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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woorain Jul 26. 2021

스칼렛 요한슨이란 ‘유니버스(Universe)’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바라보며) 당신은 (작품과 관련된) 그럴듯한 질문을 받는데, 왜 나는 ‘토끼풀을 뜯어 먹나요?’ 따위의 질문을 받는 거죠?” 2012년 런던에서 열린 <어벤져스> 기자간담회에서 몸매 관련 질문을 받은 스칼렛 요한슨의 반응이다. 불편한 질문을 재치 있게 맞받아치는 센스와 기자를 향한 비판이 절묘하게 믹스 된 프로다운 대처! 해당 영상은 인터넷 바다를 통해 빠르게 퍼져나갔고,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소비하려는 이들에게 적잖은 경각심을 안겼다. 


이 상황은 사실 스칼렛 요한슨에게 그리 낯설지 않다. 미디어는 오랜 시간 그녀의 ‘몸’에 과도한 집착을 드러내곤 했으니까. “최고 가슴의 소유자로 선정된 소감이 어떠십니까?” “최고의 엉덩이로 뽑혔는데 한마디 해주시죠!” 그럴 때마다 그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우리 어머니가 자랑스러워하시겠네요”라거나 “왜 제, 콩팥이나 뇌는 평가하지 않죠?”라고 당당하게 응수하곤 했다.


때론 한발 더 나아갔다. 여성의 몸을 성적인 것으로 강제하는 시선이야말로 문제라는 듯,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베니티 페어’ 잡지 표지에 등장해 전 세계 독자의 눈을 번쩍 뜨이게 했다. 대중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이 영리한 배우는 그 점을 역이용하기도 한다. 가령 스칼렛 요한슨이 전라 연기를 감행했다는 사실로 화제를 모았던 <언더 더 스킨>(2013)에서 그녀는 자신의 육감적인 몸매를 관객의 기대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활용함으로써 몸을 그저 ‘오브제’로 바라보게 했다. 휴대폰 운영체제인 사만다 목소리를 연기한 <그녀>(2013)에서는 얼굴 한 번 드러내지 않고 존재감을 새겨 넣는 동시에, 관객의 상상을 더욱 부풀어 오르게 했다.  


스칼렛 요한슨에겐 연기력이 풍만한 육체에 가려질까 두려워하는 면모가 보이지 않는다. 이는 그녀 특유의 배짱 두둑한 성격에서 비롯되는 면이 크지만, 타이밍의 운도 큰 몫을 했다. 미디어가 그녀를 섹시스타 이미지로 포박하기 전에, 연기하는 사람으로서의 가치를 ‘2차 성징’이 완성되기 전에 증명했기 때문이다. 

9살 때 <노스>(1994)로 스크린 데뷔식을 치른 스칼렛 요한슨은 1996년 <매니 앤 로>로 인디펜던트 스피릿 어워즈 여우주연상 후보에 등극하며 남다른 촉을 알렸다. 로버트 레드포드의 딸로 출연한 <호스 위스퍼러>(1998)로 인지도를 쌓은 후엔 상업적으로 빤질거리는 제안들이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그녀가 선택한 건 하이틴 로맨스 속 금발 머리 치어리더가 아니라, <판타스틱 소녀백서>(2000)의 괴짜 소녀 레베카였다. 아니, 이 꼬마 아가씨가 세상 물정도 모르고! 에이전트의 성화가 이어졌다. 그러나 매니지먼트를 담당하던 그녀의 어머니는 딸이 원하는 작품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지지했다. 이는 스칼렛 요한슨을 할리우드의 천편일률적인 숙성코스에서 빼내, 자기만의 개성을 두른 연기자로 성장하도록 길을 터주었다.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와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가 개봉한 2003년은 성인 연기자로 들어서는 그녀에게 의미 있는 해였다.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에서 그녀는 낯선 도시에서 외로움과 권태를 느끼며 번민하는 샬롯을 절제된 감정으로 표현하며 호평받았다.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대표작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스크린을 옮긴 동명의 영화 안에서의 스칼렛 요한슨은 푸른 수건을 머리에 두른 명화 속 비밀스러운 여인(그리트)을 천부적인 감각으로 살려냈다. 특히 베르메르(콜린 퍼스)와 그리트의 시선이 교차할 때 감지되는 에로스란! 수면 아래 들끓는 감정을 절제된 표정으로 뿜어내는 영화 속 그리트의 모습이 너무나 고혹적이어서, 나는 가끔 베르메르 원본과 스칼렛 요한슨의 모습을 혼동(하고 싶어)하기도 한다. 

우디 앨런의 영화 <매치 포인트>(2005)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에서 발현된 스칼렛 요한슨의 관능미와 매혹을 정중앙에서 포획해서 활용한 영화다. 영화에서 스칼렛 요한슨이 연기한 노라는 남성들의 이성을 교란할 정도로 성적 매력이 풍기는 치명적인 여성으로 묘사되는데, 스칼렛 요한슨을 그런 노라를 일말의 거짓 없이 받아들이게 했다. 1년 후 우디 앨런은 스칼렛 요한슨이 지니고 있는 말괄량이 적인 면모를 <스쿠프>(2006)로 소개하기도 했다.


크고 작은 영화 사이를 편견 없이 오가던 스칼렛 요한슨에게 2010년 마블과의 만남은 남다른 의미의 커리어 영역 확장을 가져온다. 머리를 직접 붉게 물들이고 마블 스튜디오를 찾아갈 정도로 블랙 위도우 캐스팅에 공을 들였던 것으로 알려지는데, 당시만 해도 마블이 10년 후 세계영화시장의 노른자가 되리라 예상한 사람은 드물었으니 그녀의 안목에 박수를. 


돌이켜 보면,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 안에서 블랙 위도우의 변화는 마블이 시대를 읽는 리트머스지 같기도 하다. 스칼렛 요한슨의 마블 데뷔전인 <아이언 맨2>(2010)에서의  블랙 위도우를 떠올려 보자. 몸매가 드러나는 꽉 끼는 H라인 스커트를 입은 ‘섹시한 비서’로 스타크 인더스트에 잠입하는 게 그녀의 첫 임무였다. 스칼렛 요한슨 스스로 “처음에는 캐릭터가 너무 성적으로 그려졌다”라고 회고할 만큼, 마블은 그녀의 섹시함을 강조했다. 남성 캐릭터들과 ‘썸’으로 엮이면서, 숱한 구설수에 오른 것 또한 홍일점인 블랙 위도우가 감당해야 하는 부분이었다. 

외풍도 있었다. 마블 엔터테인먼트 전 CEO 아이작 펄머터는 2015년 여성 히어로 완구는 인기가 없다며 블랙 위도우 제품 제작을 줄이라 지시하기도 했는데, 원년 멤버 아이언맨 캡틴 토르 헐크가 독자 시리즈를 통해 전사를 쌓은 것과 달리 개별 작품 안에서 충분한 서사를 제공 받지 못한 건 이러한 흐름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그래서 솔로 무비 <블랙 위도우>는 스칼렛 요한슨에게도 이후의 히어로 시장에도 의미심장하다. <블랙 위도우>에서 스칼렛 요한슨은 연기만 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 영화를 총괄한 제작자이기도 했다. 선택의 키를 쥔 스칼렛 요한슨은 자신의 은퇴식을 여성 연대와 해방의 서사로 그려냈다. 남성 편향적이었던 히어로 시장에서 11년간 꿋꿋이 버티고 구르고 노력하고 목소리 낸 선배 스칼렛 요한슨의 유산은 그렇게 후배인 플로렌스 퓨에게 이어진다. 


‘토끼풀을 뜯어 먹나요?’ 따위의 질문을 10여 년 전 받았던 스칼렛 요한슨은 <블랙 위도우> 기자간담회에서는 캐릭터의 변화와 관련된 질문을 받았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지속적으로 진화한 블랙 위도우에 자부심을 느낍니다” 스칼렛 요한슨은 마블을 떠나지만, 그녀가 이끈 변화는 MCU를 타고 흐를 것이다.


('씨네플레이'에 기고한 배우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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