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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xsoul Jul 21. 2020

상실에 대하여

20200704

 한 번씩 큰 일을 겪을 때마다 살아가는것이 신물이 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신물이 나는 시기마저 극복되면 현실이 편안해지는 느낌이 든다.

 

 큰 일은, 충격을 주는 일들은 보통 '잃는' 것이다. 그런데 그 스케일은 점점 시간이 흐를수록 커진다. 애기 때에는 백원, 이백원을 잃었고 그게 너무 화가 나고 슬퍼서 오열도 많이했지. 그런데 금액은 만원이 되고, 십만원이 되고, 백만단위까지.. 한 번씩 금전적 가치 손실 단위가 스케일 업 될때마다 충격의 스케일도 업 된다. 그 분노의 경험치는 쌓이고 쌓여 다시는 잃지 않겠다는 오기에 '신중'이라는 가치로 승화되기도 하지만, 그 신중은 차곡차곡 쌓여 아이러니하게 또다른 욕심을, 그래서 또다시 상실을 낳게 된다. 보다 높은 스케일로.

 금전 손실 뿐만이 아니다. 나이를 먹어가며 '사람'도 잃는 스케일이 커진다. 단짝 친구가 옆 동네로 이사가는 상실감. 그것은 초등학교의 내가 느낄 수 있는 슬픔의 최대 용량이었다. 그러나 사랑한 존재와의 이별, 가까운 사람의 죽음까지. 어느새 돌이킬 수 없는 수준까지, 잃음의 스케일은 자꾸 커지기만 한다. 그것들을 감당하는 것은 매번 미친듯이 힘들다.


 그러나, 불행일까 다행일까 가능은 하다는 것. 그 '잃는 것'들의 스케일이라는게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점진적으로 티안나게 시나브로 커졌기 때문일까. 이전과 다른 상실, 이전과 같은 극복. 울고 불고 부정하고 분노하고. 우울하고. 그리고 다시 수용상태. 그저 살기 싫고 현실에 대해 복잡한 생각이 가득이지만, 수용 상태가 되면 뭐랄까, 현실이 편안해지는 느낌. 수용 단계가 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은 '고요한' '일상'. 아무일 없는 고요한 일상이 다행이라는 마음이 들때부터 수용은 시작된다. 그리고 이 평화로운 외부 상태 속에서, 내 마음은 '언제든 벌어질 수 있는 더 큰 상실'을 대비하는 오분대기조 상태가 된다. 더 큰 안좋은 일은 언제든지라도 지금 당장이라도 벌어질 수 있다. 그렇게 점점 더 많은 순간을, 노심초사의 적대감으로 받아들인다.


웃음이 없는 어른들이 이해가 간다.

나도 이미 그런 어른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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