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은 걸까, 식은 걸까.

엄마의 커피가 식고 있다.

by 시월아이

딸아이가 초등학교 5학년에 접어든 4월의 어느 토요일 오전. 점심 식사를 차리기 귀찮아진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아파트 근처에 새로 생긴 브런치 가게를 데리고 갔다. 평소 집에만 있기 좋아하는 아이들이었지만, 점심 보다 커피를 향한 내 의지는 강력했기에 딸 애는 핸드폰 하나 달랑 들고, 세 살 아래 아들은 킥보드를 끌고 집을 나섰다.


카페에 들어가니 가게는 아직 이제 막 오픈을 했는지 주방은 어수선했고, 홀은 텅 비어있었다. 우리는 통창으로 밖이 훤히 내다보이는 입구 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나는 곧바로 키오스크로 가서 아이스 카페라테 한 잔과 아이들이 마실 에이드 한 잔, 그리고 디저트와 식사의 중간쯤 되는 몇 가지 음식들을 주문했다. 5분도 채 되지 않아, 음료가 먼저 나왔다.


몇 모금 커피를 들이켰을 때 둘째 아이는 엉덩이를 들썩이며 밖에서 킥보드를 타겠다고 했다. 나와 아들은 딸아이만 자리에 남겨둔 채 둘째와 함께 가게 밖으로 나왔다. 5분 정도 지났을까, 가게 자동문이 열리면서 첫째가 심기 불편한 표정으로 나왔다. 주문한 음식이 벌써 나왔나 생각했다.


(아이) 엄마, 커피가 다 식었어요! 어서 들어오세요.
(나) 뭐?
(아이) 커피가 다 식었다고요.
(나)........
(나) 아이스로 시켰는데?


내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아이는 쌩하고 가게 안으로 사라졌다.

아이를 곧바로 따라 들어갔더니 아이가 내 커피 잔을 두 손으로 쥐고 있었다. 이윽고 나를 보며 멋쩍게 웃었다.

(아이) 이제 알았어요.


겨울 내내 따뜻한 커피만 마셔왔기에 아이는 당연히 내가 시킨 커피가 따뜻한 것이라 생각했고, 그것이 빨대가 꽂힌 유리잔에 담겼을지라도 "따뜻한 커피" 그 외의 다른 것이라곤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엄마의 빈자리에 덩그러니 남겨진 커피잔을 만져보니 컵이 너무 차가웠고, 당연히 따뜻한 커피가 식은 줄 알았다는 것이다. 차가운 유리잔 밖으로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혀있었음에도 말이다.


생각해 보면 아이는 자기만 덩그러니 남겨진 그 큰 카페에서 엄마를 빨리 불러 올 생각에 커피의 상태를 미리 짐작하고 결정했을지도 모르겠다. 열두 살 여자아이가 스마트폰 숏츠보다, 또라 아이들과의 카톡보다 아직까지 엄마를 더 간절히 바라는 경우가 흔하진 않을 것이다.


심리상담을 시작한 지 세 번째즘 되었을 때, 센터 선생님께서는 아이가 평소에 불안도가 높다고 하셨다. 기질적인 원인이 가장 크기 때문에 앞으로 계속해서 이 불안을 낮춰주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라고 하셨다. 또 한 가지 덧붙이셨는데, 지능 검사에서 평균보다 다소 낮은 수치는 아이의 자신감과 자존감을 낮추는 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고. 딸아이는 지능 검사에서 언어 이해력, 표현력, 그리고 수학과 관련된 대부분의 지수가 평균 이하로 나왔다.


사실 진작부터 엄마의 감으로 아이가 다소 이해력이 떨어지고 숫자 감각이나 방향 감각이 없다는 것과 기질적으로 매우 예민하고 겁이 많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생후 10개월부터 시작한 어린이집 생활과 유치원, 초등학교 생활을 거치면서 우리 아이가 학습, 교우관계가 원만하지 않다는 것을 모를 부모는 없을 것이다.

내가 이런 고민을 주변 엄마들에게 털어놓으면, 아직 어려서 그렇다, 지금은 모른다, 애가 나쁜 행동을 하는 건 아니니 걱정도 아니다, 크면 다 좋아진다 등의 위로의 말만 했었다. 그래서 내가 너무 지나치게 우리 아이를 평가절하하는 건 아닌지, 너무 예민하게 아이를 앞서서 걱정하는 건 아닌지 스스로에게 다시 되묻기도 했다. 그러다가 별 일 없이 또 그러한 일상을 지내왔다.


아이는 이제 사춘기를 앞둔 초등학교 5학년이 되었지만 여전히 기본적인 언어 표현과 이해에 어려움을 겪는다. 여기에 사춘기 초기 증상이 겹치면서 점점 아이와의 대화가 피곤하다고 느껴지기 시작했다.


"엄마, 오늘 어떤 애가 선생님한테 혼났어요."

"어디서? 학교에서?"

"아뇨, 줄넘기 학원에서요."

"그래? 그 애 이름이 뭔데?"

"음... 몰라요. 까먹었어요."

"왜 혼났는데?"

"연습 시간에 연습 안 하고 떠들었어요."


"엄마, 오늘 자리 바꿨는데 너무 마음에 안 들어요."

"왜? 짝지가 마음에 안 들어?"

"짝지는 한 번도 말 안 해본 앤 데, 모둠 애들이 다 이상해요."

"짝지는 여자애니? 이름이 뭐야?"

"네 여자예요. 이름은... 김 예.... 진가? 아 그 이름이 좀 어려워서 기억이 안 나요. 모둠 애들 중 남자애 한 명 있는데 너무 싫어요."

"자리는 어딘데?"

"이번에 뒤에 앉았어요. 칠판이 잘 안 보여요."

"뒤에서 몇 번짼데?"

"뒤에서요? 음... 네 번짼가.... 아 아니 두 번째.... 아 세 번째 거 같아요."


"엄마, 오늘 사회 시험 쳤는데 5개 틀렸어요. 그럼 몇 점이에요?"

"모두 몇 문젠데?"

"열 문제.. 아, 아니 전부 20갠가?"

"총 20문제면 100점 만점이니깐 한 개에 5점이잖아. 그럼 5개 틀렸으면 15개를 맞은 거니깐, 75점 받았네."

"아, 25문제였어요"

"그럼 한 문제에 4점이니깐, 15문제 맞았으니깐, 몇 점이야?"

"....... 아 몰라요." (방으로 들어가 버림.)

(잠시 뒤 다시 나와서는)

"엄마 그런데 우리 반 어떤 애는 지금까지 한 번도 70이나 50점을 받아 본 적이 없대요."

"........? 그럼 몇 점을 받았는데?"

"아 그니깐, 항상 다 맞았대요."

"그래? 무슨 과목을?"

"아, 전부 다요."

"전부다?"

"네."

"아... 그래? 공부를 엄청 열심히 했나 보다."

"네"


아이는 나와 대화를 하고 싶어 했지만, 육하원칙 까진 아니라도 '어디서', '누가' 정도는 말해 줘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생각나는 대로 내뱉는 듯했다. 마치 예닐곱 살 아이처럼 머릿속 떠오르는 이야기는 많지만 정리되지 않은 채로 말이다.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스무고개처럼 몇 번의 상황 파악을 위한 질문을 먼저 해야만 했다. 추가 정보를 요구하는 내 질문에 아이는 또 짜증을 냈다.

나중에 상담 센터 선생님과 이야기를 해 보니, 아이가 대화의 맥락을 이해하거나 본인이 생각하는 것을 표현하는 데에 어려움이 있고, 아마도 집에서 부모와 대화할 때보다 학교에서 또래 아이들과의 대하는 더 어려울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했다. 부모가 자식을 기다려주는 것처럼 친구들은 아이를 기다려주지 않기 때문이었다.


"엄마, 학교에서 오늘 기분이 엄청 안 좋았어요.
무슨 보드게임을 했는데 어떻게 하는지 이해가 안 갔어요.
다른 애들이 짜증 내면서 가르쳐주는데 무슨 말인지를 모르겠는 거예요."


더 우려스러운 것은, 대화의 맥락, 상황의 맥락을 이해하는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아이가 성장할수록 지식 자체의 절대양은 증가하겠지만, 사회생활을 통해 인간관계를 맺고, 업무를 수행하고자 할 때는 성인이 되어서도 계속적인 어려움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딱 봐도 얼음이 동동 떠 있는 아이스커피를, 자신이 보아왔던 엄마의 행위만을 고려해 당연히 따뜻한 커피가 식은 것이라 믿어버린 것이, 상황 맥락에 대한 이해 부족 현상 중 하나인 것이다. 이런 상태로라면 우리 아이가 앞으로 험난한 사회에서 어떻게 원만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걱정이 되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에게 가장 절실히 요구되는 자질이 무엇인지 잘 안다. 수없이 쏟아지는 육아 관련 정보 속에서 그것이 단 하나, 아이를 향한 '믿음'이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아이가 평균 이상이든, 평균 이하든, 혹은 축복받은 평균에 속하든 상관없이 아이를 믿고 기다려주는 것은 특히나 사춘기를 앞둔 아이에게는 그 무엇보다 중요할 것이다.


하지만 스스로에 대한 믿음도 갖기 힘든 부모, 아니 사람이 대다수다. 온갖 험악한 일들이 발생하는 현실에서 내 아이의 행동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성장하기를 기다려준다는 것은 마치 거센 폭풍우가 몰아치는 마당 텃밭의 여린 꽃들이 그저 무사하기만을 기도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가.

나의 엄마도 그랬다. 어려운 가정 형편 속에서, 불편한 아빠와의 관계에서 우리들을 웃음으로 대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런 엄마의 마음이 나에게 고스란히 투영되어, 나라는 사람이 만들어졌다. 돌이켜보면 부모의 웃음도 분노도 슬픔까지도 모두 나의 성장에 밑거름이 되었다.


타고난 지능이란 것이 조금 부족한 아이. 그로 인해 불안감이 높아질 수밖에 없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다. 집으로 돌아갈 길을 찾지 못하는 이에게 마음의 평화가 어찌 있을 수 있을까. 모두가 웃고 있는데, 나 혼자 그 웃음의 원인을 알지 못한다면 불안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 내가 생각하기에 아이는 어려움에 쳐해 있었다. 그리고 이 길고 긴 터널을 지나기 위해서는 시간이 제법 필요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아이를 마냥 긍정적인 마음으로 바라보고 기다려주지 않기로 했다. 애써 보았지만 그렇게 할 수도 없었고, 또 그것만이 진정 아이의 성장을 가져오리라 그 누구도 약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적극적으로 아이의 손을 잡고 어둠 속을 걸어가기로 했고, 그렇게 나는 아이의 '보통의 삶'을 위해 조금 더 부지런히 움직여 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