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의 비극 - 엘러리 퀸(시공사) ●●●●●◐◯◯◯◯
"그는 당신 얘기를 들을 수가 없는거요, 섬. 눈을 감고 있으니까 말이오."
"그게 전부입니까, 경감님?"
경감은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레인은 눈꺼풀을 떨구었다. 그는 순간 근육의 긴장이 풀리는 듯 하더니 마치 잠에라도 빠져드는 듯이 보였다. 경감은 우물쭈물했다.
"그러니까 제 얘기 중에 뭔가 석연찮은 구석이라도 있단 말씀인가요....?"
그 목소리에는 설사 뭔가 빠뜨린 부분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주장이 담겨 있었다. 섬 경감에게는 어딘가 냉소적인 면이 있었다.
명배우의 늘씬하고 조용한 모습이 움직이지 않자 브루노가 키득키득 웃었다.
"그는 당신 얘기를 들을 수가 없는거요, 섬. 눈을 감고 있으니까 말이오."
- p. 91. 제1막 제9장.
. 1929년 '로마 모자의 비밀'로 데뷔한 이래 엘러리 퀸은 1년에 한 권씩 꼬박꼬박 국명 시리즈를 써냈다. 그리고 데뷔 4년차인 1932년, 국명 시리즈의 프리퀄이라 할 수 있는 '그리스 관 미스테리'와 국명 시리즈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이집트 십자가 미스테리'를 써내고, 그렇게 탐정 엘러리 퀸의 명성이 확고해진 시기에 작가 엘러리 퀸은 은밀하게, 의도는 장난스럽지만 그 결과물은 결코 장난이 아닌 시도를 한다. 바로 새로운 탐정, '드루리 레인'의 등장이었다.
. 60이 넘은 나이지만 잘 관리된 단단한 체구에 긴 배우 활동을 통해 쌓은 장중한 아우라, 전혀 노인으로 보이지 않는 수려한 외모, 무엇보다도 '떠벌이' 엘러리 퀸의 경박함과는 정반대의 진중함. 완벽한 추리력과 논리력에, 오랜 연기 경력을 통해 갖춰진 인간에 대한 통찰력까지 모든 것을 두루 갖춘 완전체. 작가도 이건 좀 너무하다 싶었는지 후천적으로 귀가 들리지 않는다는 특징을 부여하긴 하지만, 독순술을 완벽하게 구사하며(심지어 작중의 묘사를 보면 정면이 아니어도 상대의 입술을 읽을 수 있는 것 같다!) 뒤늦게 걸린 후천적인 질병이기 때문에 말하는 데에도 전혀 지장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드루리 레인 스스로는 눈을 감기만 해도 아무도 방해할 수 없는 사색에 빠질 수 있게 해주는 장점이라고 얘기하기까지 하니, 그동안 본 이런저런 탐정들 중에서도 단연 사기캐 중 사기캐라 할 만하다.
"내가 느끼는 연극의 영원한 매력은 바로 거기에 있다네.... 동작이나 목소리, 몸짓에 따라 생명을 불어넣는 것, 실재하는 듯한 인물을 창출해 내는 거지. 벨라스코는 아무도 없는 무대에서조차도 이 인생을 재현하는 기술을 유감없이 잘 발휘해보였네. 예컨대 벽난로의 불꽃 따위에 의지하지 않고서도 온화한 분위기가 흐르는 무대를 연출한 일이 있었지. 무대 장치가가 준비하는 효과에 만족하지 않고 평화롭고 안온한 분위기를 멋지게 연출해 냈다네. 그는 개막 전에 고양이를 묶어 놓고는 움직이지 못하도록 해놓았지. 그러다가 막이 올라가기 직전에 줄을 풀어 주었던 거네. 그리고 막이 올라가서 낯익은 장면이 나타나자, 고양이는 무대에서 몸을 일으키고 울음소리를 낸 뒤 벽난로 앞으로 가서 기지개라도 켜듯이 네 다리를 쭉 뻗었던 거네. 그러자 관객들은 한 마디의 대사를 듣지 않고서도 곧, 누구든 고양이의 이 간단한 동작만을 보고서도 곧바로 그것이 평화롭고 아늑한 실내 장면임을 알 수 있었던 셈이네. 아마도 그때 벨라스코가 고용했던 무대 장치가의 기술만으로는 결코 그 장면의 분위기를 그토록 잘 연출할 수는 없었을거야." - p. 168. 제2막 제5장.
. 다만 이런 매력적인 캐릭터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이야기 자체는 맛보기 느낌이 강했다. 비가 내리던 뉴욕의 여름밤. 사람으로 붐비는 열차에서 한 백만장자가 독살되고, 조사 결과 그의 주머니 속에서 독이 발라진 바늘투성이 흉기가 발견된다. 누군가가 혼잡한 틈에 피해자의 주머니에 흉기를 몰래 넣고 피해자가 우연히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가 독침에 찔린 것이겠지만, 그렇다면 흉기를 주머니에 넣은 사람은 왜 독침에 찔리지 않은 것일까.
. 사실 여기까지만 보면 범인은 확연해보이지만, 그 확연해보였던 범인이 중간에 퇴장해버리면서 사건은 미궁에 빠진다. 거기다 그 다음으로 의심받던 용의자도 '뒤틀리게 겹친' 의문의 손가락 모양을 남긴 채 살해되고, 결국 이러쿵저러쿵 여차저차(소설을 읽어보면 왜 이렇게 표현했는지 알 것이다-_-)해서 사건은 해결되지만, 범인의 정체는 황당 그 자체 - 읽어보면 느끼겠지만, 깊은 원한이 이토록 사람을 근면성실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 거구나 싶을 것이다(....) - 손가락의 비밀은 너무나도 허무하다. 국명 시리즈의 제목이 맥거핀이었던 것처럼 드루리 레인 시리즈에선 알파벳이 맥거핀이었던 것인데, 어쩌면 두 시리즈 다 제목에 맥거핀이 있었다는 게 독자에 대한 '또다른' 도전장이었던 게 아니었을지.
모두들 드윗의 얼어붙은 듯한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 얼굴은 일그러지고 뒤틀려 있는 탓에 몹시 흉하고 부자연스러운 표정이 되어 있었다. 그 표정의 의미를 이해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그것은 노골적인 공포였다. 눈꼬리가 치켜올라가 있었고 턱 근육에는 긴장된 주름이 잡혀 있었는데, 그 주름들 한가닥 한가닥에 기력을 꺾는 절망의 독소가 스며들어 있는 듯했다.
실링 검시관이 가볍게 소리를 질렀다. 모두의 시선은 그 끔찍한 시체의 얼굴에서부터 검시관이 손으로 들어올리며 가리키고 있는 시체의 왼손으로 일제히 모아졌다.
"이 손가락을 보시오."
실링이 말했다. 모두들 그것을 보았다. 가운뎃손가락이 집게손가락 위에 겹쳐져서 기묘한 모양으로 딱딱하게 얽혀 있었고 엄지손가락과 나머지 두 개의 손가락은 안쪽으로 구부러진 채 굳어 있었다.
- p. 294. 제3막 제3장.
. 참, 처음에 작가 엘러리 퀸의 의도가 왜 장난스러웠냐고 했냐면, 퀸은 이 X의 비극으로부터 시작되는 드루리 레인 시리즈를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한 게 아니라 '바너비 로스'라는 가공의 작가를 만들어 그 이름으로 발표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단순히 발표만을 한 게 아니라 작가 엘러리 퀸이 두 명이었던 것에 착안해 공식석상에 한 명은 엘러리 퀸을, 다른 한 명은 바너비 로스를 연기하며 당신의 추리소설은 어떻니저떻니 논쟁을 벌이기까지 했다고 하니(....) 단 드루리 레인은 2년 동안 네 작품에 나온 후 은퇴하고, 엘러리 퀸만이 남아 계속 집필 활동을 하다 9년이 지나 '라이츠빌 시리즈'의 시작을 앞두고 사실은 엘러리 퀸과 바너비 로스가 같은 작가였다는 것을 공개한다. 아무래도 라이츠빌 시리즈부터는 탐정 엘러리 퀸이 '똑똑한 떠벌이'를 벗어나 인간적인 성장을 이뤄내는만큼, 드루리 레인과 유사하다는 말을 들을까 염려했던 게 아니었을까. 그렇게 보면 엘러리 퀸에서 인간미와 원숙함을 더한 게 드루리 레인이라고 봐야 할테니, 역시 완전체는 완전체인 셈이다.
"도무지 무의미한 악마의 눈 따위를 무시한다면 그 겹쳐진 손가락 표시에는 또 달리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요? 특히 OO과 관련해 볼 때 말입니다. 저는 이 문제에 대해서 그때까지의 부질없는 생각들을 버리고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 보았습니다. 그 겹쳐진 손가락의 형상적인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보았습니다. 곧, 그 손가락 표시가 기묘한 방향으로 무언가 특별한 도형적 기호를 흉내내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 말입니다. 조금 더 생각을 해보니 이내 흥미로운 것이 떠올랐습니다. 그 겹쳐진 손가락 표시와 가장 닮은 도형적 기호는 의심할 여지 없이 바로 X였습니다!"
- p. 435. 무대 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