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 전에 메디컬 드라마가 있었다면

성채 - A. J. 크로닌(혜원출판사) ●●●●●●○○○○

by 눈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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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에 펼쳐진 하늘에서 성채와 같은 구름이 환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당신이라면 틀림없겠죠. 난 매년 이맘때면 주사를 맞고 있어요. 고초열에 걸리기 쉬운 체질이거든요. 선생님도 고초열에 대해선 잘 아시겠죠?"

"예." 그가 대답했다.

"어떤 주사를 맞고 계십니까?"

그녀는 주사약의 이름을 댔다.

"전의 의사 선생님이 처방해주셨죠. 저도 그 주사가 효과가 있었다고 생각한답니다."

"예, 그렇습니까?"

빈틈없는 그녀의 태도에 긴장한 그는 자칫 그녀가 믿어온 의사의 그 치료법이 사실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며, 그게 다 제약회사의 교묘한 선전술과 영국의 여름철은 대부분 꽃가루가 사라지기 때문인 것을 털어놓을 뻔했다. 그러나 화를 자처할 필요는 없었다. 그의 철저한 신념과 욕망 사이에서 처절한 싸움이 벌어졌다. 그에게 묘한 반항심이 솟구치며 몇 개월 동안이나 기다려왔던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말했다.

"그 주사는 누구보다도 잘 놓을 수 있습니다."

- p. 287.





. 대학을 갓 졸업한 의사 맨슨이 웨일즈의 탄광 마을에 부임하면서 시작되는 이 이야기는, 마치 어제 ott에서 다시보기한 드라마라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만큼 '초짜 의사의 노력' -> '돈과 명예를 쫓는 의사로 전락' -> '반성하고 숭고한 목표를 품게 됨' -> '그 목표의 추구를 방해하는 고난이 발생' -> '극복하고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는 전형적인 메디컬 드라마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 소설이 지금으로부터 90년 전에 쓰여졌다는 걸 생각해보면 이 소설을 본따서 수많은 메디컬 드라마들이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는 게 옳겠지만.





"이거 실례했군요. 오시라고 한 건 제 쪽이었죠. 하지만 부인에게는 나쁜 데가 없어요."

"맨슨 선생님!"

그녀는 믿기지 않는 듯이 부르짖는 소리를 냈다. 거짓도 숨김도 없는 사실이었다. 그는 그녀의 모든 증세가 바로 돈이라는 것을 날카롭고 잔혹한 눈빛으로 꿰뚫어 보고 있었다. 일이라고는 해본 적이 없는 그녀는 무기력하고 태만했으며, 비만증과 불면증에 걸려 있었는데 이 또한 몸을 움직이지 않아서였다. 그녀는 어떤 일에 머리를 쓰는 경우도 없었다. 그녀는 이 진찰실을 나가서 뭔가 실제적인 일을 해야 한다. 진정제나 수면제 혹은 하제라든가 그 밖의 모든 약들도 끊어야 한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며 자신의 욕심만을 채우지 않는다면 저절로 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을 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으며 반면에 요구하는 것만 많았다. 그녀야말로 정신적으로 죽어 있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결국 자신도 그녀와 같은 부류가 아닌가!

- p. 384.




. 실제로 크로닌은 의대를 졸업한 의사 출신의 작가였다는데, 그래서 이 소설에는 그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주인공인 맨슨처럼 크로닌도 웨일즈의 탄광 마을에서 일을 한 적이 있고, 런던에서 개업을 하기도 했으며, '영국 의학회'의 모델이 되는 '영국 내과 의사회'의 회원이기도 했다. 맨슨에게 명성을 안겨준 탄광 내의 탄진(탄광의 석탄가루) 흡입에 대한 보고서도 크로닌이 썼던 논문이 모델이라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개업의가 되어 돈과 명예에 휘둘리게 되어가는 부분은 일반적인 의사들의 모습을 다룬 전형적인 이야기로 읽혀지는 데 비해, 신입의사에서 점점 전문가로 성장해가는 웨일즈 시절의 이야기는 상당히 상세하고 전문적이다.


. 이 작품과 '천국의 열쇠' 등 크로닌의 소설들은 특정 직업군을 선택해서(천국의 열쇠는 사제를 주인공으로 한다) 사회의 문제를 비판하고 유혹에 맞서 성장하는 뜻있는 개인의 모습을 다루는데, 그런 점이 한편으로는 그의 소설에 접근하기 용이한 부분이긴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너무 전형적인 느낌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그 뻔한 듯한 느낌을 극복하게 하는 게 인물이 성장하는 모습에서 오는 감동이겠지만, 이 소설이 쓰여진 지 5년 후에 나오는 크로닌 최고의 걸작인 천국의 열쇠에 비한다면 성채는 그의 직접적인 경험을 풀어내고 교훈을 주는 것에 너무 치중한 탓에 좀 밋밋한 느낌이 든다. 아무리 교훈도 중요하다지만 기왕 이야기를 읽는 거라면, 똑같은 좋은 메시지라고 해도 교훈보다는 감동을 전달받고 싶은 게 당연하잖아? :)





그들이 탄 열차가 패딩턴 역을 빠져 나간 뒤에 그에게는 1시간 정도의 여유가 있었다. 그의 목적지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무의식중에 그는 버스에 올라 캔슬 그린으로 향했다. 그는 크리스틴의 묘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 쾌청한 오후의 부드러운 미풍이 크리스틴을 어루만져 주고 있었다. 머리 위로 늘어진 나뭇가지에서 참새 한 마리가 맑은 소리로 지저귀고 있었다. 이윽고 그가 약속시간에 늦지 않도록 가기 위해 발길을 돌리는 순간, 눈앞에 펼쳐진 하늘에서 성채와 같은 구름이 환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 p. 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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