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정 거절을 말하다.
시기별로 유행하는 자기 계발서들의 주제가 있다. 한때 유행하던 것이 "거절하가"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에 대한 지침서다. 특히 사회 초년생들을 타깃으로 하는 성공학 관련 서적들이 아직도 인기리가 읽히고 있다.
2008년 개봉한 짐캐리 주연의 <예스맨>이라는 영화가 흥행을 거두면서 '긍정적으로 사는 삶'이 마치 타인의 부탁을 잘 들어주는 것이며, 온전히 타인을 위해 베푼 결정도 결국 나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다는 옛 선인의 말씀과도 같은 감동과 깨달음을 관객들에게 전한다.
그러다 어느 때부터인가, '거절하는 기술', '거절의 중요성', 'No라고 말하는 용기'등과 같은 제목들의 책들이 줄지어 출간되면서, 거절은 나쁜 것이 아니며, 사회생활에서는 물론이거니와 5,6세 아이들에게까지 부모나 선생님이 가르쳐 주어야 하는 하나의 덕목 혹은 사교 기술 같은 것이 되어 버렸다.
살아보니 이 거절이라는 것은, 할 수 없을 때 스스로 피폐(疲弊)해지고, 너무 지나치면 무도(無道)하거나 무례(無禮) 해지더라.
아래 두 택시 기사를 비교해 보자.
1.
어느 여성이 택시를 탔다. 기차 출발 시간이 촉박했던 여성은 택시 기사에게 급하니깐 빨리 좀 가달라고 부탁했다. 기사는 말했다. "그럴 거면 좀 더 일찍 택시를 타셨어야지요."라고 말했다. 기분이 나빴던 승객은 현금으로 택시비를 지불하면서 바쁜 와중에도 십 원짜리까지 거스름돈을 다 받고 내렸다.
2.
급하게 택시에 올라탄 승객은 택시 기사에게 기차 출발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며 빨리 가달라고 부탁했다. 마침 출근 시간대라 속도를 낼 수도 없었지만 택시 기사는 "예~ 알겠습니다." 라며 큰 소리로 대답했다. 어깨를 좌측 우측으로 한 번씩 크게 움직이기도 하고, 차선도 몇 번 바꿔가며 목적지까지 도착했다. 승객은 고맙다는 말을 연신 남기고 택시에서 내렸다.
안 되는 걸 안된다고 말한 택시 기사와 안 되는 걸 알지만 알겠다고 대답한 택시기사의 실제 도착 시간은 얼마나 차이가 났을까. 동일한 시간대의 동일한 도로 상황이라면, 아무리 경력 많은 운전자라도 도착까지의 시간이 큰 차이가 났을 리가 없다. 5분 이상 차이가 났다면 신호빨이 더 잘 받았거나, 끼어드는 차들이 없었거나 하는 등의 운이 조금 더 좋아서 얻어진 결과일 것이다.
하지만 택시에서 내려 기차에 올라탄 두 승객의 마음은 천지차이였을 것이다. 타인으로부터, 특히나 돈을 내고 서비스를 받는 입장에서의 거절(그 거절이 정당했을지라도)당함은 상당한 마음의 상처가 된다. 아무리 작은 부탁이라 할지라도 내 부탁을 거절하는 것은 내 존재 가치를 부정당하는 것처럼 기분을 상하게 한다.
부탁을 하는 쪽은 '아니면 말고'라는 가벼운 마음으로 부탁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물론 악의적인 의도로 가스라이팅하거나 명령이나 지시가 가능한 입장에서 강압적으로 하는 부탁이 아니라면 부모나 형제, 배우자에게조차도 부탁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결국 내가 하지 못하는 것, 할 수 없는 것을 상대방이 해 주길 원하는 상황이므로. 혹시나 하는 거절 가능성까지 염두해야 하는 100% 타인의 결정에 맡겨지는 상황이 놓이기 때문이다.
거절을 하는 것은 나쁘지 않지만 어떻게 거절하느냐가 더 중요하며, 가장 좋은 것은 거절하지 않고 거절하는 것이다.
나는 개인 카페를 8년 정도 운영했었다. 아르바이트생들을 많게는 5명까지 썼는데 내가 이들에게 손님을 대할 때 철저하게 지켜달라고 한 것이 있는데, 바로 손님을 무안하게 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손님의 여러 부탁들을, 가능하면 거절하지 않아야 했고, 거절하더라도 무안하지 않게 해야 한다고 했다. 어렵지만 다음 2가지만 지키면 충분히 지킬 수 있었다.
1. 손님이 부탁하기 전에 먼저 제안하기
2. 손님 부탁이 어렵더라도 일단은 알겠다고 하기
먼저, 손님이 부탁하기 전에 먼저 제안하기를 보자.
손님이 테이블에 앉아 음료를 마시고 있다가 실수로 음료를 쏟았다고 하자. 그것을 본 직원은 모든 일을 제쳐놓고 바로 뛰어가 쏟은 음료를 닦고, 손님에게 괜찮냐고 물어본 후 다시 음료를 만들어 드려야 한다. 손님이 냅킨을 찾기 전에 갖다 드리고 작은 실수를 한 것에 가게 측에 미안한 마음이 없도록 먼저 우리 쪽은 괜찮음을 밝혀야 한다. 여기까지는 아주 기본에 속한다. 더 나아가, 다 먹지 못한 음식에 대해 아쉬워할 마음을 직원이 먼저 헤아려주고 새로운 음료를 가져다주는 것이다. 많은 경우, 음료를 거의 마시지도 못하고 쏟아버린다. 손님 입장에서는 아무리 본인 잘못이라 하더라도 우리 가게에서의 안 좋았던 기억이 남을 수밖에 없다. 이때 먼저 새로 음료를 만들어 드린다면 손님은 감동과 동시에 우리 가게에 좋은 인식을 갖게 될 것이다.
두 번째는 손님의 무리한 부탁에 대응하는 방법이다.
카페에서 손님들이 가장 흔하게 하는 부탁이지만 사장이나 직원이라면 매우 들어주기 곤란한 부탁이 있다. 바로 커피를 '진하게'(샷 추가나 재료 추가) 달라거나 음료를 '리필' 해 달라는 등 엄연히 메뉴판에 추가 지불이 필요한 메뉴를 무상으로 요구하는 것이다.
커피를 진하게 마시고 싶다면 샷 추가에 대한 추가 지불을 하면 되지만, 추가 지불도 없이 진하게 달라고 하면, 우선 "네"라고 하고 물이나 우유를 조금 덜 넣으면 된다. 가게도 손님도 누구 하나 손해 보지 않고 요구가 이뤄진 셈이다. 시럽 추가도 마찬가지도 바닐라나 헤이즐넛 시럽이 들어가는 음료를 '더 진하게' 달라고 한다면, 시럽을 반펌프 정도 더 넣어드리면 된다. 재료비로 따지면 일이백원도 되지 않는다. '더 달게' 달라고 한다면 설탕시럽을 더 넣어드린다고 하면 된다.
리필을 요구하는 손님께는 어쩔 수 없지만 추가 비용을 요구하거나, 투샷 커피라면 원샷만 추출해서 서비스로 제공하고, 다음부터는 추가 구매 하시라고 부탁한다. 가게에 금전적으로 아주 약간의 손해가 발생하긴 하지만 그런 손님이 아주 많지도 않고, "돈 내고 샷 추가하셔야 해요."라는 팩트공격으로 고객을 언짢게 하지 않았으니 커피가 좀 맛이 없어도 어쩌면 우리 가게를 한 번은 더 방문해 줄 수도 있다.
거절을 반드시 해야 할 때에는 시간을 조금 두고 "생각해 보겠다"라고 먼저 말한 후에 "미안하지만 안 되겠다"라고 시간차를 두고 거절을 해야 하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거절당한 상대방의 상황과 마음을 아주 조금이라도 공감해 주는 것이다.
빨리 갈 수 없는 상황에서 택시 기사가 "그럴 거면 좀 더 일찍 택시를 타셨어야지요."라고 말한 것은 매우 무례한 것이다. 상대방의 잘못을 꼬집어 말하는 순간 더 이상의 이상적인 교류는 불가능해진다. "몇 시 기차시죠? 출근시간대라 힘들겠는데...."라던가 "아이고, 어떡하나. 차가 꽉 막혀서 어려울 것 같은데요."라고 말했다면 어땠을까.
부탁을 하는 입장은 얼마나 간절하겠는가. 또 그 부탁을 하기 위해 낸 용기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와 우연일지언정 그러한 부탁을 받는 인연의 끈이 닿은 것에 대한 최소한의 노력을 보여주는 것은 내가 언젠가 그러한 상황에 놓이지 않을 것임을 그 아무도 단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