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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xsoul Jul 27. 2020

이해 받지 못한 자들

20200726

  책을 읽을때, 보다 구체적으로는 80년대 즈음을 시대적 배경으로 한 소설이나 회고록을 읽을때마다 주인공들이 뭔가 부럽다는 느낌이 들었다. 왜 그런 느낌이 드는지 따라가본적은 없지만, 대충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그 혼란스러웠던 사회 속에 있고 싶었다거나 그때가 지금보다 살기 좋았네 마네하는 가치판단은 하고 싶지 않다. 그저 다수에게 대의가 중요했던 어수선한 시기였기에, 그저 지금처럼 인간관계 속에서 소소한 말거리로 상처받고 가식적으로 서로를 대하는 태도는 적어도 없는 것 같다고 느껴진다. 어떤 부분에서 이건 전형적인 '내 인생이 세상에서 제일 힘들어'식의 마인드에서 오는, 남의떡이 더 커보이는 마인드일 수 있다. 현재 나를 힘들게 하고 있는 것들이 현실을 반영한 그 때의 가상세계에서는 없는것에 대한 부러움.

  요즘처럼 공허함과 외로움에 대한 하소연을 입에 달고 사는 수많은 사람들이 적어도 그때는 없었을것이다. 전쟁같은 삶 속에서 외로움에 대한 철학적 사고는 사치일테니까. 그런 논리로 외로움과 고독함은 사치품이다. 그러나 뭇 인간이라면 통상 그러하듯, 나에게 나의 괴로움은 세상 가장 힘든 고통인것이다.


  조금 멀리 간 이야기일 수 있겠지만, 청춘을 저런 감성 속에서 지냈기 때문일까 윗 세대에게 정서적인 공감을 기대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생각이든다.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은 가치를 쉽게 공감할 수 있는 것은 그 누게에도 어렵고, 그 어려운걸 큰 계기없이 하지는 않을테니까. 렇게 공감받지 못한 감정은 외로움을 한층 더 악화시키고 해결되지 않은채 영원히 우리를 떠돌며 괴롭히겠지. 누군가는 힘든 시절을 살았던, 끼인세대를 우리가 이해해야한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아무것도 모른채 세상에 노출되어서 이유없이 상처입은 우리가 그런 성인군자가 되어야하는 합리성은 어디서 찾을 것인가. 성인군자가 못 된 것도, 이해하지 못하게 가르침받은 것도 결국 우리의 몫은 아닌 것을. 피해자만 있게되는 전형적인 상황.


  이해받지 못한자들은 남을 이해할 여유가 없다. 비혼, 비출산에 대한 원인이 실상은 공감받지 못한 감정들이 쌓이고 쌓여 깊은 상처로 자리잡았고, 그 상처를 나로 인해 타인에게 물려주고싶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을, 무고한 피해자를 적어도 나로인해 만들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들은 알고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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