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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woorain May 25. 2022

<나의 해방일지> 손석구, 추앙의 의인화

최근 급속도로 친해진 단어를 꼽자면 단연 ‘추앙’이다. 혼자만의 상황은 아닌 듯한 게, 지인들로부터 하루 걸러 한 번꼴로 ‘추앙’이란 단어를 듣는다. “추앙하자.” “추앙하냐?” “추앙해 주라!” “야, 추앙 좀!” 추앙을 올해의 단어라고 하는 건 아직 이르려나. 그러나 이달의 단어라고만 하기엔 뭔가 부족하다. 그러니 상반기 히트 단어쯤으로 해두자. 알다시피 국어사전에 조용히 파묻혀 있던 추앙이라는 단어를 밈(meme)처럼 건져 올린 건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의 염미정(김지원)과 구씨(손석구)다.     


“나를 추앙해요.” 미정이 저 대사를 내뱉었을 때, 뭔가가 훅하고 날아와 머리를 타격하는 기분이었다. 어떻게 저런 말을 하지? 생경하다 못해 놀랍고, 놀랍다가 이내 호기심이 일었다. 아, 미정이는 범상치 않구나. 그런 미정으로부터 ‘추앙하라’라는 미션을 하달받은 이는 마을의 수상한 이방인 구씨다. “(역에서) 잘못 내리는 바람”에 산포마을로 흘러들어 온 구씨는 염씨(천호진)네 집에서 일하고 밥 먹는 시간 빼고는 대부분을 홀로 우두커니 앉아 초록색 병 소주와 함께 보낸다. ‘남아일언중천금’이 인생의 모토인 양, 웬만하면 타인과 말을 섞지 않는 그는 “같이 술도 마시고 그래요”라는 염창희(이민기)의 물음에도 무심, “어차피 (소주) 또 사러 올 거, 몇 병 더 사 가지?”라는 편의점 아주머니의 오지랖도 무심히 즈려밟고 자기 갈 길만 갈 뿐이다.  

    

이쯤에서 노래 가사 하나가 떠오른다. 나 혼자 길을 걷고 나 혼자 TV를 보고 나 혼자 취해 보고 그렇게 매일…. 그렇게 씨스타처럼 살던 남자의 삶이 염씨 집안 막내딸 미정의 느닷없는 도발로 인해 균열이 생긴다. “추앙, 어떻게 하는 건데?” 그러게. 나도 궁금했고, 아마 보는 시청자들도 궁금했을 것이다. 추앙은 대체 어떻게 하는 걸까. 흥미롭게도, 실체가 잡히지 않던 추앙이라는 단어가 구씨를 통해 무심하게 펼쳐지면서 그 뜻과 의미가 옹립되기 시작한다.      


미정을 향한 구씨의 비공식적인 첫 추앙이 인상적이다. 염씨네 가족과 고추를 따던 여름날. 바람에 날려 도랑 너머로 날아간 미정의 모자를 줍기 위해 어마무시한 도움닫기로 폴짝 넓이뛰기, 아니 그것은 분명 날아오르기, 하는 구씨. 이 추앙을 기점으로 <나의 해방일지> 서사도 크게 도약하고, 과묵해 보이기만 했던 구씨도 변하기 시작한다. 나 혼자 길을 걷고 나 혼자 취해 보던 구씨는, 미정과 함께 걷고 미정 곁에서 취해도 보고 미정의 퇴근길 마중도 나간다.      


추앙은 라면과 물에도 스며든다. 전 남자친구와의 돈 문제로 얼굴 붉히며 화를 내는 미정을 감정적으로 대하기는커녕 라면을 끓여주며 “먹어, 추앙하는거다.”라고 말하는 구씨. 물도 알뜰하게 대령한다. 그러곤 내뱉는 말이 추앙의 끝판왕이다. “나 진짜 무서운 놈이거든? 옆구리에 칼이 들어와도 꼼짝 안 해. 그런데 넌 날 쫄게 해. 눈앞에 보이면 긴장해. 그래서 짜증 나. 짜증 나는데 자꾸 기다려. 알아라 좀. 염미정!” 미정에게 내뱉는 구씨의 저 대사는 흡사, 시청자가 그에게 하고 싶은 말 같기도 하다. 보는 이들을 긴장시키는 손석구라는 이름의 존재 말이다.     

<나의 해방일지>를 보면서 손석구에게 느끼는 매력은 여러 가지이지만, 크게 두 가지를 언급하자면 첫 번째는 ‘화면 장악력’이다. 손석구는 아도니스 계열의 절세 미남은 아니지만, 쌍꺼풀 없이 가로로 길게 뻗은 눈꼬리와 감정을 숨길 수 없을 때 위로 살짝 치켜 올라가는 입꼬리는 작은 움직임만으로도 풍부한 표현을 담아낸다. 이 컨트롤타워에서 ‘소년미’가 나왔다가, ‘마초성’이 출몰했다가, ‘섹시미’가 슬쩍 고개를 든다. 잡히지 않는 혼종의 매력이 바로, 관객의 시선을 잡아끄는 유인책이다. 드라마 초반 구씨에게 부여된 대사는 거의 없었다. 1~2회 때는 한두 마디 했나? 그럼에도 그는 등장할 때마다 관객의 시선을 훔친다. 대본에선 그저 ‘소주병을 들이킨다’ 정도로 기술됐을 신에서도, 공허한 눈빛과 어깨에 찌든 고독을 짊어지고 있는 몸짓으로 극에 긴장을 부여했다.      


시나리오가 존재하긴 하지만 이것이 기실 손석구가 부여한 매력임을 의심하지 않는 건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 가령 손석구를 이야기할 때 자주 언급되는 <멜로가 체질>에서 그는 주연도 아니고 조연도 아닌 특별출연일 뿐이었고, 그가 등장한 분량만 따로 편집한다고 해도 30분도 안 됐는데 많은 사람은 그가 이 드라마의 주요 인물 중 하나라는 인상을 받았다. 출연 분량과 상관없이 보는 이들을 감전시키는 능력은 배우에게 큰 자질이다. 힘 빼고 연기하는 듯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신체 기관이 연신 상대에게 반응하고 있는 것도 알 수 있다. 자신의 과거를 밝히며 “추앙. 취소해도 돼”라고 말했을 때 “언제 추앙했는데?”라고 응수하는 미정에 반응하는 구씨의 목덜미를 주목하길. 표정은 바람 한 점 없는 바다 지표면 같은데, 목울대는 꿀렁 꿀렁 꿀렁 연신 흔들리고 있다. 

또 하나는 매력은 기이한 호흡법이다. 손석구의 연기는 숨을 불어넣고 끊어내는 지점과 대사를 치고 빠지는 타이밍이 남다르다. 음악으로 따지면 ‘엇박’의 호흡이라고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흥미로운 건 이것이 관객을 따돌리기는커녕 그가 연기한 캐릭터를 호기심으로 보게 하는 힘이 된다는 것이다. 어디에서 대사를 치고 나올지 대중을 긴장시키는 그는, 예측 불가능한 완급조절로 시청자로 하여금 ‘이 사람, 봐라?’ 하는 심정이 되게 한다. 참, 신경 쓰이게 하고, 계속 보고 싶게 만드는 연기다.      


최근 예측불허의 호흡과 리액션으로 대중의 시야에 들어온 이가 누구더라. 아마도 ‘이런 족보 없는 연기’를 우린 구교환에게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관습의 테두리 밖으로 넘을락 말락 하는 기세로 자신만의 독자성을 입증해 보인 구교환 말이다. 물론 손석구는 조금 다르다. 구교환이 여성/남성의 이분법에 억눌리지 않고 다양한 영역에 침투한다면, 손석구는 누가 봐도 ‘나, 남자!!!’라는 기운을 내뿜으며 최근 몇 년간 각광받고 있는 ‘무해한 남자’들과의 차별화를 이뤄낸다. 그러니까 공감보다는 판타지를 안기는 유형이다. “나 원래 이런 놈이니 알아서 해라” 식의 제스처는 거칠지만, 마력이 깃든 것이어서 <멜로가 체질>의 은정(전여빈), <60일, 지정생존자>의 정수정(최윤영), <최고의 이혼>의 진유영(이엘)의 마음을 흔들었다. 그리고 지금 <나의 해방일지>의 미정과 브라운관 너머 시청자도 흔드는 중이다. 추앙과 함께 손석구가 날아올랐다.      


<퍼스트룩 매거진>에 쓴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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