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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스토너씨에게

밀리의 서재 오디오북 스토너를 읽고

by 시월아이

오랜만에 호흡이 긴 장편소설을 완독 했다. 이번엔 100% 오디오북으로였다.

바로 전 주에 읽었던 히가시노 게이고의 전설적인 추리 소설인 '용의자 X의 헌신'의 여운에서 채 벗어나기도 전이라, 분위기가 완전히 다른 한 인물의 일대기를 그린 서정적인 느낌의 장편소설에 좀 더 빨리 몰입하기 위해서 오디오북을 선택했다.


책을 듣기 전에 이 책에 대해서는 전혀 알아보지 않았다. 책을 선택할 때 독자들의 리뷰만 두어 페이지 정도 볼뿐, 출판사 서평이나 줄거리에 대한 정보는 전혀 보지 않는 것이 나의 도서 선택 기준이기 때문이었다. 특히 평론가들의 서평을 미리 보는 것은 책의 내용을 내 나름이 방식으로 받아들이는 데 매우 큰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잠들기 전까지도 틈만 나면 무선 이어폰을 끼고 책을 들었다. 출퇴근 시간 지하철 안에서는 물론이었다. 그렇게 5일이 지난 어제 아침, 스토너의 이야기가 끝이 났다. 만일 이 책을 읽고자 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내 글은 읽지 않기를 권한다. 스토너가 심지어 사람 이름인지도 모른 채 책을 읽는 것이 책을 더 깊이 즐길 수 있을 거라 확신하기 때문이다.


책을 읽은 후 나는 윌리엄 스토너 씨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윌리엄 스토너 씨에게


안녕하세요 스토너 씨

저는 당신이 살아온 인생을, 아주 압축된 인생을 단 5일 만에 엿보았습니다. 어쩌면 당신이 기억하는 것보다 더 많은 당신의 고뇌, 슬픔, 욕망, 절망, 그리고 죽음을 제가 알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사실이 희한하리만치 벅차오르더군요.


솔직히 당신은 좀 답답한 면이 있었습니다. 배우자를 그렇게 고르면 안 되는 것이거든요. 이디스와의 첫 만남이 불안했던 건 저만이었을까요. 그 시대에는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 이해를 하려고 노력했습니다만, 당신을 엿보는 내내 이디스의 불안정한 행동이 당신의 인생을 아슬아슬한 외줄 위에 자꾸 올려놓는 것 같아 그녀를 향한 미움이 자꾸만 커졌습니다. 차라리 그녀가 바람이라도 펴서 당신과 그레이스를 두고 떠났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하지만 바람을 핀 건 당신이었죠. 모르겠습니다. 이디스의 이야기를 엿보지 않았으니, 그녀에게도 다른 사람이 있었을지는요....

당신과 캐서린의 사랑은 비현실적이었습니다.(설마 이 모든 당신의 이야기가 지어낸 것은 아니겠지요.) 적어도 제 눈에는 그랬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었다면 당신은 어떻게 그녀가 떠나가도록 밀쳐냈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당신의 교수 자리, 당신의 집, 당신의 아내가 그토록 지키고 싶은 것이었는지 말입니다. 적어도 저라면... 적어도 저라면, 한 번쯤은 캐서린을 찾아갔을 것 같은데 당신은 그러지 않았지요. 저는 당신을 엿보는 내내 당신 자체였지만, 캐서린이 콜롬비아를 떠나는 기차 안에 있을 때만큼은 캐서린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원망했습니다. 진짜 캐서린은 달랐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스토너 씨,

당신이 로맥스 교수와 대립하는 몇몇 장면에서는 매우 통쾌했습니다. 당신이 위선적인 워커 학생을 대학원 면접에서 낙방시키기 위해 온 힘을 기울일 때 저는 당신을 열렬히 응원했습니다. 물론 최종적으로는 그 일로 인해 당신의 교수 생활이 몇 년 간 매우 힘들긴 했었지만 말입니다. 워커는 정말이지 당신의 이야기에 등장한 인물 중 최악이었습니다. 뛰어난 통찰력과 언변술을 가졌으나, 교육자가 되기를 희망하는 사람으로서 반드시 갖춰야 할 기본 지식과 소양을 겸비하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도 없었습니다. 자신의 신체장애를 무슨 무기라도 되느냥, 주위 사람들에게 당연한 듯한 차별적 배려를 바라는 뻣뻣한 그 태도는 역겨울 정도였으니까요. 하지만 당신의 친구, 고든 핀치가 없었더라면 당신은 로맥스 교수와 조금 더 힘든 싸움을 했을 겁니다. 당신도 잘 알 겁니다.


당신이 아버지로서 그레이스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베풀었는지 잘 압니다. 하지만 그레이스에 관해서 만큼은 당신에게 쓴소리를 하지 않을 수 없군요. 나도 자식이 있으니까요.

당신이 이디스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이디스가 원하는 대로 그레이스를 키운 것은 매우, 아주, 굉장히 잘못한 일입니다. 평생 이디스를 향한 배려와 옅은 애정, 그 안에 뒤섞인 미안함과 연민으로 숨죽이며 살아온 당신이었죠. 배우자에게 마땅히 베풀어야 할 배려일 수도,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 일궈 본 척박한 땅을 딛고 살아온 온화한 당신의 성품 덕분일 수도 있지만, 그레이스를 진정으로 위했다면 그녀가 제 발로 도망치기 전, 그녀를 이디스로부터 떼어 냈어야 합니다. 아버지라면 당연히 그랬어야 합니다!

당신의 어긋난 판단으로 인해 그레이스는 원하지 않는 임신과 결혼, 사별, 그리고 알코올 중독에 이르게 되었으니까요. 제 말에 왠지 당신은 한 마디 반박도 하지 않을 것 같군요. 확신합니다.


스토너 씨,

하지만 분명한 것은 제가 당신을 알게 되어 정말 다행이라는 사실입니다. 저는 지금껏 제가 바닷가 모래사장에 흩어진 모래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파도가 몰려와 저를 덮었다가, 다시 파도가 밀려가면서 해변에 드러나 햇살을 받는. 그러다 숱한 파도질에 바닷물에 잠겨 자취를 감춰도 그만인 그런 모래알 말입니다. 그러니 누군가 날 알아채지 못하더라도 슬플 것이 없는 모래알이지요.


당신이 수술 후 집으로 돌아와 커튼이 젖혀진 창밖의 풍경의 변화들을 바라보며 침대에 누워있는 동안 저도 함께 거기에 누워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쓴 책의 책장을 쓸어 넘기며 마지막 순간을 맞는 그때에도 저는 당신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죽었지만 저는 여기에 살아서 당신에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저는 당신과 함께 죽었지만, 사실 과거의 '내'가 죽은 것이고, 지금 저는 새로운 '나'입니다.


제가 바닷가 모래알 같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마흔의 나이에 접어들면서부터였습니다. 그리고 그 나이에 맞춰 저의 모양새가 변화하고 있다고 매일 알아챘지요. 당신이 거울을 보며 그 거뭇하고 얇은 가죽과 백발의 머리를 원한다면 언제라도 벗어버릴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에 빠졌던 것처럼, 저 역시 막을 수 없는 흰머리와 주름의 습격에, 점점 세월이라는 파도에 떠밀리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이렇게 죽음을 맞아도 그것이 오히려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생각에 허무함까지 밀려왔습니다.


그런데 당신의 마지막을 함께 하면서, 아니 당신이 되어 마지막을 맞으면서 제게는 한 가지 희망이 생겼습니다. 죽음으로 인해 새로운 인생의 여정이 펼쳐질지도 모른다는 희망 말이지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분명 그런 것을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왜냐하면 죽음 이후에도 스토너 씨 당신은 지금 이렇게 나에게 편지를 받고 있으니까요.

설사 바닷속에 잠긴 모래알일지라도 그 나름의 이야기가 있다는 사실. 그 무수한 모래알 하나하나에 이야기가 있음을, 당신이 깨우쳐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래알은 자취를 감출지언정, 결코 사라지지는 않는다는 사실도요.


저는 당신을 응원했고, 달랬고, 때로는 비난도 했습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당신을 그리워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내게 선물한 소중한 당신의 이야기를 잊지 않을 것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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