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의 비극 - 엘러리 퀸(시공사) ●●●●●●●●◐○
매끄럽고 부드러운 뺨이었어요.
레인은 한숨을 쉬고 루이자의 흔들의자로 다가갔다.
"한 가지 빠뜨린 질문이 있습니다. 당신 손가락에 닿은 뺨은 어떤 느낌이었나요?"
순간, 그녀는 피로한 얼굴에 당황스러운 빛을 띠며 마치 입을 열어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표정으로, '어머, 제가 그걸 말하지 않았나요!' 라는 표현을 했다. 그리고 그녀는 손가락을 움직였다. 스미스 양이 떨리는 목소리로 통역했다.
'매끄럽고 부드러운 뺨이었어요.'
- p. 165. 제1막 제4장.
. 생각해보면 이 책만큼 리뷰를 쓰기 어려운 책도 없는 것 같다. 그래도 명색이 리뷰인데 와 잘 썼다 한 마디 하고 끝낼 수야 없고, 왜 대단한지, 뭐가 좋았는지, 어떤 내용인지 얘기하려고 들면 스포일러가 아닌 게 없다. 전작 'X의 비극'이 트릭을 꼬아도 너무 꼬았던 것에 비하면 이번 소설에는 그것과 반대로 초반부터 대놓고 힌트를 뿌려댄다. 솔직히 다시 읽어보면, 첫 살인사건이 일어난 후 루이자가 한 증언에서 이 사건의 진상이 밝혀진 거나 마찬가지다. 작가 엘러리 퀸은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챕터 하나에 결정적인 힌트를 몰아 퍼주고, 그 이후에도 잊을만하면 계속 힌트를 던져주고 있다.
레인은 거의 숨을 쉬지 않은 채 가늘게 뜬 두 눈을 빛내며 루이자의 모습을 날카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철봉처럼 곧게 뻗은 그녀의 오른팔은 바닥과 거의 평행을 이루었는데, 그것은 소경들이 일반적으로 취하는 자세였다. 레인의 시선은 그녀가 뻗은 손 끝 바로 아래의 융단으로 예리하게 옮겨졌다. 루이자는 한숨을 쉬며 긴장을 늦추더니 뻗었던 팔을 힘없이 내렸다. 그리고 다시 손으로 얘기를 시작했고 스미스 양이 바삐 그 내용을 통역했다.
루이자가 오른팔을 뻗은 순간, 무언가가 그녀의 손끝에 닿았다. 그 긴장된 손끝에 코가 닿았고 이어서 얼굴이.... 아니, 얼굴이 움직였을 때 뺨이 닿았다.
- p. 161. 제1막제4장.
. 그럼에도 이 소설이 정말 무서운 건, 그렇게 결정적인 힌트를 마구 퍼주는데도 불구하고 진상이 밝혀지기 전까진 마치 뇌에서 어딘가 회로 하나를 막아버리기라도 한 듯 그 사람만은 범인일 수 없다며 눈앞에 뻔히 보이는 답을 놔두고 기상천외할 정도로 어렵디 어려운 길을 찾아 수많은 오답을 쏟아내게 된다는 것이다. 정말 사람의 편견이란 얼마나 무서운지. ^^; 사실 여기까지만 해도 결정적인 스포일러를 누설한 게 아닐까 걱정이 된다. 마치 반전이 있다는 한마디가 힌트가 되는 것처럼, 전혀 생각할 수 없는 의외의 인물이라는 얘기가 - 그리고 편견이 무섭다는 말이 결정적인 힌트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 물론 드루리 레인은 그런 편견에 전혀 사로잡히지 않은 채 아무도 생각해내지 못하는 범인을 전혀 어려움 없이 뒤따라간다. 이제 그의 의문은 범인이 누구인지를 넘어 대체 범인이 어떻게 그런 범죄를 저지를 수 있었는지에 있지만, 그 역시도 사건현장에서 발견된 흉기의 아이러니한 측면이 결정적인 단서가 되어주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단서가 범인을 재확인시켜주기도 한다. 사실 이 부분은 언어유희에 가깝기에 다른 언어권의 독자들이 추리해내긴 어려울 수도 있지만, 그래도 영어인데다(....) 사실 이 부분이 아니더라도 결정적인 단서가 차고 넘치기 때문에 이걸 가지고 불평하기는 좀. :)
"하지만 전에도 말했듯이 흉기치고는 너무도 이상하지 않습니까?"
경감이 의문을 제기하자 레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그러시겠죠. 말씀대로 흉기치고는 이상합니다. 하지만 사건의 진상을 완전히 파헤쳤을 때는...."
갑자기 레인은 입을 다물더니 몹시 애처로운 눈빛을 떠올렸다. 그러나 곧 자세를 고쳐 앉으며 맑고 그윽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지금 당장은 그 의문에 대답해드릴 수 없으니, 당분간은 그 의문에 대해선 접어 두기로 합시다. 하지만 범인이 만돌린을 흉기로 사용하기 위해 가지고 들어간 것만은 분명합니다."
- p. 275. 제2막 제4장.
. 트릭 뿐만 아니라, 이 소설은 '비극시리즈'에 걸맞는 장엄하고 비극적인 결말을 보여준다. 마치 드루리 레인 자신이 연기하는 셰익스피어 비극 속의 인물들처럼, 비극적인 진상과 맞닥뜨린 드루리 레인은 끝까지 여러 방법을 짜내어 자신이 맞이하게 될 비극적인 운명을 회피하려 한다. 하지만 운명은 끝까지 그를 추적해 그에게 피할 수 없는 무거운 짐을 지우고, 결국 드루리 레인은 자신의 손을 피로 물들인 채 비극적인 운명을 끌어안고 어두운 침묵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루이자는 여전히 공허하고도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버터밀크를 들이키더니 이윽고 잔을 내려놓고 몸을 일으켜 드레스의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너무도 열심히 응시한 탓에 레인은 눈이 아플 지경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창 밖의 얼굴은 도무지 믿기지 않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곧이어 깊이 실망하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 침입자는 마치 장난감처럼 깡총거리며 사라져 버렸다.
- p. 377. 제3막 제6장.
. 사실 드루리 레인의 이 선택은 이제 와서는 꽤 많은 논란을 부르는 선택이고, 그런 선택을 할거라면 이 작품과 종종 비교되는 애거서 크리스티의 '비뚤어진 집'의 결말처럼 그에 맞는 책임을 져야 하는 게 아니냐는 비판도 있다. 그러고보면 크리스티 여사의 이야기에선 설령 그게 범죄자의 생명이라 할지라도 '생명에는 생명을' 이라는 대전제를 포기하지 않는데('커튼'을 떠올려보자), 엘러리 퀸은 이 작품이나 이후 '열흘간의 불가사의'에서도 그렇듯 그럴만한 타당한 이유가 있다면 탐정에겐 범죄자를 심판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 식의 태도를 은근히 내비친다. 그렇다고 활극이나 하드보일드처럼 별다른 죄의식 없이 이놈저놈 막 쏴죽이고 그런 건 또 아니고, 생명까진 아니더라도 작가가 이정도면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나름의 대가를 치르기는 하지만, 이걸 국가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라고 봐야할지, 작가의 개인적인 성향에서 오는 것이라고 봐야할지는 좀 애매하다. :)
p.s. 이 소설에서는 옥의 티라고 해야할지, 아니면 집필이나 번역과정에서 문장이 하나 빠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청각장애인인 드루리 레인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장면이 나온다. 검은숲 판에서는 어떻게 나왔는지 궁금하다.
"그런데 마지막 부분에서 납득이 안 가는 점이 있습니다."
경감은 풀잎을 쥐어뜯어 씹으면서 말을 이었다.
"어쩌다가 범인은(원래 이 부분엔 이름이 있습니다)루이자에게 마시게 할 작정이었던 독이 든 우유를 자신이 마시는 실수를 저질렀을까요, 레인 씨?"
레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경감에게서 슬쩍 고개를 돌리더니 주머니에서 한 움큼의 빵 부스러기를 꺼내 조금씩 연못 위로 던지기 시작했다. 흑조떼가 우아하게 헤엄쳐 와서 그 빵 부스러기를 쪼아먹기 시작했다.
경감은 앞으로 몸을 내밀고 초조하게 레인의 무릎을 두드렸다.
"레인 씨, 제 얘기를 못들으셨습니까?"
그러자 갑자기 브루노가 벌떡 일어났다. 그는 거칠게 경감의 어깨를 쿡쿡 찔렀다. 경감은 깜짝 놀라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브루노의 얼굴은 창백했고 턱의 선은 굳어져 있었다.
레인은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괴로움이 가득 담긴 눈길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브루노가 묘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봐요, 경감. 레인 씨는 지금 피로하신 모양이오. 우리도 이제는 슬슬 뉴욕으로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소."
- p. 441. 무대 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