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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우리 집 좀 사세요.

by 시월아이

부모님은 내가 열두 살이 될 때까지 전셋집을 7번 옮겨 다녔다.

70% 은행돈을 끼고 처음 마련한 내 집으로 이사하던 날

큰아버지, 고모, 외삼촌에 그 자식들까지 잠시 농사일을 내려놓고 우리 집 장롱과 가재도구를 날랐다.


신발 공장, 냉장고 부품 공장, 식당 등 평생 고된 노동을 하셨던 엄마는

30대 중반부터 무릎이 아팠고

엘리베이터 없는 7층 높이 우리 집은 엄마에게 언제부턴가 힘겨운 등산로가 되었다.


무릎 수술 중 바이러스 감염으로 대학병원 응급실까지 실려갔던 어느 해 크리스마스를 지나고

엄마는 결국 근처 부동산에 집을 내놓았다.

부동산에 집을 내놓고 또다시 아파트 계단을 오르면서 엄마는 눈물을 흘렸다.


2년 반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엄마집을 보러 오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처음 집을 내놓던 날 흘렸던 아쉬움의 눈물이 우스워졌다.


이제 엄마는 집을 나서는 것 자체가 힘들어졌다.

내려가는 것도, 다시 올라오는 것도 두려움 그 자체였다.


어느 날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아빠와 함께 부부 계모임이 있었던 다음날이었다.


엄마는 약속장소까지 택시를 타자고 했지만

지하철이 무료인 아빠는 지하철을 고집했다.

지하철역으로 빠르게 향하던 아빠는 뒤쳐진 엄마를 알아채지 못했다.

그날 엄마는 집에 돌아와 아빠 몰래 울었다.


나는 그 주에 부천에서 부산으로 급파되었다.

더 이상 손 놓고 있을 수가 없었다.

다섯 살 딸과 두 살 난 아들을 친정에 맡겨놓고 남편과 출격했다.


집에서 A4용지로 엄마집 아파트 매매 전단지 100장을 출력했다.


이미 2019년에도 네이버 부동산이나 피터팬의 방 구하기 등의 온라인에서 부동산 거래가 거의 이뤄지고 있었지만 우리 집을 살만한 사람은 '온라인'을 접할 수 있는 그런 분들이 아닐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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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단지를 붙인 동네는 우리 집 보다 조금 더 사정이 나쁜 주택가였다.

지대도 더 높은 곳이어야 했다.

가격도 확 낮췄다. 텃밭을 사은품처럼 강조했다.


불법 전단지를 붙이는 내내 마음을 졸였다.

다음날 뜯길 것을 예상하고 가능한 많이 붙였다.


남편은 내가 걸어 다니는 길을 따라 차를 몰았고

이따금씩 차에 타서 물을 마시고 에어컨 바람을 쐬며 휴식했다.


100장 전단지가 끝나갈 무렵 신고 있던 샌들 끈이 끊어졌다.

샌들을 끌다시피 하며 차에 올라탔다.

어깨도 끊어지기 일보직전이었다.


다음날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엄마에게 집을 보고 싶다는 전화가 무려 세 통이나 온 것이다.


그 날 전화 온 세 명 중 한 명에게 집을 팔고 3개월 뒤 두분은 그 집에서 내려왔다.

집을 산 사람은 우리 집이 싸고 넓고, 옥상과 텃밭이 마음에 든다고 했다.

높은 계단이지만 집을 산 부부는 50대 후반으로 두 다리는 튼튼해 보였다.


도망치듯 그 집을 빠져나온 두 분은 역시나 내가 알아 본 평지 신축 빌라에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하셨다.

테라스가 넓고, 빌라 맞은편에 작은 공원도 있었다. 물론 성능 좋은 엘리베이터도 있었다.


내가 태어나 부모님께 가장 큰 효도를 한 것이 있다면

그 집을 팔아드린 것이라 말하고싶다.

그외에는 별다른 효도를 못해드려서 아마도 그런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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