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2. 가스라이팅에서 벗어나기
가스라이팅인 것 같아, 그런데 아직은 잘 모르겠어.
만약 지인이 가스라이터(가스라이팅을 하는 사람)와의 이별을 주저한다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굉장히 답답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 것이다. 동시에 어쩌면 본인이 선택하고, 원하는 걸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사실 이런 상황은 심리적 지배를 당하는 당사자가 가장 괴롭다. 가정 폭력을 당해도 쉽게 그 가정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사람들도 아마 비슷한 심리상태일 것이다.
나도 가스라이팅인줄 알면서도 벗어나는 과정에서 자꾸만 발목을 잡는 심리적 불편함이 있었다. 왜 그런 건지 이유를 찾고 싶어서 생각하고 또 생각했던 날들이 있었다. 그때 나는 언제 트집이 잡힐지 몰라 전전 긍긍하며 매일을 전쟁처럼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이성적인 판단으론 비정상적인 관계라는 것을 다 알고, 벗어나기로 마음을 먹은 후에도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심리적 불편함이 계속 남아 있었다.
이 과정에서 우연히 테드(TED, 미국에서 주최하는 다양한 주제의 콘퍼런스) 영상을 보게 되었다. ‘왜 가정폭력 피해자들은 떠나지 않는가?’라는 제목이었다. 발표자인 레슬리는 내가 찾던 바로 그 궁금증에 대해 자신의 사례를 들어 설명하고 있었다.
영상은 충격적이었다. 미국에서 3명 중 1명은 평생 언젠가는 가정폭력이나 스토킹을 경험한다고 했다. CDC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 보고에 따르면 매년 1500명의 아이들이 학대를 받고 있다고 했다. 나도 모르게 미국이라면 다를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발표자는 자신이 학대받는 줄 몰랐다고 한다. 자신만의 특이한 상황에 놓여 놓였고, 혼자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스스로를 매우 강한 여자로서 문제가 좀 있는 사람을 만났고, 그 사람을 도와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내가 혼란스러웠던 바로 그 지점이었다. 나 역시 가스라이팅인 줄 몰랐고, 굉장히 특수한 케이스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 강연자도 나와 너무도 동일한 생각을 했던 것이다. 나는 세상 누구도 이해해줄 수 없는 곤란한 문제에 빠졌다고 생각했지만 특별할 것 없는 전형적인 가스라이팅 피해자였던 것이다.
특히 강연자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어린 시절의 아픔, 외로움을 토로했잖아. 그러니 내가 외면할 수 없지.'
'저런 행동을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을테니.. 내가 해보자. 그게 서로를 위하는 길이야'
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마지막 폭력에서 그대로 두면 자신을 살해할지도 모른다는 걸 깨닫고 모두에게 알리기 시작했다. 전체적인 상황이 굉장히 유사했고, 나도 레슬리와 같은 위험에 있다는 점에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그때부터 점차 불편했던 마음이 조금씩 안정을 찾아갔다.
그동안 아무도 말해준 적 없었지만 나는 이 영상을 통해 다행히도 가해자를 떠나는 것이 엄청나게 위험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쩌면 그 점을 미리 인지했기 때문에 내가 좀 더 안전하게 관계를 정리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영상에서 ‘가정폭력 패턴의 마지막은 피해자를 살해하는 것이다. 가정폭력 살인자의 70프로는 피해자가 관계를 정리했을 때 일어난다. 계속되는 장기간의 스토킹도 만연하다. ’는 말이 계속 귓가에서 맴돌았다.
다행히 내 곁에는 함께 해 줄 가족이 있었고, 가해자는 외부로 이 사실이 알려진다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럼에도 안전하게 헤어진다는 것이 쉽진 않았다. 그 당시 나의 핸드폰과 노트북은 주기적으로 체크를 하고 있었고, 조금이라도 삭제가 된 흔적이 보이면 무엇을 검색했는지 확인하고 괴로운 취조하는 시간이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내가 어떤 협박에도 돌아오지 않자 순순히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면서 후회한다고 하고, 눈물까지 글썽였다. 그러니 내가 실수하는 것인가? 반문하게 되었다. 이것 역시 많은 가스라이터들이 보이는 회유책 패턴이다.
이때 나는 생각했다. 그가 진짜로 변했다면 그 이후에 시간을 두고 어떻게 지내는지 보면 될 일이라고. 물론 그가 정상인으로 살지라도 내가 다시 만나준다는 뜻은 아니었다. 다만 그런 기적이 일어나는 건지 궁금했다. 어떨 것 같은가? 기적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여전히 자신의 속내를 감추고 원래 살던 그 방식대로 살아가고 있다. 한 사람을 착취했던 경험을 가진 사람은 쉽게 정상적인 사회관계를 맺기 힘들어지는 것 같다. 마치 권력에 취한 권력자처럼 쉽게 사람을 이용할 수 있는 경험을 했고 양심에 어긋나는 행위를 반복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마음 한편에서 불편함이 남아있는 사람은 고다 요시이에의 <자학의 시>를 추천한다. 굉장히 좋아하는 책이고 나에겐 운명을 바꿔놓은 책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줄거리를 여기에서 말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충분히 자신의 의지로 바꿀 수 있는 불행을 운명처럼 받아들이는지, 가스라이터를 왜 참고 견디면서 사랑의 의미로 해석하는지 이해 할 수 있다. 내가 궁금했던 지점을 이 작가는 이미 알고 있다고 느꼈다.
가스라이팅은 어떤 관계에서도 존재할 수 있다. 부부, 가족, 연인, 친구 심지어는 직장 내 동료까지도. 우리에게는 이혼, 독립, 이별과 이직이라는 선택권이 있다. 그럼에도 마음 한편이 불편하다면 한번 비슷한 사례를 찾아보면 어떨까? 나 혼자만의 특수한 상황이라 생각했던 것이 아니라 보편적으로 가스라이팅을 겪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유사한 일들임을 발견할 수도 있다. 안도와 함께 동질감과 유대감을 느끼는 순간 의외로 마음에서 이런 소리를 들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여기서 떠나도 괜찮아.'
끝.
- 한글 자막이 있는 테드 영상 :
https://youtu.be/imdWIkawrnM
* 이 글은 공익적인 목적을 위해 쓰여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