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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월 Oct 18. 2021

생각보다 더 고통스러운 가스라이팅

프롤로그 <나는 가스라이팅에서 벗어나는 중입니다.>

 가스라이팅이 얼마나 교묘하고 은밀한지 놀랬던 일화가 있다. 나는 수년 전 가스라이팅 피해를 입었었고, 그 상황을 누구보다도 옆에서 지켜보았던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가스라이팅이라는 용어도 알려준 친구였다.

어느 날 그 친구는 나에게 남자친구가 이런 말을 하는데 이것도 언어 폭력이냐고 물었다.


"회사에서 일이 있어도 자기 전화가 먼저래  회의 중이여도 나와서 받아야만 한대."

"너가 어리기를 해, 예쁘기를 해. 라고 해."


 분명 이 친구도 데이트 폭력을 당하는 중이였다. 더 놀라운 것은 더 있었다.

나보고 고아래

 나는 '고아'라는 말을 평소에 잘 쓰지 않기 때문에, 이 친구가 작고 예뻐서 가수 보아라는 줄 알았다. 그게 아니라 친구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일을 가지고 연인에게 '고아'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 친구는 지금 이 상황이 데이트 폭력이 맞는지, 가스라이팅을 당하고 있는 건지 나에게 되물어서 정말 놀랬던 적이 있다.


"욕이 아니래도 해서는 안되는 말이 있어. 너에게 하는 말은 다 언어 폭력이야."


그만큼 가스라이팅을 알아도 객관적으로 상황을 인지하는 것은 어렵다. 흔히 데이트/가정 폭력이라고 하면, 물리적인 폭력이나 욕설이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하면 이미 심각한 가스라이팅 증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고, 이 전부터 다른 조짐들이 충분히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갑자기 처음 보는 사람에게 욕설과 폭력적인 행동을 하면 바로 경찰에 신고를 하고, 지금 상황이 정상적인 상황이 맞는지 묻는 일은 없을 것이다. 가스라이팅은 연인, 가족, 직장 내 관계 등 가장 가까운 관계에서 잘 일어나고, 처음부터 자기의 계략을 알려주면서 접근하는 법이 없어서 좀처럼 알아차라기 어렵다.


 사실 십 년 만 해도 가스라이팅이라는 용어는 굉장히 생소했다. 이제는 뉴스나 많은 사람들이 이 말을 사용하는 것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나는 그 이유를 2010년대 중반부터 일어난 미투 운동과 함께 데이트 폭력, 스토킹 그리고 학교 폭력 이슈에 대해 사람들이 관심을 갖게 되고 분노하며,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 편에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회적인 관심이 높아지면서 비인간적인 행태가 일어난 원인을 파악하고, 재발 방지를 위해서도 이를 설명해 줄 용어들이 필요로 했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가스라이팅이라는 말이 널리 사용되는 것은 사람들이 비정상적인 관계를 인지하고 관심을 갖는다는 점에서 다행스럽다. 그럼에도 10년 전에 비해 가스라이팅 이슈가 줄어든 것은 아니라서 마음이 너무도 무겁다. 직장 내 괴롭힘, 미성년자 성 착취 물 이슈, 데이트/가정 폭력 등의 상황 등만 봐도 가해자 및 가해 집단이 처벌을 받고는 있지만, 처벌 수위도 미약할 때가 많고 피해자들은 고통은 쉽게 사라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스라이팅 경험자로서 이런 비인간적인 관계는 겪고 있는 동안은 물론이고 그 이후로도 고통이 오랫동안 지속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비정상적인 상황인 만큼 주변 사람들과 쉽게 공유할 수도 없고, 공유를 한다고 해서 이해받거나 온전히 공감을 받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건은 종료되었어도 정서적 고립감이 날이 가면 갈수록 더해졌다.


 예전의 고통스러웠던 환경에서 벗어났어도, 수년이 지나도록 가스 라이팅으로부터 겪는 고통의 무게까지 한 번에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큰 트라우마였던 만큼 자칫 방심하면 삶의 목적과 의미도 잃기 쉬워 우울의 늪에도 잘 빠지게 된다. 가스라이팅 상황을 겪어본 사람이라면 평범한 듯 하루하루 사는 것이 피해자에게는 부단한 노력을 요한다는 걸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 아닌 세상의 어떤 이도 이런 비정상적인 인간관계를 겪으면서 소중한 삶을 무가치하다고 여기거나 벗어날 수 없는 고통이라 생각하고 좌절하지 않길 바란다. 가스 라이팅으로부터 벗어나 고통 속에서 방황을 많이 했을 때 어떤 방식으로든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다. 기억을 정리하고 끄집어낼수록 제자리를 되돌아 나 홀로 세상의 짐을 다 지고 있는 느낌을 받곤 했다. 사건과 관련된 기억과 닮은 티끌 하나라도 뇌리에 스치면 칼에 베인 듯 아팠다. 언어폭력은 기억이 허락하는 한 계속해서 되살아 자존감을 계속해서 갉아먹는다. 물리적 폭력은 눈감으면 바로 지금 일어나는 것처럼 선명한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그럼에도 내가 용기를 내서 세상에 내 이야기를 하겠다고 마음을 먹은 건 보잘것없는 아주 작은 목소리여도 누군가 한 명은 도움을 줄 수 있길 바라는 마음이 컸다. 나 역시 같은 처지에 있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조금씩 치유가 되었기 때문이다. 가스라이팅에 관한 웹툰, 글 심지어는 논문도 찾아보면서 나만이 겪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에서 용기와 위로를 받았다. 가스라이팅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미연에 방지를 하려면 적어도 하나의 사건에 대해 깊게 들여다보는 경험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본인이 겪어보지 않고, 불공정한 관계라는 것을 바로 인지하지 않으면 너무도 교묘하고 은밀해서 나조차 모르게 당해버리는 상황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아직도 나는 치유 과정 중이긴 하지만 가스라이팅에 대해 겪고 느낀 점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내가 할 수 있는 한 자신도 모르는 사이 당하고 있는 가스라이팅을 그대로 방치했을 경우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를 나누고 싶다. 그리고 가스라이팅 상태에 있거나 벗어난 사람이 겪는 후유증과 온전하게 자유로워지는 법에 대해서도 나누면서 나도 온전히 치유되고 싶다.



* 이 글은 공익적인 목적을 위해 쓰여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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