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기다림은 설레임이다.

언제부터 기다림은 시간 낭비가 되었을까.

by 시월아이

오늘도 나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 후 스마트폰 락을 해제하고 그 짧은 몇 초동안 카카오톡 메시지와 오늘의 주가, 그리고 코인 시세를 확인했다. 중요한 건 없었지만 습관적으로 엘레베이터를 기다리면서 하는 행동이었다.

더운 여름날은 누구에게나 엘레베이터 기다리기는 힘든 일이다. 1층에서 올라오는 엘레베이터가 25층 꼭대기층까지 갔다가 여러차례 섰다 움직였다를 반복하면 "아, 택배!" 하며 한탄과 한숨과 짜증과 노여움이 섞인 말을 내뱉는다. 출근과 아이들 등교 시간에 여러 사람들이 한꺼번에 엘레베이터를 이용하게 되면 아침에도 이런일이 빈번하게 일어난다.


30초도 채 되지 않는 엘레베이터 안에서조차 인간의 눈은 스마트 폰에 고정된다. 하물며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시간이나 아침 산책, 헬스장에서 근력 운동을 하는 다소 긴 시간은 말할 것도 없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불문하고 하교를 하는 아이들은 스마트폰부터 켠다. 집에 오는 내낸 친구들과 수다를 떠는 대신 각자의 핸드폰으로 몇 시간동안의 답답함을 해소하듯 산소를 공급받는다.


스마트 폰도 MP3도 없던 그 옛날 먼 길을 걸어서 혹은 기차로 이동하던 사람들은 그 오랜 시간 어떤 생각으로 시간을 보냈을까. 도착 시간도 모른채 하염없이 마을버스를 기다리던 그 시절 인간의 머릿속은 공백으로 가득차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공백은 우리를 바보로 만들지 않았다. 우리는 기다림을 온 몸으로 느끼며 자연의 변화와 날씨의 흐름으로 시간을 체감했고 조만간 벌어질 버스의 도착과 목적지에서의 누군가와의 만남, 어떤 사건을 기다린다는 설레임으로 가득차 있었을 것이다. 때론 누군가에게는 그 기대가 엇나가 평생의 막연한 기다림으로 남기도 했을 것이다.


그리움과 설레임을 채웠던 그 기다림의 시간들은 이제 스마트 폰이라는 작은 손안의 기계로 모두 빼앗겨 버렸다. 끊임없이 우리의 뇌를 자극하는, 일방적으로 (때로는 강제적으로) 보여지는 다양한 목적의 영상들은 짧은 공허함과 지루함도 더더욱 견디기 힘들게 만들었다. 그나마 쌍방향 소통이라 착각하는 카톡이나 SNS상의 주고받는 댓글들도 실은 '답하기를 강요하는, 답하기를 강요받는 소통'에 지나지 않는다. 친분이라는 것이 가상의 공간에서 더 많은 시간 이뤄지고, 그에 대한 댓글과 답글, 반응들이 친밀함의 정도가 되는 현실에서 즉각적인 반응은 개인의 시간을 더 속박하고 구속한다.


눈을 보고 손을 맞잡고 말없이 각자의 마음에 스며들고, 오랜 시간 떨어져 지내더라도 기다림을 설레임으로 받아들였던 너와 나의 시절이 이제는 '나(라)떼적 이야기'로 치부되는 것이 요즘이다.

우리가 부모 세대보다 더 빠른 사회적 흐름에 놓여 있었고, 우리 아이들이 우리 세대보다 훨씬 더 빠른 시대적 흐름속에 놓여있는 것은 점점 더 '기다린다는 것' = '낭비', 더 나아가 '고통'과도 상등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버티는 것, 사고 싶은 물건을 당장 사지 않고 기다리는 것, 하고 싶은 일들을 잠시 참고 뒤로 미루는 것을 아이들에게 더 열심히 가르치고 훈련시켜야하는 이유다. 기다림을 익히는 것은 스마트폰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뇌근육도 탄탄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적어도 아이들에게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 보고 주변을 둘러 볼 여유까지 빼앗기게 둘 순 없지 않은가.








keyword
작가의 이전글클래식에 물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