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토끼가 도망친다 - 아리스가와 아리스(시작) ●●●●◐○○○○○
"도저히 그렇게 생각할 수 없는 묘사를 발견했어요. 사실은 오른팔을 잃은 게 아니죠? 시리즈의 클라이맥스,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장면에서 류자키의 오른팔이 코트 밑에서 불쑥 나와 콜트 가버먼트를 쏜다. 그런 꿍꿍이를 숨기고 있는 시리즈죠, 그건."
"아, 안 됩니다, 아리스가와 씨. 그런 중요한 기업비밀을 공개적인 장소에서 떠들면. 여기서만, 여기서만 하는 얘기라고 약속해주세요. .... 어, 어느 묘사에서 눈치를 챘어요?"
"글쎄요. 그게 기억이 안 나네요. 서른 넷이나 되면 기억력이 눈에 띄게 감퇴해서 말이죠."
하무라가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시시한 방법으로 동업자를 괴롭히지 말라는 듯이.
류자키 세이지는 사실 오른팔이 있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묘사가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단지 그건 작가가 시리즈 전체에 장치한 큰 함정이라기보단 단순한 실수였을 것이다. 도시야는 그 실수를 고백하지는 않고 마치 '그 아이디어는 내가 쓰겠다!' 라는 듯이 덥석 물었다. 경멸은 커녕 오히려 감탄했다.
프로다, 당신.
- p. 44. 부재의 증명.
. 아리스가와 아리스는 참 성실하다. 요즘 나오는 추리소설들을 보면 미스테리 장르 안에서 이것저것 섞어내는 건 마땅히 해야 할 덕목 정도로 여겨지고 한걸음 더 나아가 다른 장르와 콜라보하는 작가들도 꽤 보이는데, 아리스가와 아리스만큼은 어디에도 한눈팔지 않고 오로지 트릭과 수수께끼, 논리를 중심으로 하는 본격물에만 집중하고 있다. 그런 작가의 작품에서 바뀌는 것은 세상에 있는 모든 트릭을 다 망라하기라도 해보겠다는 듯한 온갖 종류의 트릭들인데, 이 소설에 있는 네 편의 이야기만 해도 종류 별로 온갖 트릭들이 등장하고 있다.
. '부재의 증명'은 제목 그대로 알리바이를 깨야 하는 단편이다. 한 소매치기가 숨어있던 와중에 근처 빌딩에 유명작가가 들어왔다가 나가는 장면을 목격하고, 유명작가의 쌍둥이 동생이 그 빌딩에 있는 애인의 집에서 살해당한다. 추리작가는 마침 한 여자를 두고 동생과 삼각관계(....)를 벌이던 차였기에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되었지만 소매치기가 그가 들어오고 나가는 시간을 증언했기에 알리바이는 확실했다. 여기에 흉기가 발견되면서 범행이 가능한 시간은 더 좁혀지고 그의 알리바이는 더욱 확실해지는데.... 최대한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범인을 추리하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지만, 트릭을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다. 진상을 읽고 아, 이런 식의 비틀기가 가능하구나. 좋은 거 하나 배웠네 생각하게 만드는 소설이다.
. '지하실의 처형'은 동기와 심리분석의 문제. 요즘처럼 까탈스러운 독자(나 역시 아니라고는 할 수 없다)들이 많은 시대에 심리분석만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건 좀 무리가 아닐까 싶고, 실제로 다 읽고 나서도 그다지 납득은 가지 않았던 게 사실. 설정 자체는 상당히 괜찮았는데.
. '비할 바 없이 성스러운 순간'에서는 다잉메시지를 추리해야 한다. 범인이 중간 부분에 밝혀진 상태에서 두 개의 사건에 얽힌 두 개의 다잉메시지를 풀어야 하는데, 문제는 둘 다 지극히 일본적인 다잉메시지이고 특히 두 번째 다잉메시지는 발상은 괜찮았지만 이런 건 일본인들도 잘 모르겠다 싶은거라. 이걸 위해 굳이 인터넷을 뒤지거나 하는 사람이 있을지는 의문이다. 평소에 이런 건에 대한 상식이 있었다면 뭐야, 이거겠네! 하고 기분좋아질 순 있겠지만 진짜 어지간한 매니아가 아니고서야.... 다른 나라 독자들에겐 완전 사기나 마찬가지고. :)
. 마지막 이야기이자 표제작인 '하얀 토끼가 도망친다'는 중편인데, 정말 간만에 보는 시간표 트릭이다. 원래 일본 고전추리물에서는 시간표를 이용한 트릭이 자주 나오긴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쓰기 어려워지다보니 지금은 거의 볼 수 없게 된 장르인데, 시간표 트릭이라는 것 자체가 따라잡는 쪽은 '잘 알려지지 않은 최선책'을 선택해서 어떻게든 앞질러가야 하고, 따라잡히는 쪽도 어느 정도 납득이 갈만한 차선책 정도는 선택해야 하기에 철도 운영이 효율적이 되면 될수록 쓰기 어려워질 수밖에 없는데, 이 작품에선 트릭에 트릭을 덧대어 시간표 트릭을 짜내는데(^^;) 성공한다. 물론 외국의, 그것도 과거의 시간표다보니 읽는 입장에선 전혀 추리의 여지가 없긴 하지만 그래도 골머리를 썩은 것만큼은 확실하게 눈에 보이니. 그 고생에는 박수를. :)
. 이렇듯 최근 트렌드답지 않은 성실하고 꼼꼼한 트릭 때문인지 아리스가와 아리스에게는 고전추리를 읽는다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 그래서 애거서 크리스티나 엘러리 퀸을 좋아한다거나, 최근 반전에 치중된 추리소설 경향에 아쉬움을 느낀 독자들에겐 꽤나 좋은 선택일거라고 생각하고, 여기에 비슷한 성향의 신본격 작가들에 비해 비교적 편차 없이 작품들이 안정되어 있고, 글쓰기 솜씨도 나쁘지 않다는 게 그의 장점이다. 그에 비해 역시나 타겟층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인지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국명 시리즈가 많이 나오지 않은 건 아쉽지만, 요즘에야 원서만 가지고 있으면 꼭 원어민 수준이 아니더라도 읽을 수 있는 방법은 많으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