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딴 집 - 미야베 미유키(북스피어) ●●●●●●●●●○
"너는 습자를 더 하고 싶은 게로구나."
"이 글자는 '호'라고 읽는다. 방향, 방위를 뜻하는 글자지. 너는 바보의 호가 아니라 오늘부터는 방향의 호다."
"어째서, 이옵니까?"
"지금까지의 너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려고 하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것은 바보의 호다. 하지만 지금의 너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갈 것인지를 알고 있다. 그러니 이 '方'이라는 글자를 쓰는 것이다."
호는 뺨에 남은 눈물 자국을 손등으로 닦고 얼굴을 들었다.
"가가 님, 저는 제가 어디로 가려고 하는지 모릅니다."
"아니, 안다."
단호하고 엄격한 목소리다.
"너는 매일 열심히 일하고, 습자를 하고 있다. 그것은 무엇 때문이냐? 이 가가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서냐? 그것은 아니다. 너는 너를 위해 그리 하고 있다."
"그렇다면 저는 언제, 어디로 가게 됩니까? 어디에 이르게 될까요?"
"'사람'이 있어야 하는 곳에 이르게 될 것이다."
- 하권, p. 258. 소란.
. 에도에서 멀리 떨어진 시코쿠 섬의 작은 번인 마루미. 그곳에 아내와 자식들을 베어죽였다는 혐의를 받는 막부의 중신인 '가가 님'이 귀양을 명 받아 유폐되게 된다. 마루미 사람들은 끔찍한 일을 저질렀다는 가가 님을 악귀라고 생각해 두려워하지만, 일개 번의 입장에서 막부의 죄인을 함부로 죽이거나 죽게 내버려두는 것 역시 큰 죄다. 그렇기에 어떻게든 가가를 지켜야만 하는 이들이 있고, 반대로 가가의 죽음으로 이득을 보는 이들이 있다. 번의 내부에서는 가가의 거취를 놓고 치열한 음모와 암투가 오가고, 바깥에서는 가가의 유폐로 뒤숭숭해진 번의 상황을 이용하려는 이들이 있다. 그런 와중에 번의 주요 의원 가문의 여식인 이노우에 가의 고토에가, 번의 주요 가신 가문의 여식인 가지와라 가의 미네에게 독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리고 사태는 점점 소용돌이치면서 커져가기 시작한다.
. '외딴 집'은 미야베월드 2막 에도시리즈 중에서 국내에 가장 먼저 소개된 소설이다. 사실 출간 순서대로 한다면 1991년에 쓰여진 '혼조 후카가와의 기이한 이야기'가 가장 먼저 쓰여지긴 했지만, 북스피어 출판사에서는 이 외딴 집을 가장 먼저 출간하고 혼조 후카가와의 기이한 이야기를 뒤로 미뤘다. 출간연도로 보면 외딴 집의 일본 출간은 2005년, 국내 출간은 2007년이니 이 정도면 현지에 갓 나온 책을 구해 읽자마자 다른 책들을 다 제껴두고 계약하고 번역해서 국내에 출간하기까지 정신없이 달리고 또 달렸던 셈이다. 그리고 그런 행보가 이해가 될 만큼 이 책은 미야베 미유키의 수많은 소설들 가운데서도 단연 손꼽힐만한 걸작이다.
하얀 번개가 하늘에서 내려온다.
하얀 빛 속에서 호는 보았다. 호에게 손짓하며 내밀어진 팔을, 반짝이는 비의 화살을 뚫고 손톱의 모양까지 또렷이 눈에 새겨졌다.
다음 순간, 그 풍경이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한 덩어리의 딱딱하고 커다란 굉음에 하늘이 막히고 땅이 메워져 귀가 아득해졌다. 끼잉 하고 금속성 울림이 났다.
다리가 지잉 마비되었다. 땅이 흔들린다.
호는 누군가가 호되게 밀친 것처럼 뒤로 날아갔다. 오두막 안까지 내려가 개어서 쌓아 둔 이불에 등을 부딪혔다.
무언가가 타고 있다. 이상한 냄새가 난다. 비가 타다니 어디에 어떤 불이 어떻게 있다는 것일까?
그 옥지기가 방금 전에 호를 향해 내밀고 있던 팔을 그대로 허공에 쳐들고 쓰러져 있었다. 엎드린 자세로 쓰러진 등에 비가 쏟아진다. 사카야키 위로 비가 달린다. 옥지기의 기모노도, 하카마도, 소매를 묶어 올린 다스키까지도 새카맣게 타 있었다.
연기가 풀풀 난다.
혼비백산하는 비명 소리가 일었다. 호는 자신의 목소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호의 목소리는 움츠러들어 딱딱하게 움켜쥐고 입가를 누른 주먹 속에 들어가 있다.
- 하권, p. 181. 산울음.
. 막부 중신의 유폐와 번 내에서 벌어진 독살 사건. 겉보기에는 이 두 가지의 사건을 중심으로 지금으로 치면 형사인 와타베 가즈마와 순경 견습쯤 될 마을 처녀 우사, 아무것도 모르면서 사건에 휘말려 드는 어린 소녀 호의 이야기가 진행되어 가지만, 실제로는 일련의 사건들의 배후에서 번의 주도권을 놓고 치열한 암투가 벌어지고 있고, 또 한편으로는 가가에 대해 공포를 느끼고 불길한 일을 떠맡은 데 대한 불만에서부터 시작된 번 주민들의 분노가 끓어오르고 있다. 겉으로 드러난 사건의 앞뒤와 위아래로 몇 겹이나 되는 이야기가 중첩되어 있는 것이다. 거기다 이러한 갈등들이 폭발하고 분출될 때 초자연적으로까지 느껴지는 마루미의 압도적이고 엄혹한 천재지변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어 이 모든 것이 이야기를 파국으로 이끌어간다. 후반부의 천둥번개와 주민들의 폭동, 온 마을을 집어삼킬 듯 타오르는 화재가 한데 뒤엉키는 수라장은 소름이 돋을 정도로 무시무시하다.
. 하지만 그런 파국과 절망만으로 상하권 합쳐 팔백쪽이 넘는 이야기를 끌어나갈 수 있을 리 없다. 미야베 미유키는 파국으로 치달아가는 이야기 속에서도 어리고 순수한 호와 통찰력 있고 자애로운 가가 님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통해 읽는 이들을 미소짓게 한다. 모두에게 바보로 불리며 스스로도 자신을 바보라고 생각하는(일본어로 바보는 '아호'라고 읽는다) 호에게 가가 님이 청소하는 방법을 하나하나 곱씹어 이야기하게 하고 그렇게 차근차근히 설명을 할 수 있는 너는 바보가 아니라고 깨우쳐 주는 모습이나, 매일매일 습자와 주산을 가르치면서 너의 호는 '바보의 호'가 아닌 '방향의 호'라고 하는 모습은 - 그리고 그 방향이 '사람'이 있어야 하는 곳이라고 말해주는 장면은 읽는 이들을 감동하게 한다.
"방을 청소, 할 때."
"음."
"먼저 빗자루로 씁니다."
"음."
"그러고는 걸레질을 합니다."
"너는 그렇게 하는구나."
"예, 고토에 님께 배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먼지가 잘 닦이지 않습니다. 먼지떨이를 쓸 때는 높은 곳에서부터 떱니다. 그러지 않으면 뒤에 또 먼지가 떨어집니다."
가가 님은 턱짓으로 재촉했다. 후타미 님은 눈을 매우 가늘게 뜨고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히 보고 있다.
"단계라는 것은 그런 것이지요?"
"그래. 그것은 모든 일에 있다. 청소에만 있는 것은 아니지."
"예, 알겠습니다."
"너는 내게 이야기를 할 때에도 그 단계를 배우게 되었다는 뜻이다." 첫날부터 넷째 날까지, 라고 덧붙인다.
"그러니 너는 가엾고 어리석은 하녀가 아니다. 이렇게 나와 이야기를 할 수 있지 않느냐."
- 하권, p. 147. 산울음.
. 이렇듯 외딴 집은 사건과 구조에 있어서도, 완급과 몰입에 있어서도 미야베 미유키의 작품군 중 최상으로 꼽힐만한 스케일과 완성도를 가진다. 더구나 외딴 집을 발표한 이후 미야베 미유키는 본격적으로 미시마야 변조괴담에 착수했기 때문에 이만한 대작은 더 이상 나오지 않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듯하니.... 이쯤에서 과감하게, 이 책에 미야베 미유키의 시대물 중 단연 최고라고 단정해도 큰 무리는 없지 않을까. :)
"너는 왜, 그 옥지기의 말대로 하지 않았느냐."
호는 바로 그것을 가가 님께 여쭤보고 싶었다. 옥지기는 왜 도망치라고 하는 것일까. 어째서 도망치는 것이 괴롭게 느껴질까.
"도망쳤다가 붙잡혀서 벌을 받게 될까봐 무서웠느냐."
그럴지도 모른다.
"도망쳤다가 산 속에서 혼자 남게 되는 것이 무서웠느냐."
그럴지도 모른다.
가가 님이 후우 하고 한숨을 쉬셨다.
"너는 습자를 더 하고 싶은 게로구나."
- 하권. p. 386. 소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