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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woorain Jul 24. 2021

<랑종>, 관음을 관음하다

(*이 글에는 영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나홍진 감독이 <곡성>의 무당 일광(황정민)의 전사를 다룬 영화를 만든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 생각했다. <곡성>의 미끼를 문 것은 관객만이 아니구나. 감독도 단단히 물어버렸구나. 아직 청산하지 못하고 떨궈야 하는 이야기가 남아 있구나. 그것이 호기심이든, 미련이든, 무엇이든.  그렇게 <랑종> 프로젝트가 <곡성>에서 알을 깠다.     


<랑종>은 다큐멘터리 취재팀이 가문의 대를 이어 조상신(바얀 신)을 모시는 무당 ‘님’(싸와니 우툼마)을 인터뷰하면서 시작한다. 님은 형부의 부고 소식을 듣고 촬영팀과 장례식장으로 향한다. 가족 관계가 그리 살가운 느낌은 아니다. 님의 오빠 ‘마닛’(야사카 차이쏜)은 얼굴 좀 보고 살자고 잔소리를 하고, 언니 ‘노이’(씨라니 얀키띠칸)는 님을 본 척 만 척한다. 이 두 자매에겐 껄끄러운 과거가 있다. 원래 신내림은 노이의 몫이었다. 그러나 노이는 무당의 운명을 필사적으로 거부했고, 그런 언니를 대신해 랑종(무당)이 된 게 바로 님이다. 님을 바라보는 노이의 시선이 복잡해 보이는 건 이 때문이다.     


모큐멘터리(페이크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진행되는 영화가 흥미로워지는 동시에 거칠어지는 건 님의 조카 ‘밍’(나릴야 군몽콘켓)에게 이유 모를 이상 증상이 나타나면서부터다. 모계로 내려오는 신내림이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인 집안인 만큼 바얀 신이 밍에게 내림하는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촬영 팀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신내림이 대물림되는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밍을 밀착 취재한다.     


그러나, 이건 미끼다. 밍의 몸에 들어가 있는 건 바얀이 아니라, 악귀다. 게다가 밍의 친가, 즉, 밍의 윗세대가 저지른 원죄가 저주가 되어 낳은 업보다. 님이 조카를 구하기 위해 나서면서 영화는 ‘모계 vs 부계’ ‘바얀 신 vs 악귀’, 그리고 통제할 수 없는 숙명과 가족사로 확장된다.     


잘라 말해 <랑종>은 <곡성>의 세계관을 (연출을 맡은 반종 피산다나쿤의) 태국으로 옮겨 <블레어 위치> <파라노말 액티비티> 기법으로 찍은 영화다. 공포라는 것은 어차피 상대적인 영역이기에 ‘무섭다’ ‘무섭지 않다’ 딱 잘라 말할 수는 없으나, <랑종>이 공포를 전하는 전략은 불안이나 두려움보다 불쾌감에 기울어져 있다는 인상이 짙다. 모계로 유전된 신내림을 그리다가 원죄가 낳은 업보로 회귀하더니 좀비까지 끌어안아 난장을 벌이는데 그 흐름 또한 일견 고르지 못하다. 3장에 해당하는 마지막은 힘을 준 티를 너무 내고 있어서 초반에 쌓아 올린 축축하고 습습한 뉘앙스들을 갉아먹기도 한다. 그래서 나홍진과 반종의 만남으로 창조된 세계는 그들의 장점이 상승효과를 낳은 세계인가라는 질문에 나는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랑종>은 다큐멘터리 취재팀이 신내림을 관찰한다는 설정을 빌미로, CCTV 안에 자극적인 장면을 과도하고 구겨 넣는다. 동물 학대, 식인, 신체 훼손 등이 브레이크 없이 내달린다. 가장 걸리는 건 여성 신체에 대한 무분별한 관음이다. 다큐 카메라 시점 안에서 주인공 밍은 일방적인 관음의 대상이 된다. 아슬아슬하고, 위험하고, 여러 번 선을 넘는다. 밍에게 벌어지는 일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는 게 투철한 직업인의 자세라는 듯 구는 취재팀은 하혈하는 밍의 모습을 포착하기 위해 화장실 문틈 사이에 카메라 렌즈를 들이밀기도 서슴지 않는다.     

관찰자 임무를 띤 직업군과 빙의되는 악귀 소재를 끼워 넣어 애써 거리두기 하는 척하고 있지만, 모르겠는가. 어차피 이 모든 선택의 주체는 영화 밖 진짜 제작팀임을. 영화는 관음을 관음한다.     


자극적인 광폭 질주 속에서도, 습습하고 기기묘묘한 한기가 느껴지는 건 원안에 새겨진 나홍진의 DNA에서 기인한다. 일광의 전사에서 출발한 영화라고 나홍진 스스로가 밝힌 만큼, <랑종>에는 <곡성>과의 교집합이 꽤 많다. 인간의 원죄와 선과 악의 경계와 믿음과 불신 등 <곡성>에서 만났던 주제 의식이 극 전반에 흐른다. 그런데 정작 더 눈길을 끄는 건 두 영화 사이의 공통점이 아니다. 그것은 깊어진 나홍진의 회의주의다.    

 

나홍진 감독은 <곡성>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신의 모습을 “영화 후반부, 무명(천우희)이 골목길에 쭈그리고 앉아있는 모습”을 통해 구체화한 바 있다. 그의 말을 심적으로 긍정하든 부정하든, <곡성>은 무명의 존재를 관객 판단에 맡김으로써 믿음에 대한 일말의 희망을 열어뒀다. 그러나 <랑종>에는 그런 신조차 부재한다. 급기야 에필로그에 님의 인터뷰를 인서트로 끼워 넣어 희망을 제거해 버린다. 님은 말한다. 사실, 바얀 신을 느낀 적이 없다고. 믿는 존재를 향한 불신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게 도대체 무엇인가. 나홍진은 우리가 믿는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      


('미디어 SR'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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