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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을 잃을 뻔한 이야기

왜 내게 망막박리가 왔는가

by 시월아이

아팠던 이야기를 하자면 브런치 스토리에 연재를 30회쯤은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중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단연 망막박리 수술과 재활 기간이었다.


2017년 5월 어느 날 늦게까지 잠을 자고 일어났다. 첫째는 남편이 등원시키고 출근을 한 후라 집안은 정적이 흘렀다. 봄 햇살의 따사로움이 암막커튼을 뚫고 내 눈을 간지럽혔다. 기지개를 크게 한 번 켜고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렸다. 밤사이 눈곱이 꼈겠지, 앞이 흐릿하여 눈을 비비고 다시 눈을 떴다. 오른쪽 눈 근처에 무언가가 내 시야를 방해했다.


머리카락인가?


아니었다. 거울 앞에 다가가 눈을 크게 뜨고 살폈지만 눈에 뭐가 들어간 것도, 눈 주변으로 이물질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오른쪽 눈의 반정도가 까맣게, 장막을 드리운 듯 보이지 않는 것이다. 아니, 보였는데 그게 까만 무언가였다.


뭐지?


나는 급히 핸드폰으로 검색을 했다.


'눈앞이 까맣게 보여요.'


스크롤을 내리면서 자꾸 공통적으로 눈에 띄는 단어가 2개 있었다. '망막박리' 그리고 '응급수술'


몇 개의 글을 대충 읽고 나는 다시 지도앱을 열어 가까운 안과를 찾았다. 세수도 안 한 채 옷도 대충 걸쳐 입고 집을 나섰다. 내 가슴은 이미 내려앉아 있었다. 불안과 공포에 휩싸여 안과를 들어섰고 눈동자를 키우는 산동제를 점안한 후 20분쯤 지난 뒤 의사는 내 눈의 상태를 살폈다.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의사는 내게 화면을 한 번 보라며 설명을 이어갔다. 망막이 안구에서 떨어져 펄럭거리고 있으니 지금 이 길로 당장 대학병원 응급실로 가라고 했다.


"망막이 떨어지기 일보직전입니다. 빨리 가서 수술받으셔야 해요. 여기서 제일 가까운 곳이 이대목동입니다. 그리로 가세요."


"수... 수술이요? 저, 지금 임신 5개월짼데요..."


"아.... 선택의 여지가 없어요. 지금 수술 안 하시면 실명될 수도 있어요."


나는 흐느꼈는지, 흐느적거렸는지 그렇게 비틀거리며 병원을 나왔다. 한 손은 배에 가 있었다.

남편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고, 조퇴를 한 남편과 집에 들러 간단히 짐을 싸서 대학병원으로 향했다.


멀쩡히 걸어서 응급실을 가니 데스크에서 의심쩍은 눈빛으로 우리를 쳐다보았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안과에서 망막박리라고 해서요.... 응급실로 가라던데요."


"외래 진료 받으시면 될 거 같은데요."


"아니요, 응급실로 가라고 했다고요."


데스크에 있던 직원이 어딘가로 전화를 했고, 잠시 후 간호사로 보이는 분이 내려와 우리를 데리고 외래로 올라갔다. 그리고 우리는 수십 명의 외래 진료 환자들을 제치고 진료실로 향했다. 오른쪽 눈은 망막이 찢어진 상태고, 왼쪽 눈 역시 상태가 좋지 않아 그 자리에서 바로 레이저 치료를 받아야 했다.


그날 저녁 7시, 긴급 수술이 진행됐다. 내가 임신 5개월 차라고 하자 교수는 부분마취를 하자고 했고, 나도 아이의 안전을 생각해 무섭긴 했지만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의사가 권하는 일에 내가 어찌 반하는 의견을 내겠는가? 사실 속 마음은 안과 교수가 산부인과 교수에게 확인 후 전신마취가 가능하지 확인해 보길 원했다. 아이의 안전도 중요했지만 7년 전 라섹 수술을 해 본 적이 있는 나로서는 눈 수술이 상당히 겁이 났다. 하지만 동정심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았던 교수에게 다른 전문의의 의견을 들어보면 어떻겠냐는 질문을 차마 할 수가 없었다.


수술은 눈 주변 근육을 마취한 후 진행됐다. 교수 1명, 레지던트 1명이 수술실로 들어왔다. 나는 그날 태어나서 두 번째로 많은 비명을 질렀다. 첫 번째는 단연 첫 아이를 낳을 때였다. 하지만 망막박리 수술은 첫 아이 출산보다 더 고통스러웠다. 출산의 고통에는 곧이어 만날 아이에 대한 기대, 가벼워진 몸, 그리고 씻은 듯이 사라지는 고통의 상쾌함에 대한 설렘이라도 있었다. 하지만 눈 수술을 받는 2시간 동안 나는 눈의 통증은 물론 미칠 것 같은 불쾌함과 두려움을 내 목구멍에서 나오는 비명과 아이를 위해 참아야 한다는 다짐으로 오롯이 버티어야 했다.


의사는 수술 내내 레지던트를 몰아붙였다.


"그렇게 하면 안 돼! 환자 눈 망치려고 그래?"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니깐!. 똑바로 안 해?"


그리고 나도 몰아붙였다.


"환자분, 움직이지 마세요! 그러나 큰일 납니다!"

"조용히 좀 하세요."


다그치는 교수와 잔뜩 긴장한 듯한 레지던트의 손길이 나를 공포로 몰아넣었다. 칼날 같은 것이 내 눈을 들쑤셨고, 뜨거운 것이 내 눈을 지지는 것 같았다. 똑바로 뜬 눈으로 태양을 직시하는 것처럼 수술실 조명이 내 눈을 찔렀고, 얼굴을 스치고 누르는 4개의 손, 그리고 갖가지 스테인리스 수술 도구들을 쨍쨍거리는 소리 이 모든 것이 내가 지금 지옥에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게 했다. 그 와중에 공포에 질린 엄마의 감정이 뱃속 아이에게 전달되는 것은 아닌지도 두려웠다.


그렇게 20시간 같았던 두 시간의 수술이 끝나고 나는 밤늦게 입원실로 돌아왔다.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망막박리 수술법 중 하나인 공막돌륭술(이름도 힘들다.)을 하면서 나는 떨어진 망박을 밀어붙여주는 가스주입도 함께 했는데, 이 가스가 새는 것을 막기 위해 열흘 정도는 고개를 절대 들어서는 안된다고 했다. 고개를 숙인 채 밥을 먹는 것은 물론, 화장실을 가는 등 모든 일상생활에서 단 1초도 고개를 들지 말라고 겁을 주었다. 심지어 잠도 엎드려서 자야 했다.


임신 5개월인 산모가 엎드려서 잠을 잔다?


어떻게 엎드려서 자느냐?라는 질문에 의사는 답을 해주지 않았다. 안과 의사니깐 눈만 잘 치료되면 끝이었던 걸까? 물어보는 내가 지나쳤던 것일까?


첫째 아이를 돌봐야 했길래 남편은 내가 입원실로 내려오자마자 집으로 가야 했다. 그날 밤 나는 뜬눈으로 앉아서 잠을 잤다. 지금 생각해도 눈물이 난다.

다음날 역시 나는 목을 들어 정면을 응시할 수 없었다. 핸드폰이라도 있으니 버텼다. 한쪽눈으로 보이는 세상은 보이지 않는 눈의 역할까지 잘 해내었다. 눈이 두 개라 얼마나 다행인가. 아프지 않았다면 절대 몰랐을 고마움이다.


그날 밤, 부산에 사시던 친정엄마가 서울 이대병원으로 찾아오셨다. 요양보호사 일을 마치고 집에 잠시 들렀다가 그 길로 기차를 타고 올라오셨던 것이다. 밤 10시, 입원실 소등 후 나는 엄마를 기다리며 어젯밤처럼 무릎을 꿇은 상태로 골반까지만 오도록 약간 벌리고, 팔꿈치로 침대를 받치고 그 힘으로 상체를 지탱하면서 고개를 떨구고 눈을 잠시 감고 있었다. 배가 침대에 눌려지지 않게 계속해서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엎드려 있던 나는 누군가 입원실을 향해 걸어오는 소리에 귀를 쫑긋 세웠다. 이윽고 입원실 문이 열리면서 복도의 형광등 빛이 안으로 새어 들어왔고 가벼운 몸의 가벼운 발소리가 가까이 다가왔다. 내 침대 옆에 멈춰 선 걸음과 함께 흐느낌이 들려왔다.


"엄마?"

"..........."

"울어?"

"이게 무슨 일이니.... 덩치는 산만한 게..... 이렇게 엎드려서...... 으흐흐흐흐흐흑."

"나 괜찮아, 수술 잘 됐대."


엄마는 할 일이 생각났다는 듯 빠르게 눈물을 훔치고는 큰 보따리 같은 것에서 이불 한 채를 꺼내셨다.


"일어나 앉아봐."


엄마는 이불을 크고 동그랗게 잘 말은 다음 그 위에 베개를 다시 올려 배가 닿는 침대에 올리셨다.


"여기 엎드려"


그러자 나는 팔과 다리에 쏠려 있었던 내 육중한 몸의 무게가 이불로 분산이 되면서 훨씬 편하게 엎드려 있을 수 있었다. 아기가 머무는 뱃속도 훨씬 안정적으로 느껴졌다.


"이 이불 집에 있던 거 아니야?"


"그래, 바로 싸들고 왔지. 내가 너 수술한다는 소리보다 엎드려 자야 한다는 소리 듣고 억장이 무너지더라."

"그러게, 뭐 하러 첫째만 낳고 말지, 둘째까지 가졌어?"


"아이참, 이제 와서 그 얘기하면 뭐 해."


부산에서 그 큰 이불 보따리를 짊어지고 기차에 올라타서 다시 서울역에서 택시를 탔을 엄마의 모습을 떠올리니 불덩이 같은 것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그날 밤 나는 불편했지만 그래도 조금 더 편하게 잘 수 있었다.


다음날 나는 엄마와 함께 같은 병원 내 산부인과 진료를 받기로 했다. 별일 없겠지만 수술을 받는 동안 아이가 무사한지도 궁금했고, 때마침 성별을 확인할 수 있는 시기이기도 했다.


"아이는 아주 건강합니다. 위치도 좋고 몸무게나 심장박동 소리도 좋고요."


"서.. 선생님. 아이 성별은 어떻게 됩니까?"


엄마가 조심스럽게 여쭈셨다.


"왕자님이네요."


"어머... 감사합니다. 선생님."


둘째는 왜 가져서 이 수술까지 하냐고 하실 땐 언제고, 손자라고 하니 그 자리에서 기뻐서 눈물까지 흘리시는 게 아닌가.


"니가 맏며느린데, 이왕 둘 낳을 거 하나는 손자면 시부모님이 얼마나 좋아하시겠니?"


엄마는 아들이 좋은 게 아니라, 맏며느리가 시부모님께 더 사랑받길 원하셨던 것이다.


"교수님, 혹시 제가 망막박리 수술받으면서 아이 때문에 부분마취 했는데 전신마취 했어도 됐었나요?"


나는 수술의 고통이 너무나 컸기에 이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머, 힘드셨겠네요. 이 정도 컸으면 전신마취해도 아무 문제없는데...."


난 그 순간 둘째가 아들이라는 기쁨도 잊고, 화가 났다. 안 아플 수 있었는데... 너무해! 너무해!


열흘 뒤 나는 퇴원을 했고 수술 후 6개월쯤 지나면서 시력을 되찾았다. 하지만 웬일인지 점차 조금씩 시력이 떨어져 수술 후 2년쯤 지난 뒤 나는 다시 안경을 써야만 했다. 결혼 전에는 이 안경이 얼마나 싫었던가. -7의 고도근시였던 내 안경은 나의 큰 눈을 반절이나 더 작게 보이게 했다. 결혼 후 아이 둘 낳고 나는 여느 엄마들처럼 외모에 신경을 끄고 살게 되었다. 외모가 웬 말인가? 앞이 안 보일 뻔했는데 그깟 안경이 무슨 대수?


그리고 그때 내 뱃속에 있던 왕자님은 지금 이렇게나 커서 올해 7살이 되었다.

나는 아직도 임신 중이었던 내게 왜 갑작스러운 망막박리가 찾아왔는지, 임신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지만 왜 하필 임신 중일 때 왔는지, 그런 상황을 겪어야 했던 내가 안쓰럽다.

둘째 출산 3개월 후 나는 왼쪽 무릎 수술도 받게 된다. 그러니, 이 아이는 배만 아파 나은 게 아니라 내 눈 아프고, 무릎 아프고, 배까지 아파서 나은 아이인 것이다.


무엇보다 눈 수술 후 나는, 내 눈에 비친 아이들은 물론 이 세상 모든 아름다운 것들이, 존재하는 그 자체로 아름다은 것이 아니라 내가 볼 수 있기 때문에 진짜 아름답다는 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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