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들의 심리적, 물리적 수법에 대하여
가스라이팅을 겪어본 사람은 안다. '가스라이팅인 줄 알았을 땐 이미 상황이 너무 심각했다'는 점을 말이다. 잘못된 만남이라는 걸 처음부터 알았다면 피했겠지만, 미리 알기도 어렵고 벗어나려고 해도 쉽게 벗어날 수 없다. 나도 한 때는 뉴스를 보면서 이런 의문이 들었다
정상적인 거래가 아닌데, 사기인 줄 몰랐던 걸까?
몇십 년간 가정 폭력에 시달리면서도 왜 벗어나지 못하는 걸까?
막상 경험을 해보니 가스라이팅은 교묘하고 은밀했다. 가랑비에 옷 젖는 식이라 상황의 심각성을 빨리 인지하기 어려웠다. 상대의 말에 나도 모르게 차츰 설득이 되어가니, 놀랍게도 나중에는 내 생각이 아닌 상대의 논리에 맞추어 생각을 하게 되었다. 세뇌가 되어 무리한 요구도 복종했고, 하기 싫어도 어쩔 수 없이 따르다 보니 반복된 좌절로 너무도 무기력해져서 주체적인 삶을 살기가 어려웠다.
가스라이팅은 깨닫는 것조차 쉽지 않고, 설령 알게 되더라도 당당하게 맞서기가 어려워진다. 나의 안전에 직결되는 문제임에도 말이다. 상황을 뒤늦게라도 바로 잡고 싶다면 상대의 주장에 오랜 시간 설득되고 뭉개져버린 내 자아를 되찾아야만 한다.
먼저 가스라이팅을 시도하는 사람들을 '가스라이터'로 지칭한다면, 가스라이터는 나의 예상보다도 더 많은 성격적 결함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에이~ 설마 사람이 이 정도까지는 하지 않겠지’라고 믿는 심리적, 사회적, 도덕적인 마지노선을 쉽게 넘어 버린다. 그래서 예측이 어렵다.
소시오패스처럼 목적을 위해 거짓말을 하면서도, 일말의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는다. 평범한 사람들은 한 사람의 인성이 어디까지 바닥이 될 수 있는지 미처 예상하지 못한다. 가스라이터는 이 허점을 노리기 때문에 평범한 사람들은 빨리 알아차리기 어렵다. '자기애성 인격장애'에 대해 자료를 찾아보면 그 이유를 좀 더 이해할 수 있다.
가스라이터는 상대가 비정상적인 관계임을 알아차렸을 때 쉽게 빠져나가기 어렵도록 여러 장치를 걸어버린다. 돈거래가 오가는 계약이라면 신뢰를 얻기 위해 그럴듯한 계약서를 작성한다. 연인이라면 혼인 신고를 하게 만들기도 한다. 정상적인 절차나 관계처럼 보이도록 법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다. 이렇게 법적으로 엮여버리면 추후에 문제를 알아차리더라도 쉽게 빠져나오기가 어렵다.
때론 ‘물리적인 장치’를 사용하기도 한다. 실제로 나의 경우는 문 앞에 CCTV를 설치하여 감시를 한다거나, 앱을 설치하고 일상 활동을 감시하고 통제하면서 쉽게 나가지 못하도록 했다.
'설마 이렇게까지 한다고? 자신도 잃는 것이 많을 텐데?' 싶을 것이다. 가스라이터가 제일 원하는 것은 합리적인 행동과 결과가 아니다. 비합리적이고 비윤리적이어도 타인을 자기 마음대로 조종하고 이용하려는 목적이 커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가스라이터들은 인간관계를 통제하여 상대를 서서히 사회적으로 고립시키려고 한다. 비정상적인 관계를 지속시키기가 수월하기 때문이다. 피해자는 사람들의 도움을 받기 어려우니 점차 판단이 흐려지고 벗어날 수 없다는 무력감을 갖게 된다.
대표적으로 사이비 종교는 신자들을 사회적으로 고립시키고 자신들만의 진리를 강요하여 교주의 말만 믿도록 만든다. 많은 가정 폭력 사례를 보아도 피해자가 누구에게도 도움 요청할 수도 없도록 친구, 가족, 친척 등 도움을 줄 사람을 멀리하게 만든다. 아예 이사를 가게 만드는 경우도 있고, 누군가와 연락을 하는지를 시시콜콜 전부 감시하기도 한다. 아니면 처음부터 사회적으로 고립되어 있는 사람들을 타깃으로 하기도 한다. 그런 사람들의 취약한 상태를 이용하는 것이다.
성인이라면 전적으로 내가 누굴 만나는지는 내가 선택하고 책임질 일이다. 그럼에도 가스라이터는 지속적으로 자신의 행동대로 움직이도록 강요한다. '네가 일으킨 피해는 이런저런 이유로 나도 피해를 입는다. 그래서 너는 내 말대로 해야 해', '나는 그 사람이 싫으니 너도 만나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를 존중하지 않는 것이다'. 등의 억지를 부린다.
만약 지금 이와 비슷한 처지에 놓여있고, 이 문제에 대해서 주변 사람에게 말을 꺼내기 어렵다면, 그건 심각한 가스라이팅에 놓여있다는 증거이다. 예를 들어 몇 년 전 대학 연구실에서 비뚤어진 교수와 제자의 관계로 인해 심각한 폭행이 수년간 발생했음에도 피해자는 그 사실을 외부 사람에게 절대 말하지 못했다. 특히 피해자에게 수치심을 유발하는 행동을 하게 만들 경우 아무리 친한 지인이라도 쉽게 도움을 요청하기 어렵다.
가스라이터는 자세히 보지 않으면 어떤 흠도 찾을 수가 없다. 좋은 학교나 회사를 다닐 수도 있고, 행복해 보이는 가정이 있거나 자신 만의 사업체를 성공적으로 운영하기도 한다. 일에서의 성취와 한 사람의 인격을 연결 짓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럼에도 한 사람을 둘러싼 여러 타이틀과 허울 때문에 주변 사람들은 그를 반사회성을 가진라고 잘 인식하지 못하게 된다.
게다가 가스라이터들의 성격은 사람의 마음을 조종하기 위해 차가운 냉혈인간의 모습일 것 같지만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사실 어느 상황에서나 자신의 모난 성격을 들어내는 사람은 쉽게 알아차릴 수 있고 맞서 싸우거나 피하기도 쉽다. 가스라이터들은 초반에 자신의 모습을 철저히 숨기기 때문에 편견에서 벗어난 경우가 많고 그래서 빨리 성격을 파악하는 게 어려운 것이다.
초기 관계의 가스라이터는 상대의 관심사를 찾아내거나 공통점을 보여주면서 같은 심리적 공감대를 형성하고 신뢰를 쌓는다. 자연스럽게 상대는 부탁을 받더라도 거부감 없이 그 부탁을 들어주게 된다. 초기 유도 과정을 통해 친한 친구 관계, 연인 등의 관계로 발전이 되기 쉽다. 사이비 종교나 비정상적인 다단계가 어떻게 사람들을 만나는지 생각해보면 간단하다. 가면을 쓴 것처럼 자신의 의도를 감추고 상대의 약점을 공략한다. 경제적으로 힘들고 어려운 사람에겐 달콤한 성공과 수익을 약속하고, 심리적으로 불안하고 우울한 사람에겐 정서적인 안정을 약속한다.
상호 신뢰관계(라포)를 쌓으면, 좀 더 적극적으로 상대에게 측은지심을 유발하고, 공감을 유도하면서 거리감을 좁힌다. 남에게 말하기 어려운 일을 털어놓는 듯하면서 특별한 신뢰 관계를 맺고 있다는 느낌을 주고, 측은지심을 불러일으킨다.
이때 공감을 잘하고 측은지심이 많은 사람일수록 가스라이팅을 당하기도 쉽다. 최근 SNS를 통해 이루어지는 로맨스 스캠이 바로 이런 수법을 사용한다. 가해자가 털어놓는 고민에 감정이입을 하면서 상대의 도가 지나친 부탁이나 요구에도 상대의 그럴만한 사정을 헤아려서 도움을 주고 싶어 진다. 가스라이터는 이런 행동이 아주 능숙해서 아이러니하게도 피해자는 무리한 부탁을 들어주면서도 상대를 도왔다는 뿌듯한 감정까지 느끼게 되기도 한다.
나의 경우에도 상대는 전 연인들에게 받은 지속적인 상처로 인해 사람을 신뢰하기 어렵다고 했다. 나는 그 상처와 트라우마가 나아질 수 있다면 기꺼이 도와주고 싶었고, 불신이 사그라질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해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앞으론 어딜 가든지, 무엇을 하는지 알려주는 것에 동의했다. 상대는 이 말을 듣자 울먹거리며 자신을 이해해줘서 고맙다고 했다. 그때는 이것이 불러올 파장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나는 이타적인 마음으로 상대의 마음에 공감하고 도와주고 싶었을 뿐인데, 어느새 나의 행동을 감시할 수도 있도록 허락한 셈이 되었고, 그 사람이 부탁하는 일을 하지 않으면 나는 그 사람을 상처 주는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가스라이터가 말하는 자신의 비밀이나 과거의 상처는 사실일 수도 있고, 거짓일 수도 있다. 사실을 기반으로 말한다고 해서 그들을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그런 사건들을 이용하여 안심을 시키고, 친밀감을 유도하려 한다. 신뢰가 한번 쌓이기 시작하면 가스라이팅이 일어나도 쉽게 아니라고 부정하기가 어려워진다. 피해자가 자신이 느꼈던 가스라이터의 인간적인 매력에 대해서 확신을 많이 했을수록 전략적으로 그들의 의지대로 피해자를 조종하기 쉬워진다. 보통은 진실과 거짓을 적절히 섞어서 상대에게 호감을 느낄 수 있도록 장치를 마련한다.
가스라이터는 우리의 편견을 뛰어넘는 모습으로 나타나 공감과 신뢰를 쌓아가며 상대를 조종하려고 접근한다. 그래서 감쪽같이 속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가스라이터가 무서운 이유는 자신의 편의를 위해 상대의 진심 어린 마음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사랑, 우정, 어떤 대의나 진리 등의 명분을 앞세워 성 착취나 금전적 이득 등 자신이 원하는 점을 다 얻을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마치 기생충과 숙주의 관계다. 기생충은 숙주의 취약한 점을 파악해서 그 점을 공략한다. 기생충은 숙주가 원하는 것을 준다고 거짓말을 할 순 있지만 빼앗기만 할 뿐 이익을 주지 않는다. 하나를 주는 것 같아도 열을 가져가는 식이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도 ‘왜 가스라이팅을 당했을까’, ‘그 사람은 왜 저런 일을 모르고 당하기만 했나? ‘라는 자책이나 비난은 하지 말아야 한다. 쉽게 벗어날 수 없도록 발목을 잡는 이유는 그들의 수법에 있지 당한 사람에게 있지 않다. 가스라이팅임을 인지하는 순간 자책보다는 한시라도 빠르게 벗어나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 그리고 다시는 그들의 수법에 넘어가지 않도록 나의 어떤 취약한 부분을 공격했는지 점검해보고 공격받지 않도록 자신을 다시 정비하면 된다.
지금까지 나열한 가스라이터들의 수법에 대해서 하나라도 공감이 가는 것들이 있고, 혹시라도 이런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지는 다음 글에서 더 자세히 나눠보려고 한다.
* 이 글은 공익적인 목적을 위해 쓰여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