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괴가 난무하지만, '아련한 일상 기담'입니다

잠 못 드는 밤의 궁궐 기담 - 현찬양(엘릭시르) ●●●●●●●●○○

by 눈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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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는 오늘 하등 쓸모없고 우스운 금기를 만들어낼 것이오.




높으신 분들이 볼 때는 쓸데없는 구설수나 만드는 모임이지만 오래 일하기 위해서 오히려 중요한 일입니다. 궁에 오래 있다 보면 아무리 의지가 강한 사람이라도 수이 웅덩이에 고인 물처럼 되기 때문에 그를 방지하는 것입니다. 고인 물이 썩는다는 말이 있듯이 변화 없는 생활을 지속하다 보면 권태와 무료라는 병에 걸리기 십상입니다. 그럴 때 가슴속에 깊이 묻어두었던 이야기들을 꺼내 나누면 고인 물에 빗물이 흘러내려와 새 웅덩이가 되듯이 사람의 마음을 싱그럽게 만들어주곤 합니다. 그것이 어떤 이야기이든 말입니다. 물론 이전에 들어보지 못했던 기이한 이야기라면 더욱 좋겠지요. 이야기를 듣는 경험 하나만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고 되새기고 또한 상상하게 되어 조금은 삶이 견딜만해집니다.

- p. 42. 도깨비집터.





. 리뷰를 쓰려다 문득 기담과 괴담이라는 단어에 꽂혀서 여기저기 검색을 해봤는데, 둘이 어떻게 다른지 명확하게 얘기하는 내용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소재를 가지고 분류를 하기에도 괴담이든 기담이든 귀신이나 요괴 같은 초자연적인 것들이 등장하는 건 똑같았고. 대신 알게 된 건, 애당초 우리나라의 경우엔 기담이라는 말은 있었어도 괴담이라는 말은 본디에는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처음에는 기담만 있다가 시간이 지나며 하나 둘 장르가 분화되는 과정에서 유독 공포스럽고 잔인한 부분이 괴담이라는 장르로 묶이게 된 것이 아니었을까. 초자연적인 이야기 중 공포스럽고 잔인한 부분을 묶은 게 괴담, 남은 부분이 기담인 식으로. 물론 아무 근거 없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애매한 생각이긴 하지만. :)


. 현찬양의 이 소설은 그런 분류에서라면 괴담에 속할 것이고, 요약된 줄거리 자체만 보면 괴담처럼 느껴질지 모른다. 조선이 건국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태종 집권기. 괴력난신을 배척하는 유학과 그 정점에 있던 삼봉 정도전이 전각 하나, 문 하나에 유교적 이상국가의 염원을 담아 만든 경복궁이지만 그 안에는 온갖 기이한 것들이 또아리를 틀고 있다. 비비(여우를 닮은 아름다운 요괴라 한다)를 몸 안에 품고 사는 궁녀, 작고 소담한 외관 속에 물고기 요괴라는 정체를 숨기고 사는 궁주(후궁), 궁녀들의 입에서 입으로 퍼지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수많은 금기들과 어제도 오늘도 달라질 것 없는 궁궐생활을 버텨내기 위한 한밤중의 기담회, 그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어 은밀한 곳에서 벌어지는 '춘향이 놀이'(강령술)에 이르기까지.


. 그럼에도 이 책을 (내 기준에서) 고민없이 기담으로 묶게 되는 건, 정돈된 문장과 차분하고 나즈막한 목소리로 궁에 있는 이들의 삶을 읊어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괴상한 사건들을 다루는 것보다 훨씬 많은 분량이 궁녀들과 궁주들의 일상을 그려내는 데에 할애되고 있고, 요괴가 벌이는 활극 대신 궁녀들간에 주고받는 웃음과 체념섞인 대화와 그들이 밤을 지새기 위해 나누는 이야기들이 책을 가득 채우고 있으니까. 비비를 품은 궁녀가 어린 궁녀가 불러주는 '형님'이라는 한마디에 설레고, 물고기를 품은 궁주가 여리디 여렸던 소녀시절부터 우정을 나눴던 동무와 늦은 오후의 한때를 보내는 장면이 아련하니까.





"너 지금 뭐라고 했어?"

"비밀로 해달라고...."

"그 다음 말은?"

"그러면 소녀도 형님에게 빚을...."

형님! 백희는 그 한마디에 마음이 환희로 가득 차는 것을 느꼈다. 형님이라니. 경복궁에 들어와 아무도 자신을 형님이라 부르는 사람이 없었다. 열 살 효진이부터 일곱 살 송숙에 이르기까지 모두 자신을 '백희'라고, 마치 동네 강아지 부르듯 백희라고만 불렀던 것이다. 그러고보면 태어나 머리털 나고 누구도 자신을 형님이라 불러준 적이 없었다. 같은 동네에 살던 꼬맹이들조차 그를 '도깨비집 딸'이라고 불렀을 뿐 사실은 이름도 불러주지 않았다.

그런데 형님이라니, 심지어 시키지도 않았는데 나를 높여주다니, 백희는 마음이 벅차올라 노아의 얼굴에 입이라도 맞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마노아, 나는 네 편이다. 앞으로 누가 너를 괴롭히거나 못되게 굴면 세답방으로 와서 장가 백희를 찾아. 내가 어떻게 해서든 너를 도와주마."

- p. 286. 면신례.





. 다섯 편의 이야기와 한 편의 프리퀄로 이루어진 단편집은 공들인 역사적 고증과 기담을 한데 섞어 그 시대를 생생하게 되살려낸다. 장가 백희, 남가 효진, 영유와 연수 같은 고풍스러운 듯 하면서도 묘하게 낯익은 이름의 궁녀와 궁주들은 이러한 기담과 역사가 뒤섞인 이야기 속에서 명확한 캐릭터를 가지고 읽는 이들의 덕심을 자극한다. 개인적으로는 작가의 의도나 인물설정과는 전혀 상관없이, 단지 이름이 마음에 들고 말투가 톡 쏘는 게 뭔가 귀여울 거 같다며 초급 빌런(^^;)인 효진의 팬이 될 뻔하기도 했으니(....) 역시, 현찬양은 독자를 끌어모으는 법을 확실히 알고 있는 작가다. :)


. 각자의 기담으로 시작된 이야기가 하나하나 역사의 줄기에 합류하고, 그 위에 궁에 있는 이들의 개인사가 얹혀지면서 읽는 이를 사로잡아간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과연 궁녀는 왜 사라진 것인지, 실종과 벼락 사건은 누가 조종하는 것인지, 퇴마사인 강수 선생은 과연 사건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인지, 비비를 품은 궁녀와 물고기를 품은 궁녀는 언제 어떤 식으로 마주칠 것인지 의문이 샘솟지만, 이 모든 이야기를 하기엔 페이지는 너무도 턱없이 부족하고, 아니나다를까 2권이 없고서야 말이 안될 분위기에서 책은 급마무리된다. 어서 2권을 주세요 현기증이 난단 말이에요(__) 라고 외치고 싶은 마음을 달래며 인터넷 서점을 검색했더니 1권 출간은 2022년 9월. 2권은 없음(....) 서두에 쓴 기준으로 괴담과 기담을 분류한다면, 이것만큼은 확실한 괴담인데? :)





"소녀는 오늘 하등 쓸모없고 우스운 금기를 만들어낼 것이오. 우물 안을 들여다보지 말라든가, 야간 근무 중에 휘파람을 불지 말라든가 하는 작고 사소한 금기들을. 그러면 이후에 어떤 나쁜 일이 생기더라도 사람들은 금기를 어겼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것이오."

노아는 종이에 무언가를 쓰려다가 말고 백희를 빤히 쳐다보았다.

"혹 어느 날 갑자기 사람이 사라지더라도 말이오."

그제야 백희는 노아가 무슨 일을 꾸미려는 것인지 알아차렸다. 사람이 사라져도 되는 이유를 만들어주려는 것이다. 백희는 노아의 옆에 붙어 그가 뭐라고 쓰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글자 하나하나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노아는 하찮은 기록들을 하나하나씩 읽어주었고 백희는 몇 가지 새로운 규칙들을 스스로 만들어내기도 했다. 까르르, 하는 소리가 행각 너머로 멈추지 않았다. 바야흐로 사춘기였고 소녀다운 웃음이었다.

- p. 307. 면신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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