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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년 전의 과거를 딛고, 앞으로 나아가다

안녕, 긴 잠이여 - 하라 료(비채) ●●●●●●●◐○○

by 눈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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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죽으면 살아남은 사람의 추억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탐정이라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요?"

"그런 건 아니고, 어느 쪽인가 하면 빠른 공에 익숙한 타자를 느린 공으로 처리하는 것 같은 일이야. 자네가 주무기로 삼는 투구지."

우오즈미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런 것까지 조사하셨어요? 이제 옛날 이야기죠. 아니, 그런데 왜 저는 탐정이 될 수 없다는 거죠?"

"탐정이 될 수 있는 사람은 남의 트러블을 밥보다 더 좋아하는 사람이야. 자네처럼 십일 년 동안 자기 자신의 트러블에 파묻혀 살아서야 스스로에게 지불할 조사비만으로도 파산하고 말 걸."

- p. 168.




. 전작인 '내가 죽인 소녀'로부터 5년, 단편집인 '천사들의 탐정'으로부터는 4년 후의 시점을 배경으로 하는 이번 장편은 사와자키 탐정이 400일 만에 어딘가에서 도쿄의 와타나베 탐정사무소로 돌아오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자연스레 돌아온 사와자키의 주변에는 13년 전 그의 옛 동료인 와타나베가 들고 사라진 1억엔과 각성제 3kg의 행방을 찾기 위해 경찰과 야쿠자가 스물스물 꼬여들고, 사와자키는 그런 그들을 못본 체 하면서 여느때처럼 한 청년의 의뢰를 받는다. 누나의 자살에 대한 진실을 밝혀달라는 의뢰였다.


. 11년 전 고교야구 유망주였던 청년. 그는 고시엔에 출전했다가 승부조작 사건에 휘말리게 되었고, 승부조작을 부인했음에도 파문이 점점 커져가던 상황에서 그의 누나가 투신자살을 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자살 사건이 있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정체를 밝히지 않은 누군가가 승부조작 정황을 꾸민 사실이 밝혀져 청년은 무혐의 처분을 받았지만 이미 야구선수로서의 장래는 끝이 났고, 죽은 누나도 다시 돌아올 수 없다. 그렇게 11년, 그는 결코 누나가 자살한 것이 아니라고 믿어왔고, 사와자키를 찾아와 진실을 밝혀달라고 한다. 처음에는 11년 전 자살사건의 진상을 밝혀내는 건 탐정보다는 영매의 일이라며 의뢰를 거부하려던 사와자키였지만, 다부지고 묵묵하면서도 언뜻언뜻 여린 모습을 드러내는 청년에게 왠지 마음이 쓰인다. 그 와중에 청년에 대한 습격사건이 벌어지자, 이제는 의뢰가 있든없든 간에 더 이상 사건을 외면할 수 없게 되었다. 언제나 그러했듯.


. 내가 죽인 소녀 이후 5년만에 나온 이 소설은 레이먼드 챈들러를 그대로 본딴듯했던 그전까지의 소설들에 비해 한결 원숙해져 있고, 이제는 더 이상 챈들러의 컨버전이 아닌 하라 료만의 오리지널이라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정신없이 가지를 뻗는데만 급급했던 이야기 구도는 훨씬 간결해져 있고,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솜씨도 한결 능숙해져서 그전까지와 달리 다시 뒤로 돌아가지 않아도(^^;) 읽어내려갈 수 있다. 거기에 천사들의 탐정에서 빛을 발한 인간에 대한 애정이 이 작품에서도 물씬 묻어난다. 사와자키 역시도 여러 사건을 거치며 필립 말로를 벗어나 사와자키만의 소소한 서사를 쌓아올려가고 있다.




"이 친구들에게 와타나베라는 사람에 관한 질문을 받았을텐데, 그 사람은 내가 하는 탐정사무소의 전 주인이자 내 파트너였지. 십삼 년 전의 일인데, 경찰이 이 친구들의 각성제 거래 현장을 덮치려고 와타나베를 미끼로 이용했어. 그 사람은 탐정 일을 하기 전에 형사였거든. 경찰로서는 이례적인 일이었지만, 원칙보다 검거 실적이 급한 상황이었겠지. 그런데 와타나베가 경찰이 준비한 각성제 3킬로그램과 이 친구들이 마련한 일억 엔을 가로채 도주해버린 거야. 그뒤로 경찰이나 이 친구들이나 와타나베를 뒤쫓고 있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었고.

- p. 51.





. 무엇보다도 이번 편에서는 그동안 사와자키를 사로잡고 있던 옛 동료 와타나베의 이야기가 일단락을 맺는다. 13년 전 동료와 야쿠자와 경찰을 모두 배신한 채 1억엔과 각성제 3kg을 들고 사라진 와타나베. 그 즈음 막 초짜탐정으로 와타나베와 함께 일하던 사와자키는 사라진 동료의 행방을 대라는 경찰과 야쿠자의 심문과 고문에 시달리고 와타나베에 대한 배신감에 치를 떨면서 탐정 일을 계속해왔지만, 13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는 동안 배신감과 증오는 옅어지고 대신 의문과 애증이 뒤섞인 알 수 없는 감정이 그 자리를 채워갔다.


. 이 와타나베 시리즈는 그동안의 사와자키 시리즈가 품었던 가장 큰 떡밥이었는데, 하라 료는 이번 편을 통해 과감하게 와타나베와 사라진 1억엔과 각성제의 행방을 풀어놓는다. 이제는 그런 장치 없이도 또 다른 이야기를 풀어놓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었을까. 그렇게 사건이 해결되고 청년이 11년 전의 과거를 딛고 나아가는 것처럼, 사와자키와 하라 료 역시도 13년 전의 사건을 딛고 앞으로 나아가기를 선택한다. 그런 사와자키의 다음 행보를 기대하고 응원하면서도, 한 권 정도는 13년 전 사건을 둘러싼 후일담이 있어도 좋지 않을까 하지만.... 무리겠지. 다른 누구도 아닌, 하라 료인데. :)





"대체 누가 유키의 임신이 불명예라고 합니까? 당신들은 우오즈미 유키가 불명예스러운 임신을 했고, 동생도 불명예스러운 의혹을 받게 되자 불명예스러운 자살을 했다고 단정하고 있군요. 대체 어디에 그런 증거가 있죠? 사실 유키는 누구에게도 부끄러울 일이 없는 임신을 했고, 동생 사건도 창피하게 여길 내용이 아무 것도 없으며 - 실제로 승부조작 의혹은 다 풀렸고요 - 나아가 그 죽음은 자살이 아닐지도 모른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건 아마 내 의뢰인 뿐일 겁니다. 만약 그렇다면 유키는 죽은 뒤에도 모욕을 당하는 꼴 아닙니까? 그것도 가장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중략)


한 가지 확실한 게 있습니다. 사람은 죽으면 살아남은 사람의 추억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친한 친구나 가족, 다른 누군가가 저녀석은 자살했을 거야, 라고 멋대로 납득하고 말면 도저히 어쩔 도리가 없어지죠."

- p. 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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