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모자 미스테리 - 엘러리 퀸(검은숲) ●●●●●●○○○○
"지극히 자연스러워 보이는 실크 모자라면 어떤 것일까?"
요즘 미스테리 소설은 독자가 탐정이 되어 범인을 추리해보도록 하고 있다. 나는 엘러리 퀸을 설득해 이 '로마 모자 미스테리'에서 독자에의 도전을 삽입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몬테 필드를 죽인 것은 누구인가?', '살인은 어떻게 행해졌는가?' 이제 필요한 사실을 모두 손에 넣었으므로 눈치 빠른 독자는 이쯤되면 어떤 결론에 도달했으리라 생각한다. 엘러리 퀸도 이런 생각에 동의하는 바이다. 논리적인 추리와 심리적인 관찰이 수반되었다면, 이제 충분히 범인을 집어낼 수 있을 것이다.
- p. 357. 막간.
. 추리소설이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지금까지의 역사를 되돌아본다면, 그 최전성기는 당연히 1930년대일 것이다. 영국에서는 애거서 크리스티가 단 6년 동안 오리엔트 특급살인부터, ABC 살인사건, 나일강의 죽음, 죽음과의 약속,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까지 그녀의 작품 중에서 Top 10에 꼽히는 최대의 걸작들을 1년에 한 편 꼴로 쏟아내고, 프랑스에서는 조르주 심농이 메그레 경부 시리즈를 시작하고, 일본에서는 에도가와 란포가 본격추리의 신호탄을 쏘아올리던 시절. 그 시기 바다 건너편에서는 반 다인과 딕슨 카, 엘러리 퀸이 앞서 말한 작가들과는 또 다른 측면에서 추리소설의 수준을 한 단계 더 올려놓고 있었다. 정교한 트릭과 극에 달한 추리, 탄탄한 논리에 의해 움직여가는 '퍼즐 미스테리'가 그것이다.
. 1929년에 나온 '로마 모자 미스테리'는 이런 퍼즐 미스테리의 정점에 있는 탐정 엘러리 퀸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작품이다. 사촌형제 간인 프레드릭 더네이와 맨프레드 리가 '엘러리 퀸'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한(편의상의 이유와 저자의 의도에 대한 존중을 담아, 향후 저자의 이름은 엘러리 퀸으로 통일한다. 드루리 레인 시리즈 역시도 마찬가지다) 탐정 엘러리 퀸 시리즈는 초기의 국명 시리즈와 후기의 라이츠빌 시리즈로 나뉘는데, 애거서 크리스티 여사가 그랬듯 엘러리 퀸 역시도 젊었을 때엔 트릭이 중심이 되는 작품을 쓰다가 나이가 들고 나서는 심리와 문학적인 부분에 조금 더 집중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래서 읽는 사람의 성향에 따라 국명 시리즈와 라이츠빌 시리즈 사이에서 선호가 갈리고는 한다.
"이야기를 차근차근 해나가자면 이렇습니다, 아버지. 주어진 방정식 안에서 하나를 빼고 온갖 가능성을 남김없이 다 조사했다면 남은 하나의 가정이야말로 올바른 해답이라는 거죠. 그것의 가능성이 아무리 희박해 보일지라도 말입니다. 저는 이 유일한 가정이 정답이라고 결론을 내리겠습니다."
- p. 335, 17. 이 장에서는 모자들이 더욱 많이 등장한다.
. 그런 퀸의 첫 작품인 이 로마 모자 미스테리부터 엘러리 퀸은 기존의 작가들과는 차별화되는 자신만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우선은 작품 속에서 자신이 철저하게 논리적인 추리를 하고 있음을 내내 되풀이해서 강조한다. 사실 퀸의 추리방식과 크리스티의 전성기 시절 추리방식이 크게 다르지 않긴 하지만(특히 포와로가 나오는 초중기 작품의 경우는 더욱 그렇고) 크리스티가 논리 뿐 아니라 드라마와 심리, 서스펜스 등 다양한 부분을 고루고루 신경썼다면 엘러리 퀸은 어디까지나 논리를 최우선적으로 두고 있고, 그 점을 탐정 엘러리 퀸의 입을 빌려 계속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 게다가 책 말미에 있는 '독자에 대한 도전'은 정말 탁월한 발상이다. 그 때까지의 단서와 추리과정을 친절하게 정리해서 제시해놓고, 거기에다 '눈치빠른 독자는 이쯤되면 어떤 결론에 도달했으리라 생각한다', '이제 충분히 범인을 집어낼 수 있을 것이다'라니. 말이 도전이지 추리소설을 좀 읽었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독자들에게 있어 이건 그냥 '도발'이다. 물론 코난 도일이나 크리스티의 소설에도 이쯤되면 범인을 알았을텐데? 하는 부분이 종종 나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허영심 있는 탐정이 자신의 위대함을 자랑하면서 어리숙한 조수를 놀려먹는거지 퀸처럼 독자를 대상으로 '최대한 객관적인 태도를 보이며', '이 정도면 충분히 맞출 수 있는 수준'이라고 얘기하지는 않는다. 이쯤되면 독자들은 다시 책을 뒤져가며 어떻게든 범인을 찾으려고 열을 올릴 수밖에 없다. :)
. 거기다 첫 작품이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이 소설은 마지막의 반전이나, 정교한 알리바이나 기계장치, 미스디렉션 같은 요소에 기대지 않았기 때문에 꼼꼼하게 읽어나가기만 하면(^^;) 사건의 전체 진상까지는 아니더라도 범인을 지목하는 것 정도까지는 가능하다. 이 사람 저 사람의 비밀을 캐내 협박으로 돈을 갈취하던 악덕 변호사가 객석에서 독살된 채로 발견된다. 연극 공연 중이라 한치 앞도 분간하기 쉽지 않은 어두운 객석이었기에 목격자는 없고, 변호사가 쓰고 있던 멋들어진 모자가 사라졌다는 것만이 유일한 단서일 뿐이다. 하지만 모든 관객을 조사해봐도 모자를 두 개 가진 사람도, 파손된 모자의 잔해도 발견되지 않는다. 분명 어디엔가 있을텐데, 누가 모자를 어디에 숨겼기에 모자가 발견되지 않는걸까. 그리고 사람을 살해하는 그 긴박한 현장에서 범인은 왜 굳이 그의 모자를 가져가야만 했을까.
. 탐정 엘러리 퀸은 미궁에 빠진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질문을 골라내고, 골라낸 질문들에 하나하나 답해가는 것으로 사건을 해결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소설 하나만을 본다면 엘러리 퀸 시리즈가 이정도였던 건가? 싶은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만, 시리즈 전체의 구성으로 본다면 이 소설은 진짜 '풀 수 있나본데?' 하고 독자를 솔깃하게 하는 미끼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렇게 끌어모은 독자들을 데리고, 엘러리 퀸은 곧이어 후속작인 '프랑스 파우더의 비밀'로 뛰어든다. 본격적인 퀸의 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범인이 극장에 두고 간 실크 모자는 어디에 있을까? 엘러리는 늘 하던 대로 날카롭게 핵심을 찔렀지. 그 녀석은 이렇게 생각했네. '범인의 실크 모자는 반드시 극장 안에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눈에 띄는 이상한 실크 모자는 하나도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찾고 있는 실크 모자는 눈앞에 있어도 결코 이상하게 보이지 않아야 한다.' 라고 말이지. 정말 맞는 얘기 아닌가? 터무니없는 말이기도 하고 말이야. 나는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었네. 극장에 있어도 이상하게 보이지 않는 실크 모자, 지극히 자연스러워 보이는 실크 모자라면 어떤 것일까?"
- p. 395, 22. 그리고 설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