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수프는 아직도 끓고 있다.
2024년 5월 15일 스승의 날은 석가탄실일과 같은 날이다. 오늘도 나는 매년 그렇듯, 이른 아침 눈을 뜨자마자 한 분의 이름과 얼굴을 떠올린다.
중학교 3학년. 나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외로운 시간을 보냈다. 또래보다 너무 일찍 시작한 사춘기로 인해 내 얼굴은 울긋불긋 여드름 꽃이 피었고, 직모 보다 우월한 곱슬머리 유전자의 발현으로 머리는 마치 송이버섯 대가리 마냥 부풀어 올라 있었다. 그런 외모로 인해 자신감은 언제나 바닥이었고, 학기 초 사귄 친구들 중 한 명이 나를 대놓고 왕따 시키면서 나는 중학교 3학년 2학기부터 졸업하기 전까지 내내 혼자 다녀야만 했다.
혼자인 것을 들키기 싫어, 전교에서 가장 먼저 등교하고, 가능하면 가장 먼저 학교를 빠져나와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아이들이 몰려오기 전에도 버스가 도착하지 않으면 나는 한 코스 앞 정류장으로 걸어가, 미리 버스에 올랐다. 맨 뒷자리 보다 차라리 운전기사님 바로 뒷자리가 눈에 덜 띄기 때문에 교복 치마를 앞으로 댕겨 잡은 후 끙하며 그 자리에 앉아 집에 도착할 때까지 창밖만 바라보았다.
고등학교 배정을 받은 날, 나는 1 지망으로 쓴 부산여고에 가게 되어 너무 행복했다. 외로움과 사투를 벌였던 중학교를 떠나 새로운 곳으로 간다는 설렘도 있었고, 예전에 한 번 가 본 부산여고는 교정이 매우 아름답고, 몇몇 학교들처럼 오르막길이 그리 경사지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나를 왕따 시키던 세 명이 아이들 중 2명은 여상으로, 1명은 다른 인문계 고등학교로 배정되었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그 무리들 중 다른 인문계 고등학교로 가게 된 한 아이를 만났다. 그 아이는 내가 내리고 난 다음 정류장에서 내려야 하는데, 뒷문에서 하차 준비를 하기 위해 일어나서 서 있던 내게 갑자기 다가왔다. 흔들리던 버스 안에서 그 아이는 나에게 바짝 다가와 말했다.
"미안. OO가 너랑 놀지 말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말을 못 걸었어."
내려야 할 정류장에서 버스가 급정거하는 바람에 몸이 순간 앞쪽으로 밀리면서 그 아이의 말이 더 멀리서 들리는 듯했다. 이윽고 버스 뒷문이 화난 것처럼 빠르게 열렸고, 나는 한 마디 툭 내뱉고 서둘러 하차했다.
"응... 잘 가."
그 이후 졸업식 때까지 그 아이와 어떻게 지냈는지, 말은 했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나는 이미 부산여고에 다닐 기대와 꿈에 부풀어 있었고, 그 시간들은 힘들었지만 나는 그 기억들에 더 이상 끌려 다니고 싶지 않았다.
1학년 10반. 나는 부산여고 1학년 10번 4번이었다. 그리고 내가 부여받은 1004라는 명찰과 함께 진짜 내게 천사가 생겼다. 바로 고등학교 첫 담임 선생님인 조향미 선생님이셨다. 선생님이 이 글을 보신다면 닭살 돋아하실지 모르겠지만, 그 당시 내게 천사란, 착하디 착한 선의 상징이라기보다, 나의 영혼을 어루만져주고 달래줄 그런 치료사의 개념이었던 것 같다.
선생님은 특별할 것 없는 나를 따스한 눈빛과 관심으로 바라봐 주셨다. 치열하게 겪었던 사춘기도 그즈음에 서서히 물러나고 있었다. 뜨거운 놈이 가면서 다른 뜨거운 놈을 데리고 왔는데 그것은 바로 사회를 바라보는 다른 관점에 관한 것이었다. 조향미 선생님은 그 뜨거운 것이 꼭 필요하고 중요한 것이라는 걸 깨닫게 해 주셨고, 나는 그저 보잘것없고 못생기고 뚱뚱한 소녀에서, 제대로 비판하고 사고하고, 바라볼 줄 아는 능력을 가진 생각 깊은 젊은이로 만들어 주셨다.
내 안에 그런 씨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점차 선생님의 모든 말씀들이 마치 나의 생각을 대변하고 있는 것처럼 동화되어 갔다. 처음에는 '저렇게도 생각할 수 있구나.'라고 생각했지만, 나중에는 '그래, 맞아. 저게 정답이지.'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나는 연예인 꽁무니를 쫓아다니는 소녀팬처럼 조향미 선생님을 좋아했다. 나의 생각과 선생님의 생각이 똑같다고 생각하니, 마치 신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흔히 여학생들이 남자 선생님들께 느끼는 첫사랑의 그런 감정과도 흡사했다. 거기에 더해 종교적인 믿음인과 충성심까지 생겼다. (실제로 나는 믿는 종교는 따로 없다.)
국어와 한문을 가르치셨던 선생님이 수업 시간에 아이들은 많이 졸았다. 그 시절 어떤 수업이라도 졸지 않는 아이가 없었지만, 선생님이 교과서 지문을 읽고, 한자어를 칠판에 적어 설명을 하실 때에는 마치 자장가처럼 들릴 때도 있었다. 나 역시 아무리 존경하는 선생님이었지만 생리적인 현상을 참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나는 선생님께 실망을 안겨 드리고 싶지 않아 샤프로 허벅지를 찌르고, 물을 꺼내 마시 등 졸지 않기 위해, 아니 졸음이 아는 걸 들키지 않기 위해 안긴 힘을 썼던 기억이 생생하다.
고등학교 시절 내내 선생님은 국어와 한자 수업을 맡으셨기 때문에 종종 뵐 수 있었지만 고등학교 졸업 후 서른이 넘도록 나는 그렇게 존경하고 좋아하던 선생님을 찾아뵙지 못했다. 서울 산다는 핑계로 찾아뵙지도, 그렇다고 연락을 자주 드리지도 못했다.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부산에 다시 내려와 살면서 2,3년에 한 번 찾아뵈었던 선생님을 3년 전부터 매년 찾아뵙고 있다. 친구 민경이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기도 하다. 그 친구 민경이의 두 아이와 우리 아이 둘을 데리고 지난 4월, 밀양에 계신 선생님댁을 방문했다.
보리와 까미 두 덩치 큰 강아지들과 아이 넷, 어른 셋이 뒤엉켜 뜨거운 4월의 한낮을 보냈다. 정성스레 대접해 주신 오리백숙과 산책 나갔다가 직접 딴 진달래꽃을 올린 화전, 두릅나물과 직접 담그신 엄청나게 배추김치와, 파김치로 몸도 마음도 푸짐하게 채우고 돌아왔다.
선생님은 우리가 떠나기 전 직접 농사지으신 파와 부추를 잔뜩 챙겨 주셨다.
"친정에 왔으니 뭐라도 챙겨가야지."
친정. 그래. 난 이제 친정이 두 개가 됐다. 친정이 아예 없는 이들도 있는데, 내 생에 친정이 두 집이라니. 이만큼 큰 복이 있을까?
오늘 스승의 날 찾아뵙진 못하고 조만간 부산에서 재회하기로 한 선생님과 친구 민경이. 그날을 달력에 크게 표시해 두고, 스승의 날 아침 선생님께 오랜만에 짧은 편지를 써 본다.
조향미 선생님께
얼마 전 밀양 선생님댁에 다녀온 후, 윤진이가 보리 이야기를 며칠 계속했어요. 길을 가다 보리와 비슷한 색의 강아지만 봐도 "보리 보러 또 언제 가요?"라며 묻곤 했습니다. 아이가 개와 고양이를 유독 좋아하는 게, 왠지 친구가 없어서 그런가?라고 안쓰럽게 생각한 건 제가 엄마여서일까요? 그맘때 여자 아이들이 귀엽고 푹신한 것만 보면 꺄 소리만 지르는 게 어찌 보면 당연한 건데 말입니다.
아이에 대한 고민은 항상 있지만 시간이 흐르면, 그때의 고민들은 고민이 아닌 걸로 어느새 바뀌어 있고, 또 다른 고민들이 생기기 시작해요. 아이 하나를 온전하게 키워 내는 것이 이리도 힘든 것임을 매 순간 깨닫습니다.
얼마 전 한 100억 부자라는 성공한 성형외과 의사가 한 말이 제 뇌리에 깊게 박혔습니다.
시간은 과거에서 현재, 현재에서 미래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다. 과거, 현재, 미래는 두루마리 휴지처럼 펼쳐지는 것이다. 과거와 현재, 미래는 원인과 결과의 인과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상호작용을 하는 인연관계에 있다.
말장난 같은 이 말이 어찌 보면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두루마리 휴지에 비유하면서 시작점이라고 생각했던 휴지심이 사실은 미래라는 결과이며, 이를 둘러싼 휴지가 과거부터 차례로 펼쳐질 뿐이라는 설명이, 지금까지 진리처럼 알고 있던 과거와 현재, 미래의 관계를 완전히 뒤집어 놓은 듯 생소하면서도 충격적이었습니다.
단순히 미래가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결정론이나, 그러니 열심히 살 필요 없다는 회의론적 관점은 아니겠지요. 성공학이나 자기 계발 영역에서 이 의사의 말을 해석해 보면, '미래에 대한 확신을 갖고 현재를 열심히 살아라'라는 기존의 개념에서 더 나아가, 미래가 현재를, 그리고 현재가 과거를 만들어 가고 있으므로 결국 우리가 지금 현실을 어떻게 살아가고 있느냐가 곧 우리의 미래와 다름없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인생 전반에 걸쳐 조금 더 거시적으로 생각해 보면 나의 모든 과거와 현재는 미래에서 온 것이라는 뜻으로 해석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내가 내뱉은 말, 내가 한 행동, 성과, 실수, 잘못, 이 모든 것이 내 미래에서 영향을 받아 펼쳐진 것이네요. 마치 생물의 유전자가 한 생명체가 태어나고 죽기까지의 모든 것을 품고 있는 것처럼 말이죠. 사람의 성격이 쉽게 바뀌지 않는 것도, 전래동화나 드라마에서처럼 개과천선 하여 다른 삶을 사는 것도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 걸 우리는 살면서 정말 많이 겪게 되죠. 저 역시 마찬가지니까요.
그렇다면 저는 어떻게 살아야 하고, 우리 아이들은 어떻게 키워서 어떠한 사람으로 살아가라 말해야 할까요. 지금 더 공부하고 더 노력해야 앞으로 성공하고, 더 좋은 미래가 온다고 더 이상 가르칠 필요가 있을까요? 1년, 5년, 10년 뒤를 내다보고 세우는 현재의 계획들이 우리의 지금을 더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까요? 그런 생각들에 대한 답은 언제 얻을 수 있을까요?
아이들은 다이소에서 산 토마토 씨앗을 심은 작은 화분을 매일 들여다봅니다. 너는 왜 싹이 3개나 났는데, 나는 2개밖에 안 났지? 왜 자꾸 비가 오는 거야? 아이들의 고민은 해를 가린 구름과, 빨리 자라지 않는 싹의 키에 있습니다. 내일은 모르고 지금만 압니다. 부모는 그 아이들의 3년 뒤, 5년 뒤, 그리고 10년 뒤를 생각합니다. 대학은 어디로 갈지, 학비 마련을 쉽게 해 줄 수 있을지, 결혼 자금은 대 줄 수 있을지, 지금 아무리 짱구를 굴려 봐도 답은 나오지 않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을 생각하면 저는 두 단어가 떠오릅니다. '분노' 그리고 '들꽃'입니다.
선생님의 시에서 종종 등장한 두 단어는 아주 상반되는 듯 하지만 또 왠지 하나인 듯합니다. 선생님의 삶을 채웠던 분노와 그 분노를 씨앗으로 수 천, 수 만 명의 아이들을 짓밟혀도 다시 묵묵히 피어나는 들꽃으로 피워낸 선생님의 가르침이 제게 선생님을 그렇게 떠올리게 합니다.
스승의 날인 오늘 저는 온통 부산여고 1학년 10반의 교단에 서 계시던 선생님을 떠올려 봅니다.
이것만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지금 보다 그때가 진짜 '나' 였다는 것을요.
2024년 5월 15일
조향미 선생님의 부산여고 1학년 10반 제자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