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에 살면, 그 나라의 문화와 가치관을 배우는 것도 있지만, 사실은 오히려 넓게는 내가 자라온 나라의 문화, 좁게는 내 개인 특성에 대해 배우는 것이 더 많은 것 같다. 문화 자체를 배운다기보다는, 내가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행동했던 어떤 ‘습성’이 실은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그런 종류의 배움이다. 자기 객관화랄까. 그것들은 결코 누군가에게는 당연하지 않은 내가 자란 환경의 문화나 혹은 내 고유의 특성인 것이다. 얼마 전 얘기나눴던 ‘부탁’에 대한 것으로 다시한번 이 습성을 자각했다.
독일,폴란드,스페인,이탈리아, 슬로베키아,중국A, 중국B, 한국의 아주 다양한 국적으로 이루어진 현재 연구소 그룹. 휴가철이라서 갈 사람은 다 가고 남은 사람만 여느 날처럼 커피를 마시는 아침 커피타임 루틴에서 중국친구A가 보이지 않았다. 스페인 친구에게 물어보니, 자전거를 타다가 넘어져 팔이 다쳐서 병원에 간다고 했다. 안타까운 마음이 든 채로 커피를 마시는 중에, 다른 그룹의 중국 애가 다급하게 와서 와서 혹시 중국친구A을 봤냐고 물었다. 본인과 병원에 가기로 했고 거기서 만나기로 했는데 만나지 못했다면서. 우리는 못봤다고 했고 그는 다시 다급하게 어딘가로 전화를 하며 갔다. 그가 가고 나서 스페인 친구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말했다.
스 : 정말 이상해. 독일에서 병원을 가는데 독일어를 아예 못하는 중국 친구를 데려가면 도움이 하나도 안 될텐데. 내가 도와주겠다고 해도 괜찮다고 하고.. 항상 중국 사람들끼리만 이야기를 하잖아. 한 두번이 아니야. 왜 중국 애들은 한번도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걸까. 정말 이해가 안 가.
나는 보통은 입을 다물고 굿리스너인 척 듣기만 하지만, 그 날 그 자리에는 독일, 스페인, 슬로베키아,한국 이렇게 네명 뿐으로 유일한 아시아권 사람으로서, 왠지 모르게 변호를 해야만 할 것 같은 의무감에 내가 말했다.
나 : 아마도 문화차이지 않을까…? 상대방이 어떤 상황이 있을 수도 있고, 그래서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에 괜히 부탁하기 미안해 하거나.
역시나 강력한 개인 의견 어필보다는, 다소 자신감 없어보일 수도 있는 완곡한 표현으로만 나의 생각을 전달했다.
독 : 이해하기 어려워. 나도 걔들이 부탁을 왜 안하는지 모르겠어. 나는 나에게 부탁을 하지 않으면 오히려 그건 공격적이라고 느껴. 나를 무시하는건가? 내가 저사람에게 그렇게 못미더운 사람인가? 하고.
독일 애가 말한 ‘공격적’이라는 말이 꽤 강력해서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누군가는 공격적이라고 느낄 만큼 우리는 왜 부탁들 많이 하지 않는거지?? 남을 배려하는거 라고 둘러대긴 했지만 사실 제대로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우리는, 아니 나는 왜 부탁하지 않지? 그 날 이후 자꾸 머리에 맴돌다가 나는 나름대로의 내린 결론은, ‘우리는 항상 바쁘기 때문’이다. 모두가 바쁘게 산다. 우리에게는 시간이 항상 없다. 업무 중에는 항상 쌓여있는 일에 치이고, 퇴근을 해도 갈 곳은 많고 다시 치이고, 주말에도 무언가의 스케줄로 항상 바쁘다. 기본적으로 노동 시간이 아주 길고 개인당 부여받는 업무는 언제 어디에서나 항상 많기 때문에, 남의 부탁은 선의로 할 수 있는 가벼운 것이 아니라, 그저 추가적 업무로서 받아들여질때가 많다. 결국 누군가의 부탁은 나의 시간을 내 주어야 하는 것인데, 일이 많은 우리는 보통 시간적, 심적 여유가 없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부탁은 요청하지도 들어주지도 못하는 것이 암묵적 룰이 되지는 않았을까.
또 다른 나름대로의 결론: 많은 양의 업무 처리를 위해, 그리고 급성장한 역사 때문에 우리가 효율과 스피드를 그 무엇보다 중요시하는 것도 한 몫 하는 것 같다. 처음 독일에 와서 일을 시작했을때 내 보스는 나에게 불만을 표현한 적이 있었다. 구글링을 멈추라고. 너의 옆에 동료가 이미 실험을 해보고, 너가 하는 비슷한 일들을 경험적으로 다 겪었고 너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이 아주 많은데 왜 그 동료를 이용하지 않냐고. 구글에서는 실제로 겪은 경험한 생생한 정보를 얻을 수가 없고, 특히나 우리가 하는 연구에 관한거라면 잘못 된 정보도 아주 많다고. 나는 그때 아주 충격을 받았었다. 왜냐하면 직전에 한국에서 연구를 할 때에는 동료 혹은 선배에게 물어보면 ‘구글부터 하고 와. 구글에 다 나와있어. 찾아보지도 않고 먼저 물어보지 마.’ 하고 정 반대의 불만을 표현했었으니까 (거절을 하도 당해서 거절당하기 싫어서 점차 부탁을 안하게 된건지도 모르겠다). 그때부터 남에게 물어보기 전에 구글부터 검색하고, 스스로 해결해왔던 것이 나는 일종의 ‘성장’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이후에 독일에 와서도 구글부터 해보고 스스로 해결하는 나를 보며 ‘그래, 잘 하고 있어.’ 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여기서는 질책받는 사유가 되는 것이 조금 억울하기도 했다.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예전 한국에서는 동료든 선배든 각자의 일이 너무 과하게 많았고, 남의 연구까지 도울 여유가 없었던 점, 그래서 가장 빠르고 효율적으로 스스로 해결하는 문화가 만연해있던 점, 펀딩 때문에 빠른 시일 내에 '되는 것'만 해서 성과를 보여야 한다는 점의 상황이 있던것 같다. 아무튼 효율을 중시하는 이전의 연구 문화와 토론을 중시하는 이쪽의 연구문화의 온도 차이가 너무나 달라서 심난했었다. (독일 내 과학 분야에서 돈이 굴러가는 방식은 애초부터 너무 다르기 때문에 중점적으로 보는 것이 너무 다른것은 어찌보면 너무 당연하지만)
어쨌든, 나는 부탁부터 하고 보는 이쪽의 문화와 스스로 빨리 해결하려는 기존의 문화 중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하는지 혼란스러워 이도저도 못한 시간을 많이 보냈고, 결국 연구소를 2년 넘게 다니면서 부탁 자체를 많이 하지 않았다. 그런 나를 돌이켜보니 그것이 이들에게는 공격적으로 비춰졌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까 뜨끔, 했다. 그래서 그날 오후, 내 오피스 뒷자리에 앉은 독일 친구에게 독일어로 작성해야하는 초록을 그냥 구글번역 돌렸는데, 문맥에 맞게 번역이 되었는지 검토해달라고 부탁했다. ‘너에게 ‘공격적’이지 않기 위해 부탁 하나할게.haha’하는 말과 함께. 내가 부탁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팔이 부러진 중국 애A가 와서 독일 애에게 X-ray를 찍어야 하는데 의사가 번역할 사람을 데려오라고 해서, 병원에 혹시 동행해 줄 수 있는지를 ‘부탁’했다. 최근 바빠보이는 독일친구에게 조금 귀찮을 수 있는 상황이지만, 본인이 뱉은 ‘공격성’에 대한 이야기때문인지 중국 친구A의 부탁에 흔쾌히 기꺼운 마음으로 승낙한 것 같은 것은 기분탓이었을까.
팔에 깁스를 했다는 중국 친구A는 며칠째 나오지 않고 있다. 한국이었다면, 오렌지 주스 열 병 들이 한 박스 사 들고 병문안이라도 갔겠지만 여긴 그렇지 않으니까, 하며 그녀의 빠른 쾌유를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