그런 점에서 기타무라 가오루의 데뷔작인 '하늘을 나는 말'로부터 시작되는 이 '엔시 씨와 나' 시리즈는 미스테리와 독립되는 진짜 '일상'이 존재하는 몇 안되는 일상 미스테리이다. 라쿠고 예인인 '엔시 씨'와 그의 팬인 '나'는 전작 하늘을 나는 말의 첫 단편에서 '나'를 가르치는 학교 교수의 추억에 얽힌 수수께끼를 해결하면서 만나게 되었고, 이어지는 여섯 권의 시리즈에서 이런저런 수수께끼들을 풀어간다. 여기까지만이라면 다른 추리소설과 마찬가지겠지만, 기타무라 가오루의 이 시리즈가 이채로운 건 미스테리만큼이나 일상이 중시된다는 점이다. 사건과 관계없는 주인공의 일상이 공들여 이야기되고 있고, 미스테리는 이런저런 일상의 이야기들이 한껏 풀려나온 후 그 어느 하나에 연관되어 살짝 제시된다. 때로는 수수께끼가 풀린 후에도 한동안 일상의 이야기가 이어지기도 하고.
. 두 번째 중편집인 이번 '밤의 매미'에선 하늘을 나는 말에서 보여줬던 이런 저자의 능수능란하고, 때로는 능청스럽게까지 보이는 이야기가 계속되고 있다. 기타무라 가오루는 주인공인 '나'와 친구가 라쿠고를 보는 장면을 상세하게 묘사하기 위해 챕터 하나를 통째로 할애하기도 하고, 그 앞뒤로 잠깐 만난 친구의 선배에 대한 주인공의 마음을 드문드문 섞기도 하고, 슈크림과 맥주의 페어링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물론(?) 이 이야기들은 미스테리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심지어 사건의 진상이 밝혀진 다음에도 언니의 짠한 마음에 감동하느라 진상은 저만큼 뒤로 밀려나기도 한다. 보통의 일상 미스테리가 일상 '미스테리'라면, 이 소설은 '일상' '미스테리'거나 아예 '일상' 미스테리인 셈이다. 그러니 수수께끼 풀이가 아닌 '이야기' 그 자체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꼭 읽어볼만한 책이다. 추리소설에 익숙한 독자라면 미스테리가 뚜렷하게 제시되어 있는 '6월의 신부'부터 읽는 게 좋을테고, 일반 소설에 익숙한 독자라면 느긋하게 언니와 주인공의 감정선을 따라갈 수 있는 '밤의 매미'부터 읽기를 추천. 어느 쪽이든 '으스름달밤'은 조금(금세), 익숙해진 다음에. :)
나는 밖으로 나왔다.
마당에는 뿌리부터 세 갈래로 갈라진 단풍나무가 있었다. 올려다보니 가지 끝에는 아직 오후의 빛이 포근하게 걸려 있었다. 빨강 노랑 시그널 같은 작은 잎이 슬라이드 영화를 보는 것처럼 해사했다.
별장 뒤로 돌아가서 거기서부터 이어지는 잡목림의 길 아닌 길을 낙엽을 밟으며 걸었다. 발을 내딛을 때마다 발밑에서 바스락 소리가 났다.
자작나무 숲을 빠져나가자 갑자기 시야가 트이고 넓디넓은 억새밭이 나왔다. 뽀얀 이삭이 꿈결처럼 까마득히 넘실거렸다. 그 끝에는 낙엽송 군락이 보이고, 뒤로 묵직한 산이 안정감 있게 자리해 있었다.
아사마 산이었다. 정상 부근에 솜사탕을 떼어 얹은 듯이 작은 구름이 걸려 있었다.
팔짱을 끼고, 다리를 가지런히 모으고, 나는 한동안 눈앞에 펼쳐진 장대한 풍경을 감상했다.
뺨을 간질이고 바람이 지나갔다. 억새풀이 일렁였고, 숲이 바스락 소리를 냈다.
해가 빠르게 완만한 산등성이 너머로 가라앉자 땅거미가 내렸다. 그리고 산 저편만이 마치 신이 사는 별세계처럼 밝게 빛났다.
공기는 낙조와 함께 한층 쌀쌀하게 내 몸을 감쌌다.
아사마 산은 포돗빛으로 점점 물들었고, 걸쳐 쓴 구름 모자는 멋스러운 연분홍색으로 변해갔다.
- p. 152. 6월의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