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성어(의태어)가 3번 이상 들어간 글 (20210910)
“포동포동포동 살찐 포도 송이처럼, 동글동글동글 알찬 우리동무.
송알송알송알모여서 방실방실방실웃으며 소곤소곤소곤 정다운 우리동무.
우리모두사이좋게 포도 송이 처럼, 아름답게 노래하자 우리동무.”
“세상을 아름답게 꾸며주는 소리는 무얼까, 정다운 소리를 찾아서 글나라로 여행가자. 또각또각 할머니의 다듬이소리, 칙칙폭폭 추억속의 기차소리, 비개인 숲속에 산새소리 쪼로롱쪼로롱 뻐꾹새 뻐꾹뻐꾹 노래한다. 소리는 새콤새콤새콤하게 글은 달콤 달콤하게 소리찾아 떠나는 글나라여행, 새콤달콤 새콤달콤. “
정확도 99%로 모든 가사와 노래를 기억하고 있다. 너무 철 지난 동요들이라 그런지 인터넷에 잘 안나오는 것도 많지만, 찾았다 하면 너무나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기억하고 있는 나에게 감탄할 뿐이다.
한국어 노래 뿐만이 아니다. ‘티엔 미미 니 샤우더 티엔미미 니 더샤우롱 쯔어 양 수시. 워 이슬 싸우부치. 짜이 나알리 짜이 나알리 니엔꿔니…..’ 중국어 노래도 선생님이 불러주시는걸 한글 소리나는대로 받아적어서 외워서 불렀던 걸 지금까지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자 아인 크랍아인 뢰스라인슈틴 뢰스라인 아프데르 하이덴.’ 들장미라는 외국 가곡이었는데, 어디 나라 말인지도 모르고 그저 앵무새처럼 불렀다. 지금에서야 다시 찾아보고 그게 독일어였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독일어인지도 모르고 독일 노래를 부르던 그때만해도 본인의 20년 후의 미래가 이렇게 독일에서 벌어지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겠지. 아무튼 나의 기억력 덕인지, 노래의 힘 덕분인지 너무 정확하게 약 20년간 기억하고 있다.
이렇게 강력하게 그때의 모든 노래를 가사와 함께 정확히 기억할 만큼 그때, 그러니까 대략 20년 전의 초등 고학년 때의 내 아이덴티티는 ‘노래’였다. 그 때 나에게 노래는 가요와는 아주 거리가 먼 합창, 동요, 가곡, 등등 이었다. 학교 안에서 CA 활동으로 한 합창부에서 합창, 중창, 독창 활동은 기본이고 ‘열려라 동요세상’이라는 TV 동요경연대회에 나가는 등 여기저기 활동을 했었다. 그때 난생처음 충격적인 자기객관화를 경험했는데, 텔레비전에 나온 나의 까무잡잡하고 꾀죄죄한 모습, 기름진 얼굴, 반쯤 감긴거 같은 눈에다가 노래도 그지같은 나를 마주했던 것이다. 그 날 이후 다시는 텔레비전에 내가 나오는 일은 없기를 바라며 살게 되었다는 여담이 있지만,,, 어쨌든 그런 활발한 동요 활동 덕에 나는 학교 추천으로 시? 대학교? 방송국? 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하여간 종교 관련 방송국 같은 곳에서 운영하는 소년소녀 합창단의 단원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우리가 녹음한 노래가 거기의 라디오 방송에서 매주 나왔고, 중국 소년소녀합창단과 매년 교류행사를 했고, 매년 시립 문화회관을 빌려 두 세시간짜리 정기 연주회를 했으니 내 12년 인생에서는 가장 스케일이 컸던 활동이었던 것 같다. 노래 뿐만 아니라 기악합주, 난타, 재즈댄스, 안무 등등 종합예술활동을 방학때는 합숙훈련까지 했었다. 수 년에 걸쳐서 활동한 덕에 못해도 70-100곡 정도는 수도 없이 연습했지 않았을까. 당시 입력한 모든 것들을 몸은 기억하고 있다.
그때 합창, 노래는 내 아이덴티티였고, 그때는 내가 당연히 성악가, 아니면 피아니스트가 될 줄 알았다. 그리고 그것들은 지금의 나와 단 하나의 접점도 없다. 지금처럼 공부를 하고 과학을 하고 연구를 하게 될거라고는 단 1퍼센트도 예상할 수 없는 삶이었다. 그렇다고 성악가나 피아니스트를 보면서 나도 저렇게 될 수 있었는데하거나 다시 저걸 하고싶다는 생각은 절대 없는데, 사실 그때는 그냥 그것이 되고싶다 하던 열정이 있던게 아니라, 하던게 그것이니까 계속 그걸 하고 있지 않을까하는 막연한 생각뿐이었기 때문인것같다. 그때의 예상을 배반해 버린 것이 과거의 나에게 미안할 일인지, 열정이 없는 길을 가지 않은 것이 감사한 일인지조차 모르겠다.
그래서 좋다 싫다 하는건 없지만, 이런 플로우는 최근 연구소 일로 작고 큰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중인 나에게 조금은 위로가 된다. 근 10년 가까이 하던게 과학이고 연구이고 학위 과정이었으니, 미래 또한 지금이랑 비슷한 방식으로 흘러갈거라고 생각해왔다. 썩 희망찬 감정은 아니다. 그러나 20년 전에는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분야로 와버린 것처럼 20년후에는 내가 현재 예상도 하지 못한 무언가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겠지. 합창단 활동을 할 때는 가사를 외우지 못하는 것, 춤을 외우지 못하는 것이 내 인생 최대의 스트레스고 괴로움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전혀 알 필요도 중요하지도 않은 것들. 비슷한 방식으로 지금 하는 것들은 어느 시점에는 그다지 크게 중요하지 않을 것들.