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문화사 4권 - 도널드 서순(뿌리와이파리) ●●●●●●●●◐○
'고전'이란 그 명성이 저자의 삶보다 오래 가는 소설이다.
시장은 '태생적으로' 민주적이었다. 대량생산에는 대량소비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시장, 특히 문화시장은 사람들을 체계적으로 '시험'하여 그들이 원하는 것처럼 보이는 생산물을 제공했다. 시장은 대체로 경제적인 수단을 이용해서, 사람들이 틀림없이 소비할 것 같은 상품을 제공해서가 아니라 이런저런 생산품이 즐길만한 것이라고 암시함으로써 대중의 취향을 형성하려고 했다. 현대 시장의 승리는 쾌감 원리를 끌어안고 욕망의 만족을 편드는 것처럼 보이는 외관상의 능력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시장은 프로이트가 말하는 '이드'에 영합하고, 국가는 '슈퍼에고'에 영합한다. 그리고 '이드'가 그렇게 자주 승리를 거두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 p. 22. 국가와 시장.
. 1920년대부터 1960년대를 다루는 4권에 이르면 그전까지의 이야기를 읽으며 받았던 낯선 느낌들은 점점 줄어들고 대신 익숙한 이야기들이 그 자리를 채운다. 영화와 레코드, 라디오가 전세계로 보급되면서 그 어느 때보다도 폭넓은 대중문화의 시대가 열렸고, 대중들이 본격적으로 문화를 향유하기 시작하면서 각각의 매체마다 대중들을 타겟으로 하는 장르들이 계속 생겨난다. 그 중에는 데일 카네기나 나폴레온 힐을 필두로 하는 자기계발서도 있었다. 자기계발서의 시작은, 1차대전 종전 후 미국을 중심으로 한 10여년 간의 대호황 시기에 그 열풍에 편승하려는 개개인의 신분상승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세상에, 카네기 인간관계론이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나 '오리엔트 특급살인'과 비슷한 연배(?)였을 줄이야. :)
. 하지만 변화는 언제나 반동을 낳는다. 급격한 변화 속에서 그전까지의 '지식인'들은 끝없이 확장되어가는 대중문화를 경계하기 시작했고, 검열과 싸우던 지식인들은 이제 대중문화를 상대로 싸우기 시작했다. 그들은 새로운 문화의 낮은 수준과 획일성, 문화가 자본과 시장에 속박되는 현실을 지적하며 기존의 문화가 대중문화에 밀려나는 현실을 비판했다. 아도르노는 영화와 라디오가 예술이 아니라고 주장했고, 폴 니장 역시 영화와 라디오, 레코드를 공격했으며, 발터 벤야민도 '아우라'론을 통해 무한히 복제되는 현대의 문화는 점점 그 아우라를 잃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라디오는 사실상 뉴스와 기타 프로그램이 추가된 음악상자였다. 방송사들은 청중이 청취시간을 선택하듯이 프로그램을 선택하지는 않는다는 걸 곧 깨달았고, 흔히 편성표를 짤 때 인기 프로그램을 문화 프로그램 직전에 넣곤 했다. 빈 시간이 서서히 메워졌고, 가족보다는 주부 같은 개인들이 오전 방송의 주요 대상이 되었다. 방송의 연속성은 라디오가 확산되는 주요 유인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일주일 내내 방송할 수 있는 프로그램 수가 많아서, 갖가지 유형의 청취자들의 다양한 선호를 충족시킬 수 있었다. 사상 처음으로, 문화를 언제든지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 p. 446. 라디오.
. 물론 이들의 주장은 개별적으로는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고 이로 인해 대중문화의 여러 단점들이 보완되기도 했지만, 모양새로 보면 한때 이전 시대의 전통과 고전적인 문화에 맞서 새로운 문화를 옹호하던 이들이, 시대가 바뀜에 따라 새로이 밀려드는 대중문화에 맞서 자신들이 향유하고 있던 문화를 지키기 위해 수세로 돌아선 것은 의미심장한 - 그리고 시대마다 반복되는 아이러니다. 1권의 내용을 떠올려본다면 현재 고급문화로 인식되는 고전소설들 중 상당수가 18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하녀들이나 읽는' 수준 떨어지는 이야기로 여겨졌던 걸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와는 대조적으로, 이 시기에 획일적이고 영혼 없는 복제품에 불과하다고 공격받았던 레코드와 라디오가 오늘날에는 디지털 음원과 OTT 속에서 낭만과 멋을 담은 매체로 여겨지는 것만 봐도, 문화에 대한 인식은 끊임없이 바뀌어가는 것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여기서 또다시 한두 세대가 더 흐른다면, 그 때의 우리는 과연 무엇을 고상한 문화와 낭만으로 여기며 그리워하게 될까. 생각하면 할수록 과거를 읽고 그에 비추어 미래를 내다보는 건, 정말 재미있는 일이다.
'고전'이란 그 명성이 저자의 삶보다 오래 가는 소설이다. 고전은 모든 장르에서 찾아볼 수 있다. 대부분의 저자는 결코 이름을 얻지 못하거나 1년 정도만 명성을 얻는다. 어떤 저자들은 이름을 얻고 죽기는 하지만 한 세대가 지나기 전에, 대개는 10년도 지나지 않아 완전히 잊힌다. 문학적 필멸성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지적 엘리트들에 의해 정전에 오르거나, 최근까지도 뒤마나 베른이 그랬듯이 '컬트'의 지위에 오르는 것이다. 애거서 크리스티나 조르주 심농은 20세기의 대표적인 예다. 이들은 처음에는 문학 엘리트들에게 무시를 당했지만, 여러 시대의 독자들에게 계속 인기를 얻어 '사회적 정전'에 진입했다. 그제야 이들이 이렇게 장수하는 까닭을 설명할 필요를 느낀 문학 엘리트들이 이들에게 관심을 보였다. 문학 엘리트들은 이들을 검토하고 분석하고 해체하면서, 수백 명의 모방자들이 문학의 경쟁에서 패배한 반면에 이들은 승리한 이유를 설명하려고 한다.
- p. 302. 대중적 장르 : 범죄와 미래.
p.s. 이번 권에서 특히 즐겁게 읽었던 건 애거서 크리스티와 조르주 심농을 주요 사례로 들어 추리소설을 이야기하는 내용이었다. 19세기를 다룬 1권이 550페이지 중 절반이 훨씬 넘는 350페이지를 독서와 책 이야기에 할애했던 데 비해 4권에 접어들면 이제 책 이야기는 기껏해야 두세 챕터를 통해 이런저런 장르들을 훑고 지나가는 정도지만, 그런 와중에도 도널드 서순은 챕터 하나를 통째로 추리소설에 할애해 녹스의 10계나, 추리소설 장르를 성장하게 한 요인이나 그로 인한 딜레마를 꽤 깊숙히 파고든다.
책 이름이 '유럽 문화사'여서 그런지 이 시기에 놀랍도록 성장한 일본추리에 대한 언급이 없는 건 좀 아쉽지만 대신 애거서 크리스티와 미스 마플 이야기가 나오는 게 좋았다. 거기다 단순히 소개로 끝나는 정도가 아니라, 미스 마플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플롯이 이야기를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의 관심을 계속 붙잡아주는 것은 인물들'이라고 이야기하는 건 정말 팬심과 열의를 한가득 안고 미스 마플이 나오는 소설들을 읽어낸 후에야 할 수 있는 평이기에, 마플 아주머님의 팬인 나로선 서순도 이런 걸 알다니 싶어 정말 반가웠다. 좀 오버하자면, 감격했다. :)
우리는 두 작가가 여러 문화에서 통용될 수 있는 관습적인 도덕성을 수용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심농이나 크리스티는 폭력을 미화하지 않고, 노골적인 섹스도 거의(심농) 또는 전혀(크리스티) 없다. 크리스티의 전통적인 배경은 주로 품위 있는 시골 저택이나 그 연장선상에 있는 해외의 공간(유람선, 고급열차)이다. 탐정은 사근사근한 아마추어다. 진짜 폭력은 없다. 모두, 특히 살인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매우 예의바르게 행동한다. 영리한 범인은 탐정이 재능을 발휘해 찾아낼 가치가 있다. 살인에 이르는 과정은 점진적이고 합리적으로 재구축된다. 크리스티의 미스 마플 소설들은 용의자들에게 큰 관심을 기울이는데, 그들은 그 자체로 정말 재미있는 사람들이다. 미스 마플은 사제관에서 차를 마시며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우리는 그들을 잘 알게 된다. 플롯이 이야기를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의 관심을 계속 붙잡아두는 것은 인물들이다. 우리가 좋아하는 이모와 아주 흡사해보이는 그런 착한 여인이 약사를 독살한 단호한 살인자일 수 있을까? 사교계의 젊은 아가씨와 사랑에 빠진 매혹적이고 쾌활한 젊은 사내가 정말로 나이든 상속녀를 목졸라 죽인 그 사람일까? 보통이 아닌 일을 하는 보통사람들은 늘 꽤 매력이 있다.
- p. 327. 대중적 장르 : 범죄와 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