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3. 가스라이팅에서 온전히 자유로워지기
가스라이팅과 역사적으로 가장 히트 친 시트콤 '프렌즈'가 대체 무슨 관계인가 싶을 수 있다. 물론 프렌즈가 스릴러, 호러물이 아니니 심각한 가스라이팅이 나타나진 않는다. 다만 이 작품은 대중적이면서도 현실적인 연애 관계에서 미처 인지하지 못하고 넘어갈 수 있는 가스라이팅의 좋은 예시가 될 수 있어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이 작품을 만나게 된 계기는 최근 미국에서 프렌즈 특별판 제작을 17년 만에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전부터 한번 봐야겠다 생각을 했던 터라 프렌즈를 보기 시작했다. 첫 시즌은 지금과 거의 20년의 시대 차이가 있고, 시트콤이긴 하나 나에겐 그저 어색한 영미권 유머 때문에 '이게 그렇게 재미있는 것일까?' 싶을 정도로 몰입이 덜 되었다.
그렇지만 워낙 프렌즈는 한국인에게 영어 공부로 유명한 드라마였기에 공부 삼아 본다 생각하고 별 기대 없이 한 시즌을 계속 보았다. 보다 보니 현재 한국에도 가져오기 힘든 파격적인 소재들을 다 이야깃거리로 풀어냈다는 점이 놀라웠다. 구식의 핸드폰과 집에 와서 전화 응답기를 확인하는 모습이 조금은 이질감이 느껴지고 어색했지만, 시즌을 넘어갈수록 시대 차이보다는 그 시대 속을 살고 있던 구성원과 지금 현재의 우리 삶이 한편으로는 별반 다르지 않다는 점이 흥미로워 금세 이입을 하게 되었다.
아래부터는 줄거리와 결말이 나오기 때문에 원하지 않는다면 다른 브런치 글을 추천한다.
줄거리를 간단히 소개하면 프렌즈엔 남자 셋, 여자 셋이 나온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선 대표 커플이 있다. 로스와 그의 9년 짝사랑인 레이첼이다. 로스는 고생물학 박사학위를 가지고 박물관에서 일을 한다. 레이첼은 사랑 없이 치과 의사와 결혼하려다가 결혼식에서 도망친 후 스스로 삶을 개척해 보려고 카페에서 웨이터리스로 일을 한다. 레이첼은 로스에게 관심이 없었지만, 로스는 레이첼 곁을 맴돌다 결국 그 둘은 사랑에 빠진다.
문제는 커플이 된 이후 로스의 행동에서 비롯된다. 로스는 레이첼을 사랑하지만 늘 불안해한다. 드라마는 로스가 레이첼을 오랫동안 짝사랑하며 이뤄질 수 없다고 생각했던 이상형이었기에, 그리고 전 부인과의 이혼으로 인해 집착과 불안이 더 심해지는 것으로 그린다.
로스는 자신의 높은 학력에 자부심이 있었고, 그로 인해 은근히 레이첼을 지적으로 낮게 보는 행동들과 자신의 소유로 보는 행동을 한다. 이런 모습은 전 시즌 내내 이어져 참 보는 내내 거슬리고 불편했다. 주변 모두가 로스가 고등학생 때부터 레이철을 너무도 사랑한다는 것을 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행동에 대해 크게 문제를 삼지 않는다.
레이첼 역시 로스와의 관계를 힘들어하고 잠시 시간을 갖자고 말을 하지만, 로스가 자신을 조종하려고 한다고는 생각하지 못한다. 그런데 실제 연인 관계에서 이런 행동이 나타나면 이건 무조건 가스라이팅 신호라고 볼 수 있다.
시즌 중반부터는 레이첼도 천운과도 같이 원하던 패션 분야에 일자리를 얻게 된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그 일에 애착을 갖고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더 큰 사회로 나가려 한다. 그러나 로스는 응원하고 도와주기보단 일을 소개해준 사람과 어울릴까 봐 줄곧 방해하고 무례한 행동을 많이 한다.
잠시 시간을 갖자는 레이첼 말에 로스는 영영 헤어졌다고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과 하룻밤을 보낸다. 이 일로 헤어진 이 둘은 계속해서 다시 이어질 듯 친구인 듯 인연을 이어나간다.
여기에 다른 친구 조이가 등장한다. 조이와 레이첼은 룸메이트로 지내며 자연스레 많은 대화를 통해 점차 서로에게 힘이 되고 부족한 점을 채워나가며 성장한다. 곧 조이는 레이첼을 사랑하게 된다. 조이는 무명의 배우로 생활이 불안정하지만 자신의 직업에 대한 자부심도 강하고 꿈에 대한 열정도 많다. 인기가 많은 조이는 짧은 사랑만을 반복했지만 처음으로 깊은 진짜 사랑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레이첼은 로스의 전 연인이기에 조이는 마음을 숨기려고 한다.
어렵사리 조이는 마음을 정리한 후 시간이 지나 다른 연인을 사귀게 된다. 그동안 사랑을 배운 조이는 새로운 연인에게 진심으로 다가가 이전과는 다른 연애를 하며 한층 성장한다. 사랑을 통해 서로가 긍정적으로 성장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레이첼도 조이를 통해 웨이트리스에서 자신이 원하던 패션 업계로 가게 되는 계기를 마련한다. 이런 관계가 이전의 연인 관계보다 훨씬 서로에게 도움이 되고, 바람직한 관계다.
그러나 조이가 마음을 접은 후 안타깝게도 이번엔 레이첼이 조이를 사랑하게 된다. 내가 가장 뭉클했던 부분은 마음이 아이와 같이 순수한 조이는 레이첼은 미혼모로 임신을 하게 되고 오갈 때 없는 처지가 되자, 레이첼에게 자신의 집을 내어주고, 마루 한 귀퉁이를 내어 아기방으로 꾸며주는 부분이다. 조이의 싱글 라이프를 방해할까 봐 걱정하는 레이첼에게 그는 자신이 아기와 같이 살 수 있다며 받아주려 한다. 그리곤 아빠 없이 아이가 자랄 수는 없다며 아빠가 되어 주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타이밍이 어긋난 레이첼과 조이는 결국 연인으로선 이뤄지지 못한다. 후일담에 따르면 실제 배우인 로스와 레이첼은 이 둘이 커플로 남는 것을 극구 반대했다고 한다. 이런 영향인지 결국 이 둘은 사랑이 아닌 친구로 남기로 마무리되고 결국 레이첼은 로스와 이루어지는 결말로 끝난다.
물론, 내용 상 친구의 전 연인과 이뤄지는 결말은 불편하다. 그런데 로스와 레이첼이 함께 하기로 하는 그 과정 역시 참 불편하다. 그들 스스로도 우리 사이는 문제 투성이라고 외친다. 레이첼이 임신을 해서도 레이첼과 로스는 공식적으론 친구 사이로서 지내며, 로스는 부부가 아닌 아이의 아빠로서만 책임을 다한다. 그러면서도 로스는 레이첼이 누군가와 만나거나 연애를 시작하려는 걸 못마땅해하는데, 문제는 로스 자신은 끊임없이 데이트를 한다는 점이다. 조이와 레이첼이 함께 하지 못하는 이유가 친구의 연인이었기 때문인데, 시즌 후반에 가서 로스 역시 조이의 연인인 찰리와 사랑에 빠진다.
사실 현실적으로도 아이의 아빠이자 안정적인 직장을 가진 로스를 택하는 것이 수입이 불안정하고 현실 감각이 부족한 조이보다는 더 나을지 모른다. 게다가 앞서 언급한 것처럼 로스는 고등학교 때부터 레이첼을 짝사랑했고, 레이첼은 로스의 그런 모습에 진실한 사랑을 느낀다.
로스가 레이첼을 덜 사랑하기에 빚어진 '잘못된 만남'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분명 어린 시절부터 오랫동안 마음에 품고 있었으니 그 나름의 사랑은 분명히 존재했다. 다만 로스도 계속해서 레이첼에 대한 질투과 그로 인한 다툼이 반복되었음에도 곁을 떠나지 못했던 것은 어린 시절에 가지고 있던 일종의 첫사랑에 대한 환상, 학교에서 유명하고 예뻤던 사람을 내 곁에 두었다는 만족감 때문였다고 생각한다.
이전의 나 역시도 연애에 있어서 가장 집중했던 부분은 타인이 얼마나 나를 진실로 사랑하는지 여부였다. 현실에서 오는 어떤 장애물이 있더라도 사랑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믿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사랑의 진실 여부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상대가 나를 순수하게 사랑하는 것만 고려했던 것이다. 나의 이런 인식은 인간관계에 있어서 많은 문제를 만들어 냈는데, 그 이유는 나랑 가치관과 삶의 방식이 잘 맞지 않아도 나를 사랑해줄 수 있었고, 통념과는 다르게 소위 사기꾼도 때론 사랑을 할 수 있었다. 경험을 통해 시간이 지나면서 상대의 진실한 사랑보다 선행되어야 할 점은 일단 나와 좋은 친구여야 한다는 점을 깨달았다.
친구 중에서도 정말 단짝 친구는 현재의 나에게 큰 기쁨을 준다. 매일 만나서 이야기를 해도 질리는 일도 없고, 오해와 다툼이 생겨도 금세 서로를 이해할 수 있기에 문제를 같이 해결 해 갈 수 있다. 약간의 서로의 가치관은 다를 수 있어도 상대의 삶이 내 삶과 너무도 괴리가 커서 삶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일들에 대해 나눌 수 없을 정도는 아니다.
레이첼과 조이 역시 친구로 시작된 인연이다. 그래서 편안하게 서로에게 자신의 모습을 노출하고 교감을 쌓아가며 시간을 보냈다. 드라마에서 그려지는 둘 사이의 대화에는 서로가 유머 코드도 닮아있었다. 이런 점에서 조이와 레이첼의 엇갈린 운명을 보며 만약 둘이 이어지는 결말이었으면 어땠을지 상상을 하게 되었다.
시즌 막바지에 이르러 뉴욕을 떠나 파리로 갈지 고민하는 그녀에게 조이만은 좋은 기회이니 꿈을 찾아 가보라고 응원해준다. 이런 점은 옛 연인과 확연히 다르다. 로스는 레이첼이 뉴욕에 남길 바랐다. 그리곤 레이첼은 로스의 말 때문인지 비행기를 타지 않고 뉴욕으로 돌아온다. 프렌즈에서 결국 로스와 레이첼 이 둘을 엮어준 것은 정말로 관습과 편견에 따른 결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도저히 로스가 연애시절에 보여준 모습 때문에 그 둘이 과연 그 뒤로도 행복했을지 상상이 안되었다. 프랜즈의 엄청난 성공 이후로 프렌즈는 전 세계 청춘 남녀가 출연하는 시트콤의 기준이 되었기에, 그 당시에 파격적인 소재들을 다 삼은 김에 차라리 반대의 여론을 무릅쓰고서라도 조이와 이뤄지도록 했으면 어땠을까.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것이 없었지만, 이건 아니라는 생각에 결혼식에서 뛰쳐나와 원하던 분야에서 인정받았고, 사랑 없이 결혼할 수 없다고 미혼모로서 아이를 낳아 기르는 레이첼. 가난하더라도 배우의 꿈을 위해 노력하여 끝내 TV 드라마에 출연하며 커리어를 쌓아가는 조이. 이 둘은 가치관 면에서도 정말 잘 어울리는 한 한쌍이었고, 서로 커플로 맺어졌다면 어땠을까. 17년이 지난 특별판에서 그 둘은 '모두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라고 해도 머리를 끄덕이며 정말 그랬을 거 같다는 기대를 할 수 있었을 것 같다.
* 이 글은 공익적인 목적을 위해 쓰여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