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민 (20210903)
베를린에서 석사중인 독일인인 탄뎀 친구(언어 교환 친구) C는 학기가 끝나고 바로 고향집에 가 있었다. 그리고 그 날 C는 고향 친구를 만나서 술을 마셨다고 했다. C는 남자였고, 내가 당연하게 떠올린 그림은 C와 또 다른 남자 이렇게 둘이서 펍에 가서 맥주를 마시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C는 칵테일을 배달시켜서 친구와 집에서 먹었다고 했다. 그 칵테일을 친누나가 가지고 있던 욕조 (whirl pool; 안마할 수 있는 큰 스파 욕조같은 것)에서 반신욕을 하면서 먹었다고 했다. 그리고 C는 욕조에서 반신욕을 하면서 칵테일을 여자사람친구와 먹었다고 한다. 한국 친구들에게 이런 말을 하면 ‘뭐야 여자친구?’라고 하지만, 그 여사친은 어릴때부터 아주 친한 동네 친구이고, 그녀에겐 이미 약혼자도 있다고 C는 덧붙였다. 독일에서는 남녀 구분없이 서로 친하게 잘 지내는 모습을 너무 많이 봐 와서 ‘그럴 수도 있지’ 싶다가도 ‘굳이? 투머치아닌가?’ 라고 생각이 든 다음에 느껴지는 감정은 ‘부러움’이었다. 남자와 여자가 아닌 인간대 인간으로서, 그저 일상의 소소함을 노닥거리고 수다를 떨고 그 안에서 또다른 영감과 동기부여를 얻는 친구 관계의 폭이 적어도 나보다는 훨씬 넓고 다양한 것이 부러웠고, 친한 친구와 그렇게 욕조에서 칵테일을 마시며 대화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환경에서 자란 것도 부러웠다.
나는 언제부터 남사친들과 격의 없이 지내는 게 자연스럽게 끊어지게 되었을까. 나는 여고를 나왔지만, 공대에 갔기 때문에 대학 초반에는 '친구' 하면 대부분이 남자였다. 우리는 친했고 편했고 재밌었다. 하지만, 그러다가 특정 한명과 특히 너무나 친하게 될 때 한쪽이 다른 한쪽을 소유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는 경우가 있었고, 다른 한쪽의 마음이 같지 않다면 죄책감을 안은 채로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작은 학교 특성상, 특정 친구와 단짝 친구마냥 가깝게 지내고 자주 놀면, 곧바로 이미 만난다는 소문이 퍼졌고, 그런 소문의 무서움과 일종의 책임감과 의무감 때문에 누군가를 만나게 된 적도 있었다. (당연하게도 그랬기 때문에 파탄 나는 건 시간문제였지만.) 남의 눈치를 보느라 조금씩 회피하게 된 것도 있지만, 또 다른 이유도 점차 생겼다. 애인들의 질투. 정말로 격의 없이 친한 고향 친구 남사친이 있었다. 작은 시골마을에서 고등학교 시절을 같이 보내고 타지로 대학교까지 함께 갔으니 정말로 친했다. 그는 여자친구가 생기면, 여자친구에게 나는 정말 친한 사이라고 미리 일러두었다. 나도 마찬가지로 당시 남자친구와 직접 술자리도 같이 만들어주며 정말 친한 사이라고 소개를 했었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 친했다. 그러나 몇 달이나 지났을까, 나를 만나는 날마다 그의 여자친구의 짜증이 그를 괴롭혔고, 그것은 점차 심해져 울며 불며 그 둘의 싸움으로 번지는 일이 잦아졌다. 그 여자친구는 내 후배이기도 해서 우리는 꽤 잘 지냈었는데, 내 존재가 누군가에게는 상처라는 건 정말로 유쾌한 감정은 아니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우리는 만나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이런 비슷한 과정으로 나는 남사친들을 거의 잃었다. 남녀가 붙어있기만 해도 몰아가는 주변의 오지랖 탓이었을까.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가치관이 여전히 잔재해서 사회적 분위기 탓이었을까. 청소년기 남녀가 함께 있으면 공부가 방해된다며 남고와 여고를 분리했던 사회적 시스템 탓이었을까. 사실은 내 탓이 많았겠지. 내 의지는 아니었을지라도 타인의 시선이 나의 관계에 영향을 끼칠만큼 나는 그것을 두려워했고, 나는 어쨌든 그것을 이겨낼 만큼 강해지 못했기 때문에. 그 이후에는 (나이가 들어서 자연스럽게 그런것과 더불어서) 친구의 폭이 굉장히 줄어들었음이 새삼 느껴졌다.
이런 분리 때문에 현재의 젠더 갈등은 깊어졌을까, 아니면 깊어진 젠더 갈등 때문에 분리가 더욱 심해진걸까는 알 수 없지만, 처음 독일에 왔을때 너무 다른 분위기에 놀란 적이 있었다. 안타깝게도 성희롱, 성추행은 이곳에 온 아시아권 여성이라면 길가든 지하철이든 어디에서든 한 번 이상씩은 겪는다고 한다. 흔한 일임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독일에 온 지 얼마 안 됐을때, 같은 연구소 사람 한명이 파티에서 나를 성희롱, 성추행을 했던 적이 있다. 추후에 '술을 많이 마셔서 기억이 안난다, 자기는 처자식이 있는 성실한 사람이다' 따위의 되도 않는 뻔하고 뻔뻔한 변명을 해대는 그 병신한테 강한 경고를 하는 것으로 마무리는 했는데 (신고하려 노력했으나 그 병신은 그 날을 마지막으로 연구소 계약이 종료되어, 본국 콜롬비아로 돌아갔기때문에 무의미했다), 사실 그때 그 사건 자체보다 내가 더욱 놀란 것은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었다. 독일에 오기 전에 한국에서는 젠더 이슈가 한창이었고 직장 내에 성희롱 문제는 심각한 문제로 크게 다뤄지고 있었다. 나는 무슨 이유인지 여기도 당연히 비슷한 분위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병신에 대한 여기 친구들의 반응은, ‘걔, 나 처음왔을때도 그랬어. 진짜 병신새끼야.’, ‘진짜 역겹다.’… 이게 다였다. 정말 이게 전부였다. 솔직히 그 병신이 사회적으로 매장되는 죗값을 치르기를 바랬지만, 주변 친구들이 그렇게 간단하게 종결해버린 마당에 내가 자꾸 이야기를 꺼낼수도 없고, 조금 황당하고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나중에 차차 느끼게 된 것인데 여기의 친구들은 오히려 이민자 얘기가 나오면 정말로 첨예한 갈등이 벌어지고 살벌한 의견대립이 생긴다는 것이다. 반면 젠더 이슈는 우리나라에서 난민 이슈를 이야기 하는 정도로 소극적 관심을 보인달까. 이것을 자주 보면서 나는 '이곳에서 젠더는 어느정도 해결이 된 문제이고, 그것보다 현재 이들의 삶에 더 영향을 끼치는 문제는 난민 이슈다'라고 결론 지을 수 있었다. 물론 여기에서도 equality issue 라는 이름으로 남녀평등을 위한 활동이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지만, 그것과 별개로 이미 남녀평등이 중요하다고 인지하고 인정하고 있고, 남녀 구분없이우리는 친구다, 하는 분위기가 만연하고 이미 내재되어있는 듯 하다. 그만큼 젠더에 관한 것들은 여기서는 그다지 중요하거나 급한 이슈가 아닌 것이다. 이에 반해 한국에서는 오히려 난민과 이민자에 대한 이슈는 굉장히 수면 아래에 있다. 대개 그 이슈에 대해 잘 알지 못하거나, 관심이 없거나, 그게 왜 중요하냐는 입장이다. 즉, 한국에서 난민과 이민자에 대한 이슈를 인식하는 정도로 여기에서 젠더 이슈를 인식하고, 한국에서는 젠더 이슈가 중요한 문제인 만큼 이곳에서 난민 이슈를 크게 보는 서로 상반된 모습이다.
(나는 이걸 통해 뭘 말하고 싶은 걸까,,,,,,, 자꾸 무거워지고 딥해져서 어떻게 이어나가야할지를 모르겠다. 몰라 그만 쓸래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