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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woorain Jan 05. 2018

스크린 속, 저주받은 걸작들..어떻게 회생했나

시간을 견뎌라!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습니다” 1987년 뜨거웠던 시간 속으로 관객을 초대하고 있는 영화 <1987>은 제작과정에서부터 큰 관심을 모은 작품이다. 박종철과 이한열이 등장하는 첫 상업영화인 데다가, 김윤석 하정우 김태리 박희순 이희준 등으로 이어지는 화려한 출연진. 그리고 또 하나. 이 영화를 연출한 이가 <지구를 지켜라!>라는 저주받은 걸작을 만든 장준환 감독이라는 점 때문이다. 재기 발랄한 상상력을 빚어내는데 재능을 보인 감독이 역사적 사실은 어떻게 그려낼까. 장준환 감독은 사려 싶은 시선으로 그때 그 사람들을 스크린으로 불러들인다. <1987> 개봉을 맞아, 저주받은 걸작이라 불렸던 영화들을 찾아봤다. 시간을 견뎌 걸작 반열에 오른 작품들이다.


1. <아비정전>    


매해 돌아오는 4월 1일 만우절. 이날 가장 많이 언급되는 사람 중 한 명은 만우절 날 거짓말처럼 우리 곁을 떠난 장국영일 것이다. ‘누아르’ 영화가 붐이었던 홍콩 영화시장의 터프한 남자들 사이에서 특유의 우울한 분위기와 공허에 찬 눈빛으로 보는 이들의 마음을 적셨던 장국영. <아비정전>(1990)은 그런 장국영의 면모가 유독 도드라지게 드러난 작품이기에 만우절 날 또 어김없이 소환된다. 그런데 이 <아비정전>이 개봉 당시 엄청난 혹평과 함께 흥행에서 실패한 사실을 아는가. 실제로 국내에서는 <아비정전>을 보고 나온 관객들이 환불을 요구하는 일도 있었는데, <영웅본색> 류의 영화를 기대했던 관객들에게 <아비정전>은 그 결이 달라도 너무 다른 몽환적인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 대한 재평가는 빠르게 이뤄졌다. <중경삼림>(1994)으로 왕가위 감독이 세계적 감독 대열에 오르고, 그의 전작들이 다시 주목받으면서 <아비정전>에 대한 재평가도 이루어진 것. 이 영화는 지금 봐도 시대를 뛰어넘는 전위적 감각을 보여주는데 특히 아비 역을 맡은 장국영의 내레이션은 흡사 죽음에 대한 어떤 예지처럼 들리기도 한다. “다리 없는 새가 살았다. 이 새는 나는 것 외에는 알지 못했다. 새는 날다가 지치면 바람에 몸을 맡기고 잠이 들었다. 이 새가 땅에 몸이 닿는 날은, 생애에 단 하루, 그 새가 죽는 날이다”


2. <블레이드 러너>    


리들리 스콧의 <블레이드 러너>(1982)는 한 편의 영화가 어떻게 매몰찬 혹평을 이겨내고, 재평가 받아, 걸작 반열에 오르는지, 그 과정을 흥미롭게 보여주는 대표적인 영화다. 필립 K. 딕의 원작에 리들리 스콧의 상상력이 더해진 <블레이드 러너>는 개봉 당시 대중과 평단 모두로부터 능지처참당했다. 같은 해 개봉해 흥행 돌풍을 일으킨 스티븐 스필버그의 <E.T>로 인해 흥행 실패의 충격은 더 컸던 경우. 개봉 전 가졌던 시사회에서 영화가 너무 난해하다는 관객의 지적을 보고, 제작사 워너브라더스가 강압적으로 수정 작업을 가해 개봉시킨 것도 유명한 일화다. 당연히 개봉 버전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리들리 스콧은 1992년, 자신의 의도를 담은 감독판을 출시했는데 그렇게 진화를 거듭해 여러 버전으로 출시되며 걸작이라는 수식어를 달았다. 잘 알다시피 <블레이드 러너>는 드니 빌뇌브의 연출로 35년 만에 <블레이드 러너 2049>라는 속편으로 지난해 세상에 나왔다. 아쉽게도 이번에도 흥행에서는 실패. 평가에서는 호불호가 살짝 갈렸는데 시간이 <블레이드 러너 2049>를 어떻게 기억할지 두고 볼 일이다. 


3. <지구를 지켜라!>     


2003년도는 <올드보이>(박찬욱) <살인의 추억>(봉준호) <장화홍련>(김지운) <지구를 지켜라>(장준환) 등의 수작이 쏟아져 나온, 그러니까 한국영화 에너지가 기이하게 뜨거웠던 해였다. 그러나 이 중 유일하게 흥행에서는 좋은 성과를 얻지 못한 게 장준환 감독의 <지구를 지켜라!>였으니, 평론가와 대중의 괴리가 유독 큰 작품이기도 했다. 황당무계하지만 탁월한 상상력의 극단을 보여 준 이 작품은 그러니까, 시대를 너무 앞서간 불운의 영화였다. 당시 제작비로는 적지 않은 돈을 투입해 만든 영화는 연출이 외부 조건에 타협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밀어붙인 용감한 기획이었지만, 범대중적인 공감을 사는 것에는 실패했다. 그러나 국내외 영화제에서 수상을 이어가며 작품적으로 명예회복을 했고, 두터운 마니아층을 만들며 장준환 추종자들을 양산하기도 했다. 이후 장준환 감독이 두 번째 장편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를 들고 나오기까지 걸린 시간은 무려 10년. 세 번째 장편인 <1987>로 돌아오는 데에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아 다행이다.


4. <천국의 문>    


60년 역사의 영화사까지 파산시킨 엄청난 영화. 1980년 세상에 나온 <천국의 문>은 <디어 헌터>(1978)로 오스카 감독상을 수상한 마이클 치미노 감독의 야심작이었다. 하지만 작가적 야심이 너무 앞섰던 것일까. 750만 달러였던 제작비는 제작과정에서 당시로써는 천문학적인 4400만 달러까지 치솟았는데, 고작 150만 달러 수익을 거두는데 그치며 영화사 ‘유나이티드 아티스트’를 파산으로까지 몰고 갔다. 영화가 너무 길고 반미국적이라는 이유로 평론가들과 관객들로부터 매몰찬 혹평까지. 여기엔 러닝타임이 너무 길다는 이유로 최종본을 싹둑 잘라낸 영화사의 판단도 독으로 작용했다. 불운의 아이콘으로 역사에서 사라질 위기에 처했던 <천국의 문>. 그러나 반전은 바다 건너에서 일어났다. 프랑스 영화지 ‘카이에 뒤 시네마’가 그해 최고의 영화 가운데 하나로 <천국의 문>을 선정하며 반전의 역사를 쓰이기 시작한 것. 영화는 시간이 흐르면서 ‘걸작’ 칭호를 부여받았고, ‘저주받은 걸작’의 대명사가 됐다.


5.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편집 난도질’로 훼손당한 비운의 걸작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영화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1984)다. 지금은 갱스터 무비의 걸작으로 꼽히지만, 개봉 당시만 해도 영화는 불균질한 스토리 연결로 인해 평론가들과 관객들에게 혹평을 받았다. 당초 4시간 이상으로 제작된 영화를 흥행을 염려한 제작사가 무자비한 편집으로 2시간짜리로 둔갑시켰기 때문이다. 2시간 남짓한 시간만으로는 애초 감독이 의도했던 방대한 시대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건 무리였을 터. 갖은 풍파를 겪은 영화는 결국 감독의 의도를 살린 229분 버전이 공개되고 난 후에야 재평가를 받고 걸작의 반열에 올랐다. 엔니오 모리코네가 만든 사운드트랙(OST)은 지금도 사랑받는 명음악. 영화의 배경이 된 브루클린 브릿지는 여행자들이 찾는 명소로 사랑받고 있다. 제니퍼 코넬리는 이 영화를 통해 첫사랑의 아이콘으로 떠오르기도.


6. <심연/어비스>    

 

“내가 세상의 왕이다!(I'm the king of the world)” <타이타닉>(1997) <아바타>(2009)로 흥행의 왕임을 증명한 제임스 카메론이지만 그에게도 유독 아픈 손가락이 있다. 1989년 나온 <심연>(어비스)이다. <심연>은 해저세계에 관심이 많아 해양생물학자까지 꿈꿨던 ‘해양 덕후’ 제임스 카메론의 야심이 투영된 영화였다. <터미네이터>(1984)와 <에일리언 2>(1986)로 상종가를 달린 제임스 카메론은 폭스사의 전폭적인 지지를 엎고 <심연>을 내놓았으나 흥행에서 참패했다. 평단의 평가도 호불호가 갈렸던 경우. 그러나 이 작품은 시간이 지나면서, 특수효과 기술을 몇 차원 끌어올렸다는 점에서 재평가를 받았다. 바닷물이 허공에 둥둥 떠서 여러 가지 얼굴 표정을 만드는 장면 등이 기술 혁신을 보여준 대표적 명장면이다. <심연>이 있었기에 3D 신기원을 세운 <아바타>가 나올 수 있었던 셈이다.


7. <파이트클럽>    


<세븐>(1995)을 통해 할리우드에 성공적으로 안착했던 데이빗 핀처의 세 번째 연출작. 브래드 피트의 대표작으로도 거론되는 <파이트 클럽>(1999)은 그러나 개봉 당시 흥행과 평가에서 모두 신통치 못했다. 6300만 달러의 제작비를 투입했으나, 북미에서 3700만 달러를 벌어들이는 데 그쳤으니 감독과 배우 이름을 생각하면 아쉬워도 한참 아쉬운 결과물이었다. 자본주의나 대중매체가 덧씌우는 환상을 충격적인 방식의 반전으로 그려낸 영화는 스타일 과잉이라는 쓴소리를 듣기도 했다. 그러나 영화는 마니아를 중심으로 열광적인 반응을 이끌어내며 시간과 함께 새로운 입지를 다졌다. DVD 시장에서 큰 인기를 끌며 극장에서 구긴 자존심을 한껏 세우기도. 개봉 당시에도 테일러 더든을 연기한 브래드 피트에 대해서는 모두 호감을 보냈는데, 놀라운 카리스마로 영화를 장악하는 브래드 피트는 지금 봐도 멋지다.


8. <칠드런 오브 맨>    


국내에서 유독 불운했던 영화,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칠드런 오브 맨>이다. 2006년 북미에서 개봉한 <칠드런 오브 맨>은 다소 암울한 디스토피아 정서 탓인지 흥행에서 부진한 성적을 거뒀다. 그리고 북미 흥행 부진 여파로 국내에서는 아예 소개도 되지 못하는 굴욕을 겪었다. 그러나 영화는 2000년대 영화 베스트 목록에서 자주 언급되면서 영화광들 사이에서는 ‘SF걸작’으로 추앙받기 시작했고 이에 힘입어 지난 2016년, 국내에서 10년 만에 정식 개봉하는 전설을 썼다. 영화는 서기 2027년 종말을 앞둔 미래를 배경으로 한다. 더 이상 생명이 태어나지 않는 절망적인 현실을 살아가던 인류 앞에 기적적으로 아이를 잉태한 한 소녀가 나타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는 10년이 지난 지금 봐도 세련되기 그지없다.


9.  <악마의 씨>    


조금 다른 의미에서의 저주받은 걸작이다. 1968년에 개봉한 로만 폴란스키의 <악마의 씨>(원제 <로즈메리의 아기>)는 오컬트 무비의 시초로 불리는 작품. 평범한 가정주부가 뉴욕의 고급 아파트에 입주했다가 중산층으로 위장한 악마 숭배자들에 의해 악마의 씨를 잉태하게 된다는 내용으로, 로만 폴란스키 필모그래피 중 가장 소름끼치는 작품으로 호평받았다. 흥행에서도 엄청난 성공을 거뒀는데, 이로 인해 오컬트 무비 제작이 활성화되기도. 이 영화는 기이할 정도로 비극적인 후일담으로도 오래 기억된다. 영화가 개봉한 지 1년이 지난 1969년, 영화에 감화된 살인마 맨슨 일당이 당시 로만 폴란스키의 아내였던 여배우 샤론 테이트와 그녀 뱃속의 아이를 무참하게 살해한 것. 비극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비슷한 시기 음악을 맡았던 크리스토퍼 코메다가 극 중 캐릭터와 동일한 증상인 뇌출혈로 사망했고, 그 무렵 제작자인 윌리엄 캐슬도 신부전으로 입원했다. 여러 부분에서 큰 상처를 안긴 저주라 하겠다.


다음 영화 매거진 기고글.

http://magazine2.movie.daum.net/movie/47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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